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회. 동행

by Director Keige

버스가 도착했다.


정인은 계단을 올라 뒷자리에 앉았다. 창가 쪽. 지혁은 몇 칸 떨어진 자리에 앉았다. 너무 가까우면 부담스러울 것 같았다.


버스가 서울을 벗어나 고속도로로 접어들었다.


정인은 창밖을 바라봤다. 지나가는 풍경. 차들. 트럭들. 숨이 조금씩 빨라졌다.


'괜찮아. 버스야. 차가 아니야.'


스스로에게 말했지만, 심장은 빠르게 뛰었다.


30분 경과

버스가 갑자기 속도를 줄였다.


정인의 몸이 앞으로 쏠렸다. 안전벨트가 가슴을 눌렀다. 순간, 10년 전 기억이 떠올랐다.


급정거. 유리창. 비명. 어둠.


"괜찮으세요?"


옆자리로 이동한 지혁이 물었다. 정인은 창밖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하지만 손이 떨리고 있었다. 가방 끈을 꽉 쥔 손.


"사고가 난 것 같네요. 앞에."


지혁이 창밖을 가리켰다. 멀리 차량 두 대가 접촉 사고를 냈다. 경미한 사고였지만, 차들이 막히기 시작했다.


정인의 숨이 더 빨라졌다.


"최정인 씨."


지혁이 조용히 불렀다.


"저 좀 봐주시겠어요?"


정인은 억지로 지혁을 봤다. 지혁은 손을 내밀었다. 약지 없는 손.


"손 좀 잡아도 될까요? 제가 차 타면... 좀 불안해서요."


거짓말이었다. 지혁은 차가 무섭지 않았다. 하지만 정인이 무너지지 않게 하려면, 그녀에게 다른 생각을 하게 만들어야 했다.


정인은 망설이다가, 지혁의 손을 잡았다.


따뜻했다. 그리고 안정적이었다. 약지가 없는 손이었지만, 그 손은 떨리지 않았다.


"고맙습니다."


지혁이 작게 말했다. 정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손을 놓지 않았다.


버스는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고 현장을 지나쳤다. 정인은 눈을 감았다. 지혁의 손을 잡은 채.


천안 공장 도착

버스에서 내렸을 때, 정인의 얼굴은 창백했다.


"괜찮으세요?"


지혁이 물었다. 정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제 괜찮아요. 그리고... 아까는 감사했습니다."


"별말씀을요."


둘은 공장 입구로 걸어갔다. 지혁은 적당한 거리를 유지했다. 너무 가까우면 의심받을 것 같았다.


"최 디자이너님!"


공장장이 반갑게 인사했다.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지하철 고장이라니... 고생하셨겠어요."


"괜찮습니다."


정인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지혁은 알 수 있었다. 그 미소 뒤에 숨겨진 피로를.


"근데 저분은?"


공장장이 지혁을 봤다.


"아, 저는 본사에서 함께 나온..."


"품질 검수 담당입니다."


지혁이 거짓말을 했다. 공장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러시군요. 어서 오세요."


공장 투어가 시작되었다.


봉제 라인, 재단 공정, 마무리 작업. 정인은 꼼꼼하게 체크하며 질문했다.


"이 원단 불량률은 어떻게 되나요?"


"1% 미만입니다."


"실밥 처리는?"


"수작업으로 마무리합니다."


정인은 샘플을 직접 확인했다. 실밥을 살피고, 박음질을 검사하고, 원단의 질감을 확인했다.


지혁은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봤다. 정인의 손놀림. 세심한 눈빛. 프로페셜한 태도.


'저 손이 버스 안에서는 떨렸는데.'


지혁은 생각했다. 정인은 약한 사람이 아니었다. 강한 사람이었다. 다만 트라우마가 그녀를 제한하고 있을 뿐.


"이 박음질 간격이 불균등한데요."


정인이 불량품을 지적했다.


"아, 신입 작업자가 한 거라서..."


"다시 해주세요. 이건 수출용입니다. 완벽해야 해요."


정인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공장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지시했다.


지혁은 미소를 지었다. 60년 전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한 땀 한 땀 확인하고, 불량을 용납하지 않고, 완벽을 추구하던 자신.


오후 2시, 점심시간

공장 구내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정인과 지혁은 마주 앉았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저기..."


정인이 먼저 말을 꺼냈다.


"아까 버스에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별거 아니었어요."


"아니에요. 제가... 차를 못 타서요. 10년 전에 교통사고가 있었거든요."


정인은 처음으로 자신의 트라우마를 타인에게 털어놓았다.


"아버지가... 그때 돌아가셨어요. 저는 살았고."


지혁은 정인을 바라봤다. 정인의 눈에는 오래된 슬픔이 가득했다.


"그 이후로 차만 타면... 그날이 떠올라요. 급정거 소리만 들어도 심장이 멎는 것 같고."


"...힘드셨겠어요."


"그래도 버텨야죠. 어머니도 계시고, 제 일도 있고."


정인은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미소는 슬펐다.


"버티는 게... 익숙해요. 10년 동안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지혁의 가슴이 조였다.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나도 그랬다.'


버티며 살았다. 치유하지 않고, 회피하며. 떠나는 것으로 상처를 숨기며.


"최정인 씨."


"네?"


"버티는 것도 중요하지만... 치유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정인은 지혁을 바라봤다.


"치유... 어떻게요?"


"저도 잘 모릅니다. 저도... 배우는 중이니까요."


지혁은 솔직하게 말했다.


"다만 혼자 버티는 것보다, 누군가와 함께 버티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정인은 한참을 지혁을 바라보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습니다."


"별말씀을요."


둘은 다시 식사를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침묵이 어색하지 않았다.


오후 4시, 귀환 준비

공장 점검이 끝났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공장장이 인사했다.


"아, 그런데 서울 가시는 버스가... 지금 파업 중이래요."


"네?"


정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갑자기 운수노조 파업이 시작됐대요. 오늘 저녁까지 운행 중단이라고..."


"그럼 어떻게..."


정인의 목소리가 떨렸다. 버스가 없으면 기차를 타야 한다. 기차도 안 되면... 차를 타야 한다.


"제가 기사님 불러드릴까요?"


공장장이 제안했다.


"아뇨, 괜찮습니다."


정인은 거절했지만, 손이 떨렸다.


"저..."


지혁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제 차가 있는데... 같이 가시겠어요?"


정인은 지혁을 봤다. 지혁의 눈빛은 진지했다.


"차... 운전하실 수 있으세요?"


"네. 그리고 천천히 갈게요. 안전하게."


정인은 망설였다. 차를 타야 한다. 다른 방법이 없다.


"...부탁드려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오후 5시, 주차장

지혁의 차는 검은색 세단이었다. 단정하고 깔끔한 차.


정인은 차 앞에서 멈췄다. 손이 떨렸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천천히 하셔도 됩니다."


지혁이 말했다.


"급하지 않아요."


정인은 심호흡을 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손잡이를 잡았다. 문을 열었다. 차에 탔다.


조수석에 앉는 순간, 숨이 막혔다.


유리창. 안전벨트. 대시보드. 모든 것이 10년 전을 떠올리게 했다.


"괜찮으세요?"


지혁이 물었다. 정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하지만 숨이 빨랐다. 지혁은 시동을 걸지 않았다.


"조금 있다 출발할게요. 준비되면 말씀해주세요."


"지금... 출발하셔도 돼요."


"아니요. 천천히 하세요."


지혁은 정인을 재촉하지 않았다. 그저 기다렸다.


5분이 지났다. 정인의 숨이 조금씩 안정되었다.


"...출발해도 될 것 같아요."


"알겠습니다. 천천히 갈게요."


지혁은 조심스럽게 시동을 걸었다. 부드럽게 출발했다. 급가속도 없었고, 급제동도 없었다.


고속도로에 진입했다. 속도는 느렸다. 80km. 다른 차들이 추월해 갔지만, 지혁은 속도를 올리지 않았다.


"...괜찮아요. 좀 더 빨리 가도 돼요."


정인이 말했다.


"아니요. 이 정도가 좋습니다."


지혁은 계속 천천히 운전했다. 정인은 창밖을 바라봤다. 지나가는 풍경. 석양이 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졌다.


10년 만에 처음으로, 차 안에서 편안함을 느꼈다.


오후 6시, 휴게소

"잠시 쉬었다 갈게요."


지혁이 휴게소에 차를 세웠다. 정인은 밖으로 나와 심호흡을 했다.


'탔다. 차를 탔다.'


10년 만에 차를 탔다. 무너지지 않았다. 버텼다.


아니, 버티는 것 이상이었다. 조금이지만... 괜찮았다.


"괜찮으세요?"


지혁이 다가왔다.


"네. 괜찮아요. 정말... 괜찮아요."


정인은 웃었다.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천천히 운전해주셔서."


"당연한 걸요."


둘은 휴게소 벤치에 앉았다. 석양이 아름다웠다.


"저기..."


정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손은 어쩌다..."


"아, 이거요?"


지혁은 약지 없는 손을 들어 보였다.


"옛날에... 다쳤어요."


"많이 아프셨겠어요."


"그때는요. 하지만 이제는 익숙해요."


지혁은 미소를 지었다.


"사람은 적응하더라고요. 어떤 상처에도."


정인은 지혁의 손을 바라봤다. 약지가 없지만, 그 손은 강해 보였다.


"저도... 적응할 수 있을까요? 제 트라우마에."


"물론입니다. 이미 하고 계시잖아요."


"하지만 아직도 무서워요."


"무서워해도 괜찮습니다. 다만 혼자 무서워하지 않으면 돼요."


정인은 지혁을 바라봤다. 지혁의 눈빛은 따뜻했다.


"...같이 무서워해 주실 건가요?"


"그럴 수 있다면요."


정인은 처음으로 웃었다. 진심으로, 오래된 슬픔 뒤에 숨겨진 미소.


오후 7시, 서울 도착

"여기서 내려주세요."


정인이 말했다. 지혁은 정인의 집 근처에 차를 세웠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네. 정말... 오늘 고마웠어요."


정인은 차에서 내렸다. 하지만 문을 닫기 전에 멈췄다.


"저기... 혹시 성함이..."


"안지혁입니다."


"안지혁..."


정인은 그 이름을 되뇌었다. 익숙한 이름 같았다.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


"안녕히 가세요, 최정인 씨."


"네. 안녕히 가세요."


정인은 차에서 내려 집으로 걸어갔다. 몇 걸음 가다가 뒤돌아봤다. 지혁의 차는 아직 그 자리에 있었다. 정인이 안전하게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려는 듯.


정인은 손을 흔들었다. 지혁도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차는 천천히 사라졌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정인은 어머니에게 전화했다.


"엄마, 나야. 재검사 결과 어떻게 됐어?"


전화 너머로 효숙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인아..."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재발이래. 유방암이 재발했대."


정인의 손에서 휴대폰이 떨어질 뻔했다.


"...뭐?"


"괜찮아. 초기래. 치료하면 된대. 걱정 마."


하지만 효숙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정인은 주저앉았다. 눈물이 났다.


"엄마..."


"괜찮아, 정인아. 엄마 강하잖아. 이번에도 이겨낼 거야."


전화를 끊고, 정인은 한참을 울었다.


오늘 처음으로 차를 탔다. 오늘 처음으로 트라우마와 조금 화해했다.


하지만 인생은 또 다른 시련을 주었다.


같은 시각, 지혁은 회장실에 있었다.


창희가 보고를 했다.


"회장님, 오범준의 움직임을 포착했습니다."


"어디에?"


"오늘 천안 공장 근처에서 목격됐습니다. 회장님과 최정인 디자이너를 촬영한 것 같습니다."


지혁의 표정이 굳었다.


"사진을..."


"네. 둘이 함께 있는 모습을 찍은 것 같습니다."


"미끼를 물었구나."


지혁은 중얼거렸다. 오범준의 계획. 정인을 이용해 지혁을 노출시키는 것.


"회장님,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창희가 물었다.


"최정인 디자이너와 거리를 두셔야..."


"아니."


지혁은 단호하게 말했다.


"이번에는 떠나지 않을 거야."


"하지만..."


"오범준이 노리는 건 나야. 정인 씨는 그저 미끼일 뿐이고."


지혁은 창밖을 바라봤다.


"그렇다면 내가 먼저 나서야지. 오범준을 직접 만나야 해."


"너무 위험합니다."


"알아. 하지만 이번에는 다른 방법이 없어."


지혁의 눈빛이 결연했다.


오랜시간 동안 도망쳤다. 숨었다. 떠났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이번에는 맞서 싸울 것이다.


그날 밤, 오범준은 사무실에서 사진을 정리하고 있었다.


안지혁과 최정인이 함께 있는 사진들. 버스 정류장, 공장, 휴게소, 차 안.


"완벽해."


오범준은 미소를 지었다.


이제 마지막 단계만 남았다. 최정인을 위협하고, 안지혁을 끌어낸다.


그리고 포획한다.


오범준은 노트북을 열고 이메일을 작성했다.

수신인: 최정인

제목: 당신이 알아야 할 진실

첨부파일: 사진 10장


"보내기."


클릭했다.


이메일이 발송되었다.


게임의 마지막 막이 올랐다.

이전 08화8회. 현실의 배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