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회. 진실의 무게

by Director Keige

정인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어머니의 재발 소식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치료비, 병원비, 생활비. 계산기를 두드릴수록 숫자는 감당할 수 없이 커졌다.

새벽 3시. 정인은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어떻게 하지...'


그때 휴대폰이 진동했다. 이메일 알림이었다.


발신인: unknown@anonymous.com

제목: 당신이 알아야 할 진실


정인은 이메일을 열었다. 첨부파일이 10개 있었다. 사진과 파일들이었다.


첫 번째 사진을 열었다.

오늘 버스 정류장. 자신과 지혁이 함께 서 있는 모습.


두 번째 사진. 공장 앞. 나란히 걷는 모습.

세 번째 사진. 휴게소. 벤치에 앉아 대화하는 모습.


정인의 손이 떨렸다. 누군가 자신들을 찍었다. 감시하고 있었다.


네 번째 사진을 열었다.

1995년 독립유공자 행사. 백발의 노인과 손을 잡고 있는 젊은 남자. 얼굴은 흐릿했지만, 정인은 알아볼 수 있었다.


지혁이었다.


다섯 번째 사진. 1980년대로 보이는 공장 현장. 재봉틀 앞에 앉은 남자. 같은 얼굴.

여섯 번째 사진. 1970년대 신문 기사. 수출 유공 기업 시상식. 뒷줄에 서 있는 남자.

일곱 번째 사진. 1963년 회사 설립 당시. 박동희 옆에 서 있는 남자.


모두 같은 얼굴이었다. 전혀 늙지 않은 얼굴.


정인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마지막 사진은 문서 스캔본이였다. 대한실업 내부 문서. 설립자 명단.


박동희, 안승민(現 안지혁)


"안승민... 안지혁..."


정인은 중얼거렸다.


이메일 본문에는 짧은 메시지가 있었다.


"안지혁은 인간이 아닙니다. 그는 100년 이상을 살았습니다. 당신은 실험의 미끼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조심하세요."


정인은 휴대폰을 떨어뜨렸다.




다음날 아침, 정인은 출근하지 못했다.


팀장에게 연차를 냈다. "개인 사정"이라고만 말했다.


집에서 하루 종일 사진들을 들여다봤다. 확대하고, 비교하고, 분석했다.

1963년부터 2026년까지. 63년. 얼굴이 똑같았다.


"말도 안 돼..."


하지만 부정할 수 없었다. 증거가 너무 많았다.

약지 없는 손. 회사 연혁에서 지워진 이름. 얼굴 없는 회장. 비공개 동선.


그리고 어제, 차 안에서 했던 말.


'사람은 적응하더라고요. 어떤 상처에도.'


어떤 상처? 얼마나 오래된 상처?


정인은 검색을 시작했다.


"안중근 사형 1910"

"안중근 약지"

"안중근 손가락"


검색 결과가 쏟아졌다. 안중근의 단지동맹. 약지를 자른 독립운동가.


정인의 손이 떨렸다.


"설마..."


하지만 퍼즐 조각들이 맞아떨어졌다.

1910년 사형. 하지만 죽지 않았다. 살아남았다. 100년이 넘는 시간을.


"안지혁... 당신은 누구죠?"




그리고 다음날, 정인은 회사에 출근했다.


동료들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정인아, 괜찮아? 얼굴이 안 좋은데..."


"응, 괜찮아. 좀 피곤해서."


거짓말이었다. 이틀 동안 잠을 자지 못했다. 머릿속은 온통 지혁의 정체로 가득했다.

회의가 있었다. 정인은 회의실에 들어갔다. 지혁은 협력업체로써 구석에 앉아 있었다.


평소와 같은 모습. 조용하고, 눈에 띄지 않고, 하지만 모든 것을 지켜보는 눈빛.


정인은 그 눈빛을 피했다. 두려웠다. 무서웠다. 하지만 동시에... 궁금했다.


'정말 당신은... 안중근인가요?'


회의가 끝나고, 정인은 재빨리 자리를 떴다. 지혁을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그를 향한 자신의 두려움과 동시에 그를 향한 호기심까지 자신의 생각과 감정들이 들킬까봐...


하지만 복도에서 마주쳤다.


"최정인 씨."


지혁이 불렀다. 정인은 멈췄다.


"어제 연락이 안 되셔서 걱정했습니다. 괜찮으세요?"


"...네."


정인은 고개를 숙였다. 지혁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혹시 무슨 일 있으세요?"


"아니에요."


"하지만..."


"괜찮다고요!"


정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복도에 있던 사람들이 돌아봤다.


"...죄송합니다. 저 먼저 가볼게요."


정인은 도망치듯 사라졌다. 지혁은 그 뒷모습을 바라봤다.


뭔가 잘못되었다. 정인의 눈빛이 달랐다.

지혁은 정인의 두려움, 혼란, 의심을 보았다.


'들켰나.'


지혁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날 저녁, 지혁은 창희를 불렀다.


"최정인 디자이너에게 무슨 일이 있었어?"


"확인해보겠습니다."


창희는 30분 뒤 돌아왔다. 얼굴이 어두웠다.


"회장님... 오범준이 이메일을 보냈습니다."


"뭐라고?"


"사진과 자료들입니다. 특히 회장님의 과거 사진들. 1963년부터 지금까지."


창희가 태블릿을 건네다. 오범준이 보낸 이메일의 사본이었다.

지혁은 사진들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표정이 굳었다.


"다 찍혔구나."


"네. 그리고 마지막에... 회장님이 인간이 아니라는 메시지도..."


지혁은 태블릿을 내려놓았다.


"정인 씨가 알았구나. 내 정체를."


"회장님, 이제..."


"알아. 이제 선택해야지."


지혁은 창가로 갔다. 빛나지만 고독해 보이는 밤의 서울이 펼쳐져 있었다.


"떠나거나, 맞서거나."


"회장님..."


"창희야, 나는 이제 떠나고 싶지 않아."


지혁의 목소리는 떨렸다.


"지난 시간 동안 도망치기만 했어. 희열을, 동지들을, 사랑했던 사람들을..."

"하지만 이번에는..."

"이번에는 남고 싶어. 떠나지 않고 싶지가 않아."


창희는 한참을 지혁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그럼 오범준을 먼저 처리해야 합니다."


"어떻게?"


"직접 만나 보시는 건 어떨까요? 그가 원하는 게 회장님이라면, 회장님이 먼저 나서는 겁니다."


지혁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깨어 난듯 창희를 바라보며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범준에게 연락해. 내가 만나겠다고."




며칠 뒤, 정인은 어머니 병원에 함께 갔다.

효숙은 의사와 상담을 받았다. 수술 일정, 항암 치료 계획, 예상 비용.


"총 5천만 원 정도 예상됩니다."


의사의 말에 정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보험이..."


"실비 보험으로 일부는 커버되지만, 본인 부담금이 3천만 원 정도 될 겁니다."


3천만 원. 정인의 통장 잔고는 500만 원이었다.

병원을 나오며, 효숙이 정인의 손을 잡았다.


"정인아, 엄마는 괜찮아. 어떻게든 되겠지."


"엄마..."


"너무 걱정 마. 엄마가 강하잖아."


하지만 효숙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정인의 휴대폰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여보세요?"


"최정인 씨?"


낯선 남자의 목소리였다.


"누구세요?"


"오범준입니다. 얼마전 메일을 드렸던... 저 이상한 사람 아닙니다. 재생의학을 연구하는 연구자입니다."


정인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이메일을 보낸 그 사람.


"당신이..."


"네, 사진을 보낸 사람이 맞습니다. 만나서 얘기할 수 있을까요?"


"왜 저한테..."


"안지혁에 대해 알려드리고 싶어서요. 그가 누구인지, 무엇인지."


정인은 망설였다.


"그리고..."


오범준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어머님의 치료비에 대해서도 도움을 드릴 수 있습니다."


"...네?"


"3천만 원. 제가 지원해드릴 수 있습니다. 대신..."


"대신?"


"저를 도와주세요. 안지혁을 만나게 해주세요."


정인의 손이 떨렸다.


"왜 제가..."


"안지혁은 당신을 신경 쓰니까요. 당신을 통하면 그를 만날 수 있어요."


"저는..."


"생각해보세요. 어머님의 생명이 달린 문제입니다."


전화가 끊겼다. 정인은 한참을 휴대폰을 들여다봤다.

어머니의 생명. 3천만 원. 안지혁.




토요일 저녁, 정인은 오범준이 정한 카페에 있었다.

한강변의 조용한 카페. 사람이 많지 않았다.

오범준이 들어왔다. 4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남자. 단정한 정장에 지적인 인상.


"최정인 씨, 만나서 반갑습니다."


오범준이 손을 내밀었다. 정인은 그 손을 잡지 않았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왜 저를 감시했죠?"


"앉아서 얘기하죠."


둘은 마주 앉았다. 오범준이 서류 봉투를 꺼냈다.


"여기 안지혁에 대한 자료들입니다. 그가 누구인지 알고 싶으시죠?"


"...말해보세요."


"안지혁은 안중근입니다. 1910년에 죽었어야 할 사람. 하지만 살아남았죠."


오범준은 차분하게 설명했다. 1910년 실험. 불사의 몸. 100년이 넘는 시간, 정확히 116년의 삶.


"그는 괴물입니다. 인간이 아니에요."


"괴물..."


"네. 죽지 않는 몸. 늙지 않는 얼굴. 그건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겁니다."


정인은 범준이 보여준 서류를 넘겼다. 사진, 문서, 의료 기록으로 추정되는 것들.


"왜 이런 걸 저한테 보여주는 거죠?"


"당신이 알 권리가 있으니까요. 당신은 그의 미끼로 이용되고 있어요."


"미끼?"


"네. 안지혁은 사람들과 가까워지지 않습니다. 드러나지 않죠. 하지만 당신한테는 다릅니다."


오범준이 또 다른 사진을 꺼냈다. 어제 휴게소에서 찍은 사진. 정인과 지혁이 벤치에 앉아 있는 모습.


"그는 당신을 이용하고 있어요. 자신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그건..."


"생각해보세요. 100년을 넘게 산 사람이 왜 갑자기 당신에게 관심을 보일까요? 당신이 특별해서? 아니에요. 당신이 약해 보여서입니다."


정인의 얼굴이 굳었다.


"트라우마가 있는 사람. 의지할 곳이 필요한 사람. 안지혁은 그런 사람을 찾아요. 자신이 영웅이 된 것처럼 느끼기 위해."


"...그만하세요."


"하지만 결국 그는 떠날 겁니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당신도 버려질 거예요."


정인의 눈 빛이 흔들렸다.


"제가... 뭘 해야 하는데요?"


"간단합니다. 안지혁을 만나게 해주세요. 제가 그를 연구하고 싶어요."


"연구?"


"네. 그의 불사의 비밀을 밝히면, 수많은 생명을 구할 수 있어요. 암 환자들, 불치병 환자들. 어머님 같은 분들을요."


오범준이 봉투를 건냈다. 3천만 원.


"어머님의 치료비입니다. 안지혁을 만나게 해주시면 드리겠습니다."


정인은 봉투를 바라봤다. 손이 떨렸다.


"생각할 시간을 드릴게요. 내일까지 연락 주세요."


오범준은 명함을 남기고 떠났다.


정인은 홀로 남아, 수표와 명함을 번갈아 봤다.

어머니의 생명. 3천만 원. 안지혁.

선택해야 했다.




다음날 아침, 지혁은 회장실에서 창희의 보고를 받고 있었다.


"오범준이 최정인 디자이너를 만났습니다."


"뭐라고?"


"어제 저녁, 한강변 카페에서. 어머니 치료비를 제시하며 회장님을 만나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지혁의 주먹이 쥐어졌다.


"... ..."


"회장님, 최정인 디자이너가 어떤 선택을 할까요?"


"모르겠어. 하지만..."


지혁은 창밖을 바라봤다.


"정인 씨를 탓할 수 없어. 어머니가 아프고, 돈이 필요하고, 오박사 발대로 나는 괴물이니까."


"회장님..."


"나였어도..."


지혁의 목소리는 조용했다.


"창희야, 오범준에게 연락해. 내가 직접 만나겠다고. 정인 씨를 끌어들일 필요 없다고."


"하지만 그건 너무 위험합니다."


"알아. 하지만 정인 씨가 선택하게 만들 순 없어. 그건 너무 잔인해."


창희는 한참을 지혁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연락하겠습니다."




일요일 저녁, 정인은 결정을 내렸다.

오범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제가 도와드릴게요."


"현명한 선택이십니다."


"대신 조건이 있어요."


"말씀하세요."


"안지혁 씨를 다치게 하지 마세요. 그냥... 약속만 하세요."


오범준은 잠시 침묵하다가 대답했다.


"약속드립니다. 대화만 할게요."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정인은 믿고 싶었다.


"내일 연락드리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정인은 한참을 울었다.


'미안해요, 안지혁 씨.'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어머니의 생명이 달렸다.


정인은 지혁에게 문자를 보냈다.

[내일 만날 수 있을까요? 할 말이 있어요.]


5분 뒤, 답장이 왔다.

[물론입니다. 시간과 장소 알려주세요.]


정인은 떨리는 손으로 답장을 보냈다.

[내일 저녁 7시, 한강공원 여의도 입구.]


[알겠습니다. 조심히 오세요.]


정인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얼굴을 감쌌다.


배신. 그것이 정인이 내린 선택이었다.

하지만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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