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회. 현실의 배신

by Director Keige

일주일이 흘렀다.


지혁은 매일 아침 출근하는 정인을 창가에서 지켜봤다. 대중교통 카드지갑을 손에 쥐고, 지하철역으로 향하는 뒷모습. 버티는 걸음걸이.


수요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천안 공장 출장일.

지혁은 불안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 오범준의 움직임이 며칠째 포착되지 않고 있었다.


"회장님, 괜찮으십니까?"


창희가 물었다. 지혁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표정은 어두웠다.


"수요일... 조심해야 할 것 같아."


"최정인 디자이너 출장 말씀이십니까?"


"그래. 뭔가 일어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창희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회사 차량을 강제로 배정할까요?"


"아니. 그러면 더 의심받아."


"그럼..."


"내가 지켜볼게."


창희의 얼굴이 굳었다. "회장님, 그건 너무 위험합니다."


"알아. 하지만 이번엔 떠나지 않을 거야."


1980년 초, 서울

"승민 씨, 이 서류 좀 보세요."


동희가 신문 스크랩을 건넸다. 독립유공자 후손들의 생활고에 대한 기사였다.


중근은—그때는 여전히 안승민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었다—기사를 천천히 읽었다. 손이 떨렸다.


"독립유공자 후손, 생계 위협... 국가 지원 미비"


기사에는 가난 속에 사는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월세를 못 내 쫓겨나는 가족. 학비를 내지 못해 학교를 그만두는 아이들. 병원비가 없어 치료를 포기하는 노인들.


"이게... 현실입니까?"


중근의 목소리가 떨렸다.


"네. 안타깝지만... 현실입니다."


중근은 신문을 내려놓았다. 가슴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1945년, 해방을 맞았을 때 중근은 생각했다. '이제 끝났다. 이제 모두가 잘 살 수 있다.'


하지만 35년이 지난 지금, 독립을 위해 싸웠던 사람들의 후손이 가난 속에 살고 있었다.


"동희 씨."


"네?"


"우리... 뭔가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동희는 중근을 바라봤다. 중근의 눈에는 결연함이 가득했다.


"어떤 걸 말씀하시는 겁니까?"


"지원. 독립유공자와 후손들을 위한 지원."


"하지만 그건..."


"회사 이익의 일부를 써도 됩니다. 아니, 제 개인 돈을 써도 됩니다."


중근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나는 한때... 독립만 되면 모든 게 해결될 거라 믿었습니다. 하지만 틀렸어요. 국가는 되찾아도, 삶은 되찾아주지 않더군요."


동희는 한참을 중근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시작해봅시다."


1980년대, CSR의 시작

대한실업은 업계 최초로 독립유공자 후손 지원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장학금, 의료비 지원, 생활비 보조. 당시로서는 생소한 개념이었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말조차 희박한 시절이었다.


"승민 씨, 주주들이 반발하고 있습니다."


동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왜 회사 돈을 자선사업에 쓰냐고 합니다."


"제 개인 돈으로 하겠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지 않습니까?"


중근은 창밖을 바라봤다.


"동희 씨, 나는 이 일만큼은... 전면에 서고 싶습니다."


"...네?"


동희가 놀라 중근을 봤다.


"지금까지는 숨어 지냈습니다.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죠. 하지만 이 일만큼은 제대로 하고 싶어요."


"승민 씨..."


"이건 나의 빚입니다. 함께 싸웠던 사람들에게 갚아야 할 빚."


중근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순태도, 희열이도, 수많은 동지들도... 다들 독립을 위해 목숨을 걸었습니다. 하지만 독립 이후 그들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어요."


동희는 중근의 어깨를 잡았다.


"알겠습니다. 제가 구조를 만들어보겠습니다. 승민 씨가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이 일을 제대로 할 수 있는 방법을요."


그렇게 대한실업의 사회공헌 활동이 시작되었다.


표면적으로는 박동희 대표의 사업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중근의 속죄였다.


매년 장학금을 주고, 의료비를 지원하고, 일자리를 제공했다. 중근은 수혜자 명단을 직접 확인했다. 한 명 한 명의 이름을 읽으며, 그들의 조상이 어떻게 싸웠는지 떠올렸다.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다.'


중근은 생각했다. 함께 싸우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 살아남은 것에 대한 죄책감. 그 모든 것을 이 일로 갚으려 했다.


2026년 11월, 월요일

"정인아, 얼굴이 왜 그래?"


동료가 물었다. 정인은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아니야, 괜찮아."


거짓말이었다. 어젯밤 어머니와 통화했다. 효숙은 재검사를 받으라는 병원 연락을 받았다고 했다.


"뭐, 정기검진이니까 걱정 마. 괜찮을 거야."


어머니는 밝게 말했지만, 정인은 느낄 수 있었다. 목소리에 묻은 떨림을.


10년 전 완치 판정. 하지만 유방암은 재발률이 높다. 정인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괜찮을 거야.'


스스로에게 말했지만,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


게다가 이번 달 카드값이 밀렸다. 어머니 건강검진비, 월세, 생활비. 정인의 월급으로는 빠듯했다.


"정인아, 수요일 출장 준비 다 됐어?"


팀장이 물었다.


"네, 괜찮습니다."


"대중교통으로 가면 시간이 오래 걸릴 텐데... 차량 신청 안 할래?"


"아뇨, 괜찮아요."


정인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차는 탈 수 없었다. 10년 전 그날 이후로.


화요일 저녁

정인은 야근을 하고 있었다.


내일 출장 준비로 정신이 없었다. 프레젠테이션 자료, 샘플 체크리스트, 생산라인 점검표. 하나하나 확인하며 밤이 깊어갔다.


"아직도 안 갔어요?"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정인은 돌아섰다. 그 남자였다. 회의 때 봤던, 약지 없는 손을 가진 남자.


"...네. 내일 출장이라서요."


남자는 정인의 책상을 봤다. 넘쳐나는 서류들. 빈 커피잔. 피곤한 얼굴.


"무리하지 마세요."


"괜찮습니다."


"내일 일정... 혹시 변경할 수 있나요?"


정인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공장 일정이 이미 잡혔어요. 미룰 수 없습니다."


남자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그럼... 조심하세요."


"무슨 뜻이죠?"


"그냥... 조심히 다녀오세요."


남자는 더 말하지 않고 돌아섰다. 정인은 그 뒷모습을 바라봤다.


'이상한 사람이네.'


하지만 왠지 모를 안정감이 들었다. 누군가 자신을 걱정하고 있다는 느낌.


수요일 새벽 5시

지혁은 잠을 자지 못했다.


불안이 점점 커졌다. 오범준의 움직임이 포착되지 않는 것이 더 불안했다. 조용할수록 위험하다는 것을 지혁은 알고 있었다.


휴대폰을 확인했다. 정인의 출장 일정. 오전 9시, 서울역에서 천안행 기차.


지혁은 결심했다. 따라가기로.

멀리서, 보이지 않게, 하지만 가까이에서.


"회장님."


창희가 전화를 걸었다.


"지금 뉴스 보고 계십니까?"


"무슨 일이야?"


"지하철 1호선 고장입니다. 서울역 구간 전면 운행 중단이래요."


지혁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언제부터?"


"방금 발표했습니다. 오전 내내 복구 불가능하다고..."


지혁은 전화를 끊고 재빨리 옷을 챙겼다.


'시작됐다.'


오범준의 계획이 시작된 것이다.


수요일 오전 7시

정인은 지하철역 앞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1호선 서울역 구간 운행 중단 - 복구 시간 미정]


전광판에 떠 있는 문구. 정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어떡하지..."


9시까지 서울역에 도착해야 했다. 하지만 1호선이 끊겼다. 버스로 우회하면... 두 시간은 걸릴 것이다.


"택시 타야 하나..."


정인은 중얼거렸다. 하지만 손이 떨렸다. 택시. 차. 운전석. 급정거.


'안 돼.'


정인은 고개를 저었다. 버스로 가자. 늦어도 버스로.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공장장이었다.


"최 디자이너님, 혹시 출발하셨어요?"


"아직입니다. 지하철이 고장 나서..."


"아, 그거 뉴스 봤어요. 그럼 차 타고 오시는 게 어떨까요? 늦으면 오늘 일정 다 틀어질 것 같은데..."


"저는... 차를..."


"괜찮으시면 제가 기사님 보내드릴까요? 회사 차량으로."


정인의 손이 더 떨렸다.


"아뇨, 괜찮습니다. 제가 알아서..."


전화를 끊었다. 정인은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차를 타야 한다. 다른 방법이 없다.

하지만 탈 수 없다. 10년 전 그날 이후로.


정인은 눈을 감았다.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트럭이 돌진하던 순간. 유리 깨지는 소리. 어둠.


"안 돼..."


정인은 고개를 저으며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갔다. 손이 떨렸지만,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버티는 것. 그것이 정인이 가장 잘하는 일이었다.


수요일 오전 8시

지혁은 차를 몰고 있었다.

정인을 찾아야 했다. 어디로 갔을까. 지하철이 끊겼으니... 버스? 택시?


휴대폰이 울렸다. 창희였다.


"회장님, 최정인 디자이너 위치 파악했습니다."


"어디야?"


"지금 시청 앞 버스 정류장에 있습니다. 천안행 광역버스 기다리는 것 같습니다."


"알았어."


지혁은 방향을 틀었다. 시청으로.


차 안에서 지혁은 생각했다.


'이번에는 떠나지 않는다.'


오랜시간 동안 떠나는 것으로 사람을 지켰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이번에는 곁에 있을 것이다. 보이지 않게, 하지만 가까이에서.

바느질을 배웠듯이, 새로운 방법을 배울 것이다.


수요일 오전 8시 30분

정인은 버스를 기다리며 서 있었다.

손이 떨렸다. 휴대폰을 확인했다. 어머니에게서 문자가 와 있었다.


[정인아, 재검사 결과 나왔어. 저녁에 통화하자.]


정인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재검사 결과...'


좋은 소식일까, 나쁜 소식일까.

손이 더 떨렸다. 정인은 가방을 꽉 쥐었다. 버티라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그때였다.


"최정인 씨?"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정인은 돌아섰다.

그 남자였다. 약지 없는 손을 가진 남자.


"...여기 왜...?"


"저도 천안 쪽 일이 있어서요."


남자는 거짓말을 했다. 하지만 정인은 거짓말인 줄 알면서도, 이상하게 안심이 되었다.


"혹시... 같이 가도 될까요?"


남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인은 망설였다. 하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두 사람은 버스를 기다렸다. 나란히, 하지만 조금 떨어져서.

멀리서, 건물 옥상에서 오범준이 망원경으로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드디어 나타났구나, 안지혁."


오범준은 미소를 지었다.

이제 진짜 게임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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