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회. 봉제의 시대

by Director Keige

"떠나야 하나..."


지혁은 중얼거렸다. 하지만 발은 움직이지 않았다.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지혁은 늘 떠났다. 떠나는 것이 보호하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다른 선택을 하고 싶었다.


창밖을 바라보다 문득, 1층 봉제 샘플룸이 눈에 들어왔다. 작업자들이 재봉틀 앞에 앉아 원단을 처리하고 있었다. 바늘이 들어가고, 실이 이어지고, 한 땀 한 땀 옷이 완성되었다.


지혁의 손이 무의식적으로 움직였다. 바늘을 잡는 자세. 실을 당기는 각도. 60년 전 배운 동작이 여전히 몸에 남아 있었다.


바느질.

총보다 조용했지만, 조용한 만큼 오래 남는 일.


1950년대 중반, 부산

전쟁이 끝난 뒤, 중근은—그때는 안승민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었다—부산의 작은 봉제 공장 앞을 지나쳤다.


순태를 잃고, 희열을 떠나보낸 뒤, 중근은 한동안 방황했다. 독립은 이뤘지만, 독립 이후의 삶은 더 혼란스러웠다. 전쟁이 또 터졌고, 사람들은 또 죽었다.


항만에서 짐을 나르고, 벽돌을 쌓고, 시장에서 물건을 팔았다. 죽지 않는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많았지만, 살아야 할 이유는 찾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봉제 공장에서 들려오는 재봉틀 소리가 중근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리드미컬하고 규칙적인 소리.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소리.


"일 구하러 오셨어요?"


공장장이 물었다.


"...배울 수 있을까요?"


"바느질을요? 나이가 어떻게 되시는데..."


"늦었지만... 배우고 싶습니다."


일손이 부족했던 공장장은 중근을 받아들였다. "한번 해보세요."


중근은 처음부터 다시 배웠다.


바늘을 잡는 법. 실을 꿰는 법. 원단을 재단하는 법. 손은 서툴렀고, 바늘에 찔려 피가 났다. 하지만 중근은 멈추지 않았다.


밤새 연습하고, 다음 날 또 연습했다. 손가락은 바늘 자국투성이였지만, 자고 일어나면 상처는 사라졌다. 죽지 않는 몸의 유일한 장점이었다.


"승민 씨, 손 안 아파요?"


동료가 물었다. 중근의 손가락은 상처투성이였다.


"괜찮아요."


거짓말이었다. 아팠다. 하지만 회복도 빨랐다.


6개월이 지나자, 중근은 공장에서 가장 빠른 작업자가 되어 있었다.


바느질을 배우며, 중근은 깨달았다.


총은 파괴하지만, 바늘은 만든다. 총은 흔적을 남기지만, 바늘은 흔적을 숨긴다. 실밥을 보이지 않게 감추는 법. 원단 속으로 깊이 숨기는 법.


그것은 바느질만의 기술이 아니었다. 중근이 40년 동안 배운 생존의 기술이기도 했다.


1960년대 초반, 서울

중근은 서울로 돌아왔다.


부산에서 배운 기술로 서울의 작은 봉제 공장에 취직했다. 전쟁의 상처는 아직 남아 있었지만, 거리는 조금씩 회복되고 있었다.


"승민 씨, 이 실밥 좀 보세요."


사장이 불량품을 들고 왔다. 실밥이 튀어나와 있었다.


"다시 하겠습니다."


중근은 작업물을 받아 들고 다시 바느질했다. 이번에는 실밥이 보이지 않게, 원단 속으로 깊이 숨겼다.


"오, 이렇게 하는 거구나."


사장이 감탄했다.


실밥을 숨기는 법. 흔적을 남기지 않는 법. 보이지 않게 만드는 법.

중근은 자신의 정체를 숨기듯, 실밥을 숨겼다. 한 땀 한 땀. 정성스럽게.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게.

그리고 그 기술은 박동희를 만나 대한실업을 세울 때, 회사의 핵심 경쟁력이 되었다.


품질. 정밀함. 보이지 않는 완성도.

중근이 50년 동안 자신을 숨기며 배운 모든 것이, 옷을 만드는 기술이 되었다.


2026년 11월, 현재

지혁은 과거에서 깨어났다.


회장실 창가에 서 있었다. 언제부터 과거에 빠져 있었는지 모른다. 1층 봉제 샘플룸의 재봉틀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60년 전과 같은 소리.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창희였다.


[회장님, 신규 라인 회의 10분 후 시작합니다.]


지혁은 답장 없이 회의실로 향했다.


회의실에는 디자인팀과 생산팀이 모여 있었다. 정인도 그중 하나였다. 그녀는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하고 있었다.


지혁은 구석 자리에 조용히 앉았다. 창희가 잠깐 그를 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시작하겠습니다."


정인이 발표를 시작했다. 신규 라인 디자인, 원단 선정, 생산 일정. 그녀의 목소리는 또렷했지만, 얼굴에는 피곤함이 역력했다.


지혁은 그녀의 손을 봤다. 연필을 쥔 손. 자료를 넘기는 손. 떨리지 않으려 애쓰는 손.

강한 척하는 손.


"다음 주 수요일, 천안 공장 출장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생산팀장이 말했다.


"디자인팀에서 누가 동행하시나요?"


"제가 가겠습니다."


정인이 손을 들었다.


"천안이면 차로 한 시간 반 정도인데... 괜찮으시겠어요?"


"대중교통 이용하면 됩니다."


"버스 타고 전철 갈아타면 세 시간 넘게 걸리는데요?"


"괜찮습니다. 익숙해요."


정인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하지만 지혁은 알았다. 그 단호함 뒤에 숨겨진 떨림을.


10년 전 교통사고. 아버지의 죽음. 그 이후 차를 탈 수 없게 된 정인. 희열처럼. 순태처럼. 또 누군가 혼자 버티고 있었다.


회의가 끝나고, 사람들이 하나둘 나갔다. 정인도 자료를 정리하며 일어섰다.


"최정인 디자이너."


지혁이 불렀다. 정인은 놀라 돌아섰다. 회의 내내 구석에 조용히 앉아 있던 남자.


"...네?"


"천안 출장 말인데요."


지혁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회사 차량 지원을 신청하세요. 세 시간씩 대중교통 이용하는 건 비효율적입니다."


정인의 얼굴이 굳었다.


"괜찮습니다. 저는 원래 대중교통을..."


"익숙한 게 아니라 견디는 겁니다."


지혁의 말에 정인의 눈빛이 흔들렸다.


"누구세요? 왜 제 일에..."


"그냥...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해서요."


지혁은 더 말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인의 시선을 피해 회의실을 나갔다.


복도를 걷는 동안,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너무 가까워졌다.'


위험했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회의실에 홀로 남은 정인은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견디는 것.'


정확한 표현이었다. 정인은 치유한 게 아니라 견디고 있었다. 10년 동안.


"누구지..."


정인은 중얼거렸다. 그 남자는 분명 외주 업체 직원이 아니었다. 회의 내내 박 대표가 그에게 보고하듯 시선을 보냈다. 사람들도 그를 의식했다.


그리고 그 손. 약지가 없는 손.

30년 전 사진 속 사람과 같은 손.


정인은 가방을 들고 회의실을 나섰다.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 남자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언제나 사라진다.'


정인은 생각했다.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사람. 흔적을 남기지 않는 사람.

마치 실밥처럼.


그날 저녁, 지혁은 1층 봉제 라인을 점검하고 있었다.


작업자들이 퇴근한 뒤, 홀로 남아 재봉틀 앞에 앉았다. 오래된 습관이었다. 불량품을 수선하고, 샘플을 점검하고, 원단의 질감을 확인했다.


손이 움직였다. 바늘이 들어가고, 실이 이어졌다. 60년 전과 똑같은 동작.


"회장님."


뒤에서 창희의 목소리가 들렸다.


"또 야근하시네요."


"습관이야."


"회의 때 최정인 디자이너한테 말씀하신 거... 괜찮으실까요?"


"뭐가?"


"너무 가까워지신 것 같아서요."


지혁은 손을 멈추지 않았다. 바늘이 계속 원단을 뚫었다.


"나도 알아."


"그런데 왜..."


"창희야."


지혁이 창희를 돌아봤다.


"나는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떠나는 것으로 사람을 지켰어. 희열을, 동지들을, 사랑했던 사람들을."


"..."


"하지만 이번에는 다른 방법을 시도하고 싶어."


"무슨 뜻입니까?"


"떠나지 않고 지키는 방법."


창희는 한참을 지혁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위험합니다."


"알아."


"오범준이 노리고 있습니다. 회장님 주변 사람들을."


"그것도 알아."


"그런데도..."


"그래도."


지혁은 바느질을 끝냈다. 실밥이 보이지 않았다. 완벽하게 숨겨졌다.


"바느질을 배웠듯이, 나도 새로운 방법을 배울 수 있지 않을까."


창희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저 걱정스러운 얼굴로 지혁을 바라볼 뿐이었다.


같은 시각, 건물 밖에서 오범준은 차 안에 앉아 있었다.


노트북 화면에는 정인의 일정이 떠 있었다. 다음 주 수요일. 천안 공장 출장.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오범준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달력에 표시했다.


계획은 간단했다.


출장 당일 아침, 대중교통 파업을 일으킨다. 정인은 선택의 여지 없이 차를 타야 한다. 공황 상태에 빠진다. 그리고 안지혁이 나타난다.


영웅은 언제나 구하러 온다.


"일주일 뒤면 끝이야."


오범준은 전화를 걸었다.


"예, 수요일 새벽에 지하철 고장을 일으키세요. 버스 노선도 우회하게 만들고요. 자연스럽게."


전화를 끊고, 오범준은 대한실업 건물을 바라봤다. 9층 회장실에 불이 켜져 있었다.


"곧 만나게 될 거야, 안지혁."


오범준의 눈빛이 빛났다.


그날 밤, 지혁은 회장실로 돌아왔다.


창밖으로 서울의 야경이 펼쳐졌다. 반짝이는 불빛들. 살아 있는 도시.


지혁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약지 없는 손. 이 손으로 총을 쏘고, 바늘을 들고, 사람을 지켰다.


그리고 지금, 이 손으로 또 누군가를 지키고 싶었다.


휴대폰에 알림이 떴다. 일주일 뒤, 수요일. 정인의 출장일정이 공유 캘린더에 표시되어 있었다.


지혁은 그 날짜를 한참 바라봤다.


무언가 일어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떠나지 않을 것이다.


이번에는 다른 선택을 할 것이다.


바느질을 배웠듯이, 새로운 방법을 배울 것이다.


떠나지 않고 지키는 방법을.


지혁은 창밖을 바라보며, 주먹을 쥐었다.


약지 없는 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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