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은 느리게 지나갔다.
지혁은 회장실에서 시계를 계속 확인했다. 오후 3시. 4시. 5시. 저녁 7시가 다가오고 있었다.
"회장님, 정말 가시겠습니까?"
창희가 물었다.
"가야지."
"함정일 수 있습니다."
"알아. 분명 함정이야."
지혁은 창밖을 바라봤다.
"하지만 정인 씨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거야. 어머니가 아프고, 돈이 필요하고."
"그렇다고 회장님이 위험을 무릅쓸 필요는..."
"창희야."
지혁이 창희를 돌아봤다.
"나는 오랜시간을 도망쳤어. 이제는 맞서고 싶어."
창희는 더 이상 말리지 않았다. 다만 걱정스러운 얼굴로 지혁을 바라볼 뿐이었다.
"경호원을 대동하시겠습니까?"
"아니. 혼자 갈게."
"하지만..."
"정인 씨를 더 놀라게 하고 싶지 않아. 이미 충분히 무서워하고 있을 테니까."
지혁은 코트를 입었다. 약지 없는 손으로 단추를 채웠다.
"만약 내가 오늘 밤 돌아오지 않으면..."
"회장님."
"회사는 부탁해. 그리고... 독립유공자 지원 프로그램은 계속 유지해줘."
창희의 눈이 붉어졌다.
"...돌아오실 거죠?"
"노력할게."
지혁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회장실을 나섰다.
저녁 6시 30분, 여의도 한강공원
정인은 먼저 도착해 있었다.
벤치에 앉아 한강을 바라봤다. 겨울 바람이 차갑게 불었다. 손이 떨렸다. 추워서인지, 두려워서인지 알 수 없었다.
휴대폰이 울렸다. 오범준이었다.
"준비됐나요?"
"...네."
"좋아요. 우리 팀이 주변에 대기하고 있습니다. 안지혁이 오면 신호를 주세요."
"신호?"
"휴대폰으로 제게 전화하세요. 그럼 우리가 움직일게요."
"...알겠습니다."
"잘하고 계십니다, 최정인 씨. 어머님을 위해서."
전화가 끊겼다. 정인은 한강을 바라보며 눈을 감았다.
'미안해요.'
누구에게 하는 사과인지 정인도 몰랐다. 어머니에게? 지혁에게? 자신에게?
오후 7시. 지혁이 나타났다.
멀리서 걸어오는 모습. 검은 코트에 모자를 눌러쓴 모습.
하지만 정인은 한눈에 알아봤다. 걸음걸이. 어깨의 각도. 손의 모양.
"정인씨."
지혁이 벤치 옆에 섰다.
"...안녕하세요."
정인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지혁은 정인 옆에 앉았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무슨 할 말이 있다고 하셨죠?"
정인은 입술을 깨물었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천천히 하세요. 급하지 않아요."
지혁의 목소리는 따뜻했다. 정인의 죄책감은 더 커졌다.
"저..."
정인은 가방에서 사진들을 꺼냈다. 오범준이 보낸 사진들.
"이게... 뭔가요?"
지혁은 사진들을 봤다. 1963년부터 2026년까지의 자신의 모습.
"...어디서 받았어요?"
"누군가 이메일로 보냈어요."
정인의 목소리가 떨렸다.
"안지혁 씨... 아니, 안중근... 님?"
지혁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들켰다. 완전히. 예상은 했지만 그래도 심장은 빨리 뛰었다.
"정인씨..."
"진짜예요? 당신은... 100년을 넘게 산 사람인가요?"
지혁은 한참을 침묵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정인의 손이 떨렸다.
"어떻게... 그게 가능해요?"
"저도 잘 모릅니다. 1910년에... 죽었어야 했는데, 살아났어요. 그리고 계속... 살고 있습니다."
지혁의 목소리는 조용했다.
"괴물처럼 들리죠?"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니까요."
지혁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약지 없는 손.
"1910년, 단지동맹 때 자른 손가락입니다. 그때부터... 저는 괴물이 됐어요."
정인은 지혁을 바라봤다. 지혁의 얼굴에는 깊은 슬픔이 있었다.
"왜... 왜 저한테 접근했어요?"
"접근한 게 아닙니다. 그냥..."
지혁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냥 걱정됐어요. 당신이 혼자 버티는 모습이... 제 모습 같았거든요."
"당신 모습?"
"네. 저도 오랜시간을 혼자 버텼습니다. 떠나는 것으로 사람들을 지켰고, 숨는 것으로 살아남았고."
지혁의 목소리가 떨렸다.
"하지만 그건 치유가 아니었어요. 회피였죠. 그걸 당신한테서 봤어요."
정인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어떤 의미의 눈물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저를 도와준 건가요?"
"네. 그리고..."
지혁은 정인을 바라봤다.
"이번에는 떠나고 싶지 않았어요."
정인은 고개를 돌렸다. 눈물이 흘렀다.
"미안해요."
"왜요?"
"저... 당신을 배신했어요."
정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범준이라는 사람이... 어머니 치료비를 대신 줄 테니, 당신을 만나게 해달라고 했어요."
지혁의 표정은 의외로 담담했다.
"그래서 절 여기로 부른 거겠죠?"
"...네."
정인은 얼굴을 감쌌다.
"미안해요. 하지만 저는... 어머니를 살려야 했어요."
"알아요."
지혁의 대답에 정인이 놀라 고개를 들었다.
"...뭐라고요?"
"저도 알고 있었어요. 오범준의 제안."
"그런데 왜 왔어요?"
"당신 탓이 아니니까요."
지혁은 먼 하늘을 바라봤다.
"오범준은 비겁하게 당신을 이용했어요. 당신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고."
"하지만..."
"괜찮아요. 어차피 저도 오범준을 만나려고 했으니까."
지혁이 일어섰다.
"이제 곧 오범준이 나타나겠죠?"
정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손이 떨렸다.
"...전화하라고 했어요."
"그럼 전화하세요."
"하지만..."
"괜찮아요."
지혁은 미소를 지었다.
"이번에는 도망치지 않을 거예요."
정인은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꺼냈다. 오범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왔어요."
"좋아요. 우리가 곧 도착할게요."
전화가 끊겼다.
5분 뒤, 검은색 밴 두 대가 도착했다. 문이 열리고 오범준과 그의 팀이 내렸다.
오범준은 지혁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만나는군요, 안지혁 회장. 아니, 안중근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지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오범준을 똑바로 바라볼 뿐이었다.
"116년. 정말 대단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오래 살 수 있었죠?"
"당신이 알 필요는 없는 것 같은데..."
"하지만 저는 알고 싶습니다. 그 비밀을."
오범준이 팀원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남자 넷이 지혁을 둘러쌌다.
"저항하지 마세요. 조용히 따라오시면 다치지 않을 겁니다."
"거절하면?"
"강제로 모시겠죠."
오범준은 냉소를 지었다.
"당신은 죽지 않잖아요. 조금 다쳐도 금방 회복될 테니까."
지혁의 주먹이 쥐어졌다.
"오범준!!"
"???"
"1910년 실험을 알고 있다면, 한 가지 더 알아야 할 게 있어."
"그게 뭘까요?"
"난는 독립투사였소. 싸우는 법을 알아."
순간, 지혁이 움직였다.
빠르게. 정확하게. 116년 전 배운 격투술.
첫 번째 남자가 쓰러졌다. 두 번째 남자가 지혁의 팔을 잡았지만, 지혁이 비틀어 던졌다.
"진압하세요!"
오범준이 소리쳤다. 나머지 남자들이 달려들었다.
지혁은 싸웠다. 죽지 않는 몸으로. 총에 맞아도, 칼에 베어도 회복되는 몸으로.
하지만 수적으로 불리했다. 결국 지혁은 무릎을 꿇었다. 팔이 뒤로 꺾였다.
"좋아요. 차에 태우세요."
오범준이 명령했다.
"안 돼요!"
정인이 소리쳤다.
"약속했잖아요! 대화만 한다고!"
"약속은 깨지라고 있는 거죠."
오범준은 냉정하게 대답했다.
"최정인 씨, 어머님 치료비는 내일 입금하겠습니다. 약속은 지켰으니까요."
"이건 아니에요!"
정인이 달려들었다. 하지만 한 남자가 정인을 밀쳤다. 정인이 바닥에 넘어졌다.
"정인 씨!"
지혁이 소리쳤다. 하지만 팔이 묶여 있었다.
"괜찮아요, 다치지 않았어요."
정인이 일어서며 말했다.
"하지만 당신은..."
"저는 괜찮습니다."
지혁은 정인을 바라봤다.
"정인 씨, 당신 탓이 아니에요. 기억하세요."
"지혁 씨..."
"그리고..."
지혁은 미소를 지었다.
"차를 탈 수 있게 된 거, 축하해요."
정인의 눈에 눈물이 쏟아졌다.
"싫어요... 가지 마세요..."
"이번에는 떠나는 게 아니에요. 곧 돌아올게요."
지혁은 밴에 실렸다. 문이 닫혔다.
밴이 출발했다. 정인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무릎을 꿇었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정인은 한참을 울었다.
밴 안에서, 지혁은 창밖을 바라봤다.
오범준이 옆에 앉았다.
"걱정 마세요. 다치게 하지 않을 겁니다. 그냥... 연구만 할 거예요."
"연구?"
"네. 당신의 재생 능력, 불사의 비밀. 그걸 밝혀내면 수많은 생명을 구할 수 있어요."
"그 과정에서 나를 죽일 거면서."
"죽지 않잖아요."
오범준은 미소를 지었다.
"그게 당신의 저주이자, 제 축복이죠."
지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생각했다.
'창희가 움직일 거야. 곧.'
지혁은 오범준을 만나기 전에 창희에게 지시했다. 만약 자신이 납치되면, 경찰에 신고하고, 위치 추적을 하라고.
지혁의 코트 안쪽에는 GPS 추적기가 숨겨져 있었다.
'조금만 버티면 돼.'
지혁은 주먹을 쥐었다. 약지 없는 손으로.
이번에는 도망치지 않는다. 이번에는 맞서 싸운다.
한강공원에 홀로 남은 정인은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꺼냈다.
누구에게 전화해야 할까. 경찰? 하지만 뭐라고 말하지? 116년을 산 사람이 납치됐다고?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여보세요?"
"최정인 씨?"
중년 남자의 목소리였다.
"저는 박창희입니다. 대한실업 대표이사."
"박 대표님..."
"회장님이 어디로 끌려갔는지 아십니까?"
정인은 놀라 대답했다.
"모릅니다. 검은색 밴이었는데..."
"알겠습니다. GPS로 추적하고 있습니다. 걱정 마세요, 회장님을 구해낼게요."
"제가... 제가 뭘 도와드릴 수 있을까요?"
"집에 가서 기다리세요. 회장님은 제가 모셔올게요."
전화가 끊겼다. 정인은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결심했다.
집에 가서 기다릴 수 없다. 자신이 만든 상황이다. 자신이 해결해야 한다.
정인은 택시를 잡았다.
"어디로 가시겠어요?"
기사가 물었다.
정인은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따라가 주세요. 저 검은색 밴."
멀리 보이는 밴을 가리켰다.
"네? 미행이요?"
"부탁드립니다."
정인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10년 만에 택시를 탔다. 손이 떨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견딜 수 있었다.
지혁을 구하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