12회. 남는 것

by Director Keige

밴은 경기도 외곽의 폐공장으로 향했다.


정인이 탄 택시는 멀찍이 떨어져 따라갔다.


"손님, 정말 괜찮으세요? 위험해 보이는데..."


기사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괜찮아요. 조금만 더 따라가 주세요."


정인의 손은 떨렸지만,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밴이 낡은 건물 앞에 섰다. 오범준과 그의 팀이 지혁을 끌고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세워주세요."


정인은 요금을 지불하고 내렸다.


"손님, 위험하면 112 누르세요!"


기사의 당부를 뒤로 하고, 정인은 건물로 다가갔다.


건물 내부, 지하.


지혁은 철제 의자에 묶여 있었다.


오범준이 의료 장비들을 준비하고 있었다. 주사기, 메스, 채혈 도구들.


"이제 시작하겠습니다."


오범준이 장갑을 끼며 말했다.


"먼저 혈액 샘플부터. 그다음 조직 샘플. 그리고..."


"그리고 나를 해부하겠군."


지혁이 냉정하게 말했다.


"해부라니요. 그런 야만적인..."


"예전에도 똑같은 말을 들었거든..."


지혁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연구'라고 했고. '인류를 위해'라고 했어. 하지만 결국 고문이었지."


오범준의 표정이 굳었다.


"저는 달라요."


"모두 똑같아.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지혁은 오범준을 똑바로 바라봤다.


"당신은 생명을 구하고 싶다고 하지만, 결국 당신의 명예를 위한 거야. 노벨상? 역사에 남는 발견?"


"...아... 제.. 발 좀! 닥쳐! 닥치라고!!"


"진실이 아파?"


오범준이 메스를 집는 순간 눈 빛이 달라졌다.

눈 빛과 함께 말투도 다른 사람이 되었다.


"당신이 뭘 알아. 수많은 사람이 죽어가고 있어. 암, 불치병, 노화. 당신의 비밀로 그들을 구할 수 있다니까!"


"드디어 본색이 들어내는 군, 그래 나를 죽여서 누군가를 구한다?"


"죽긴 누가 죽어? 죽지 않는 다니까!"


오범준이 소리쳤다.


"당신은 특별해. 불사의 몸. 그건 인류의 자산이야."


"... 자산이 아니라 저주였지..."


지혁의 목소리가 떨렸다.


"116년을 살았어. 사랑하는 사람들이 죽는 걸 봤고. 친구들이, 동지들이, 모두 늙어 죽었어. 나만 남았지."


"영원을 사는데 그정도는.. 당연한거고 축복 아닌가?"


"만약 당신이 불사의 비밀을 밝혀낸다면? 모두가 영원히 산다면? 그게 축복일까?"


지혁은 천장을 바라봤다.


"죽음이 있어야 삶이 의미가 있어. 끝이 있어야 시작이 아름다운거거든."


오범준은 한참을 지혁을 바라보다가, 순간 오랜 시간 살아 온 그의 이야기가 궁금해 졌다.


"그래 시간도 많은데 서두를 필요는 없지. 오랜시간 살아 온 당신의 이야기도 꽤 흥미로울 것 같아."


오범준은 메스를 내려놓고 지혁을 천천히 바라봤다.


"많이 지쳐보이는 군.. 그래 지칠만도 하겠지?"


"그래, 이미 나의 의지는 없어. 지친걸 넘어 섰지..."


"그렇게 지쳤는데, 왜 도망쳤어? 왜 숨어 살았어? 죽고 싶었다면 그냥 죽으면 됐잖아."


지혁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살아야 할 이유가 있었으니까."


"이유?"


"빚."


지혁의 목소리는 조용했다.


"동지들은 죽었지만, 난 살아 남았어. 그들의 가족들은 가난 속에 살았지만. 나만 살아서..."


지혁의 목소리가 떨렸다.


"갚아야 했어. 그들에게 진 빚을. 독립유공자 지원, 후손 돕기, 그 모든 게 나에겐 속죄였어."


"속죄...?"


"그래, 속죄.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 그게 나를 버티게 했지."


오범준은 의자에 앉았다.


"나로서는 이해가 안되는데.. 굳이? 그렇다면 이제는? 빚을 다 갚은건가?"


"아니. 평생 갚아도 부족할 거야."


"그럼 앞으로도 이렇게 사람들 틈에 숨어서, 혹은 그들의 곁을 떠나서 살아 간다고?"


지혁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번에는 그들 틈에서, 그들 곁에서 살아가 보려고."


같은 시각, 건물 밖.


정인은 창문으로 안을 들여다봤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였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어둡고 냉랭한 복도. 발소리가 울렸다.


계단을 내려가는데, 휴대폰이 진동했다. 창희였다.


"정인 씨, 어디 계세요?"


"...건물 안이요. 지혁 씨를 찾고 있어요."


"지금 경찰과 함께 가고 있습니다. 10분이면 도착해요. 그때까지 숨어 있어요."


"알겠습니다."


정인은 전화를 끊고 계단을 내려갔다.


지하실 문 앞에 도착했다.


안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지혁과 오범준의 대화.


"마지막으로 묻죠."


다소 차분해진 오범준의 목소리였다.


"그냥 협조하고 나와 함께 인류의 새 시대를 여는 건 어때? 아니면 강제로 진행할 수 밖에 없어."


"거절합니다."


지혁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그럼 어쩔 수 없군."


무언가 금속 소리가 들렸다. 메스? 주사기?


정인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멈춰요! 당장!"


오범준과 지혁이 놀라 정인을 봤다.


"정인 씨? 어떻게..."


"놔주세요. 제발."


정인이 애원했다.


"이미 우리의 거래는 끝난걸로 아는데."


"돈은 돌려드릴게요. 그러니까 제발..."


"늦었어요."


오범준이 주사기를 들었다. 그리고는 위협을 하듯 정인을 향하며 조용히 말했다.


"방해하지 마세요."


"안 돼요!"


정인이 달려들었다. 오범준과 몸싸움이 벌어졌다.


"정인 씨, 위험해요!"


지혁이 소리쳤다.


주사기가 바닥에 떨어졌다. 오범준이 정인을 밀쳤다. 정인이 벽에 부딪혔다.


"정인 씨!"


지혁이 묶인 팔을 힘껏 당겼다. 로프가 끊어졌다. 오랜 시간 단련된 힘이었다.


지혁은 일어나 오범준을 밀쳤다. 오범준이 의료 장비에 부딪히며 쓰러졌다.


"정인 씨, 괜찮아요?"


지혁이 정인에게 달려갔다.


"네... 괜찮아요."


정인은 일어서며 지혁을 붙잡았다.


"미안해요. 제가... 제가 당신을..."


"괜찮아요.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하지만..."


"제가 선택했어요. 여기 온 것도, 맞서는 것도."


지혁은 정인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당신이 구하러 와준 거, 고마워요."


정인의 눈에 눈물이 흘렸다.


그때 위층에서 소리가 들렸다. 경찰 사이렌.


"경찰이다! 움직이지 마!"


창희가 경찰을 데리고 들어왔다.


"회장님!"


오범준이 일어나려 했지만, 경찰이 재빨리 제압했다.


"불법 감금, 상해 미수 혐의로 체포하겠습니다."


오범준은 끌려가며 지혁을 봤다.


"당신의 비밀은... 언젠가 밝혀질 거야..."


"아니, 조만간 내가 직접 밝힐거야."


지혁의 대답에 오범준이 놀랐다.


"숨는 건 이제 지쳤어. 언젠가는... 진실을 말할 날이 올 거라 생각은 했었어."


오범준은 더 이상 말하지 못하고 끌려갔다.


다음 날 아침


정인은 병원에 있었다.


어제 다친 곳을 치료받았다. 가벼운 타박상뿐이었다.


"정인아!"


정인의 엄마가 달려왔다.


"엄마, 난 괜찮아. 많이 안 다쳤어."


"무슨 일이야 이게... 뉴스에서는 기업인 납치 사건이라던데..."


"...길게 설명하기 어려워. 나중에 얘기할게."


정인은 어머니를 안았다.


"엄마, 치료비는 걱정 마. 내가 어떻게든 마련할게."


"정인아..."


"회사에 대출 신청할게. 분할 상환도 가능하대."


실제로 창희가 연락했다. 회사에서 무이자 대출을 지원하겠다고. 정인이 거절했지만, 창희는 고집했다.


"회장님의 뜻입니다. 직원 복지 차원이니 부담 갖지 마세요."


일주일 후


정인은 출근했다. 동료들이 반겼다.


"정인아, 괜찮아?"


"응, 이제 다 나았어요."


"무슨 일이길래 뉴스에 까지?"


"그냥... 우연히 휘말렸어."


정인은 웃으며 넘겼다.


회의가 있었다. 정인은 회의실로 향했다.


지혁이 구석 자리에 앉아 있었다. 평소처럼.


정인은 그 옆으로 갔다. 처음으로, 지혁 바로 옆에 앉았다.


"...앉아도 돼요?"


"물론이죠."


둘은 나란히 앉았다. 회의가 시작됐다.


회의 중간, 정인이 작게 속삭였다.


"고마워요."


"뭐가요?"


"대출. 회장님이 지시하셨죠?"


"...직원 복지예요."


"거짓말."


정인이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요. 정말."


지혁은 대답 대신 미소를 지었다.


회의가 끝나고, 둘은 복도를 함께 걸었다.


"저기..."


정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시간 되시면... 커피 한잔 할까요?"


"좋아요."


회사 근처 카페.


둘은 마주 앉았다. 정인은 아메리카노를, 지혁은 따뜻한 차를 주문했다.


"저... 궁금한 게 있어요."


"말씀하세요."


"100년이 넘는 시간을 살면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이 언제였어요?"


지혁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희열이를 두고 떠날 때요."


"희열이?"


"윤순태의 아들. 제가 아꼈던 아이였어요. 하지만... 데려갈 수 없었죠. 함께 있으면 위험했으니까."


지혁의 목소리가 떨렸다.


"평생 후회했어요. 그때 손을 놓은 걸."


정인은 지혁의 손을 봤다. 약지 없는 손.


"하지만 1995년에 다시 만났어요. 희열이가 여든 살 노인이 됐을 때."


"어땠어요?"


"울었어요. 둘 다. 그리고... 희열이가 말했어요. '고생 많으셨습니다'라고."


지혁은 미소를 지었다.


"그때 깨달았어요. 제가 떠난 게 잘못은 아니었구나. 희열이는 잘 자랐고, 행복하게 살았고."


"그럼 후회하지 않으세요?"


"후회는 해요. 하지만... 이해하게 됐어요. 때로는 떠나는 게 사랑이라는 걸."


정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지혁이 정인을 바라봤다.


"이번에는 떠나고 싶지 않아요."


정인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저... 저 때문에요?"


"네. 그리고 저 자신을 위해서도요."


지혁은 차를 마셨다.


"너무 오랫 동안 도망만쳤어요. 이제는 머물고 싶어요. 한곳에. 한 사람과."


정인은 얼굴이 빨개졌다.


"하지만 저는... 평범한 사람이에요. 당신처럼 특별하지 않고..."


"그래서 좋아요."


지혁은 미소를 지었다.


"당신은 평범하게 살아가잖아요. 아픔을 견디고, 트라우마와 싸우고, 어머니를 돌보고. 그게 얼마나 용감한 건지 아세요?"


정인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저는 용감하지 않아요. 그냥... 버티는 거예요."


"버티는 것도 용기예요."


지혁이 정인의 손을 잡았다. 약지 없는 손으로.


"함께 버텨요. 이제부터는."


정인은 지혁의 손을 꽉 잡았다.


"...네."


3개월 후


효숙의 수술이 성공했다.

의사는 예후가 좋다고 했다. 항암 치료를 잘 받으면 완치 가능하다고.

정인은 어머니 병실에서 지혁에게 전화했다.


"수술 잘 끝났어요."


"다행이네요. 축하해요."


"고마워요. 모든 게... 당신 덕분이에요."


"아니에요. 정인 씨가 강했던 거예요."


정인은 미소를 지었다.


"저녁에 시간 돼요? 어머니가... 당신을 만나고 싶다고 하세요."


"...저를요?"


"네. 제가 많이 얘기했거든요. 물론 100년 넘게 산 이야기는 빼고요."


지혁이 웃었다.


"가겠습니다. 몇 시에 갈까요?"


"7시요. 병원 근처 식당에서 만나요."


"알겠습니다."


저녁 7시


지혁은 정인의 어머니(효숙)를 처음 만났다.


"어머니, 안녕하세요. 안지혁입니다."


"아이고, 정인이한테 많이 들었어요. 고마워요, 우리 정인이 도와주셔서."


"별말씀을요. 정인 씨가 스스로 잘했어요."


셋은 함께 식사를 했다. 효숙은 지혁에게 이것저것 물었다.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정인이 깜짝 놀라 지혁을 봤다. 지혁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많습니다."


"하하, 겸손하시네. 젊어 보이는데."


"감사합니다."


식사가 끝나고, 효숙이 자리를 떠났다. "너희들끼리 시간 좀 가져"라며.


정인과 지혁은 강변을 걸었다.


"어머니 좋은 분이시네요."


"네. 강하셔요. 저보다 훨씬."


"딸을 어머니를 닮았나 봐요."


정인이 얼굴을 붉혔다.


"저기..."


"네?"


"언제쯤 당신의 모든 이야기를 해 줄거에요? 당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했는지..."


지혁은 한강을 바라봤다.


"언젠가는요. 하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왜요?"


"아직 준비가 안 됐어요. 세상도, 저도."


지혁은 정인을 바라봤다.


"하지만 당신한테는 말했잖아요. 내가 누구인지. 그것만으로도 큰 변화예요."


"저를... 믿어요?"


"네. 처음으로... 누군가를 완전히 믿어봐요."


정인은 지혁을 안았다. 갑작스러운 포옹에 지혁이 놀랐지만, 곧 정인을 안아주었다.


"고마워요. 떠나지 않아줘서."


"저야말로 고마워요. 머물 곳을 만들어줘서."


둘은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강 건너편에서 불빛들이 반짝였다. 살아 있는 도시. 살아가는 사람들.


지혁은 116년 만에 처음으로 생각했다.


'이곳에 머물러도 괜찮을지 모르겠다.'


미래가 어떻게 될지, 이 관계가 어디로 갈지.


하지만 괜찮았다.

확신이 없어도, 두려움이 있어도, 함께라면 한 걸음씩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바느질을 배웠듯이.

떠나지 않는 법도, 머무는 법도, 천천히 배워갈 수 있을 것이다.


지혁과 정인은 걸었다. 나란히, 천천히.

한강변을 따라, 불빛을 따라, 사람들 사이로.


숨지 않고. 도망치지 않고.


그저 함께.

그들의 이야기는 이제 막 시작이었다.


어떤 결말을 맞이하게 될지, 어떤 시련이 기다리고 있을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용감할 수 있다는 것.


멀리서 둘의 뒷모습을 바라보면, 평범한 연인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들은 알고 있었다.


116년을 살아온 남자와, 10년의 트라우마를 견딘 여자.

둘 다 상처투성이였고, 둘 다 완벽하지 않았다.


하지만 함께였다.

그리고 그것이 전부였다.


바람이 불었다. 겨울 바람이었지만, 따뜻하게 느껴졌다.


봄이 오고 있었다.


새로운 계절이.


새로운 시작이.




"시간은 모두를 데려간다. 하지만 함께한 순간은 영원히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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