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회. 고문사, 단절

by Director Keige

과거는 악몽처럼 찾아온다.


지혁은 회장실 소파에 앉아 있었지만, 의식은 1913년 여름에 머물러 있었다. 순태가 죽던 날. 희열을 두고 떠나던 날.


그날의 선택이 옳았을까.


113년이 지난 지금도, 지혁은 답을 모른다.


1913년 여름, 서울


순태의 장례는 조용했다.


독립운동가의 장례는 언제나 그랬다. 몰래, 빠르게, 흔적 없이. 참석자는 몇 명 되지 않았다. 일본 경찰의 감시 때문이었다.


중근은—이제 안도현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었지만—장례식장 멀리서 지켜봤다. 참석할 수 없었다. 얼굴을 드러내면, 다른 동지들까지 위험해진다.


작은 관이 땅에 묻혔다. 희열은 관 옆에 서서 묵념했다. 여덟 살 아이의 어깨는 너무 작았다. 아버지를 잃은 아이. 이제 혼자가 된 아이.


'데려가야 한다.'


중근은 생각했다. 하지만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장례가 끝나고, 사람들이 흩어졌다. 희열은 마지막까지 남아 아버지의 무덤 앞에 서 있었다. 중근은 어둠 속에서 그 모습을 바라봤다.


다가가고 싶었다. 손을 잡고 싶었다. 괜찮다고, 아저씨가 지켜줄게, 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때였다.


기척.


중근은 본능적으로 몸을 숨겼다. 20미터쯤 떨어진 곳에 일본 헌병 둘이 서 있었다. 그들은 장례식장을 감시하고 있었다.


"저 아이가 윤순태의 아들인가?"

"그렇습니다."

"감시를 강화하라. 독립운동가의 자식들은 대부분 아버지의 뒤를 잇는다."

"알겠습니다."


헌병들은 희열을 바라봤다. 중근은 그 시선을 알아봤다. 사냥꾼의 시선. 먹잇감을 기다리는 눈.


'데려가면 안 된다.'


중근은 깨달았다. 자신이 희열을 데려가는 순간, 헌병들의 관심이 희열에게 더 집중될 것이다. 독립운동가의 아들과 함께 다니는 정체불명의 남자. 조사가 시작되고, 추적이 시작되고, 결국 들킬 것이다.


그리고 희열도 죽는다.


중근은 주먹을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피가 났다. 하지만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마음의 고통이 육체의 고통을 덮었다.


희열이 무덤 앞에서 돌아섰다. 아이의 눈이 어둠 속을 훑었다. 마치 누군가를 찾는 것처럼.


"아저씨..."


희열이 작게 중얼거렸다. 중근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아이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어딘가에서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하지만 중근은 나타나지 않았다. 아니 나타날 수가 없없다.


희열은 한참을 기다리다가, 고개를 떨구고 걸어갔다. 작은 뒷모습이 골목 저편으로 사라졌다.


중근은 그 자리에 한참을 서 있었다.


떠나는 것이 보호하는 방법이었다. 그렇게 배웠다. 하지만 왜 이렇게 잔인한가.


1913년 가을 - 1945년 해방


중근은 서울을 떠났다. 만주로, 상하이로, 다시 만주로.


이름은 계속 바뀌었다. 안도현에서 안승우로, 안태훈으로, 안승민으로.


독립운동을 도왔다. 돈을 대고, 정보를 모으고, 위험한 일을 떠맡았다. 죽지 않는다는 것은 무기였다. 중근은 자신의 몸을 총알받이로 삼아 동지들을 지켰다.


"승민 동지는 정말 운이 좋구려."


동지들은 말했다. 중근은 웃었다. 운이 아니라 저주였지만,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1945년 8월. 일본이 항복했다.


거리에는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만세를 부르고, 울고, 웃었다. 35년 만의 해방.

중근은 그 광경을 멀리서 바라봤다. 기쁨보다는 허탈함이 먼저 왔다.


'끝났다.'


싸움이 끝났다. 독립을 이뤘다. 이제 무엇을 해야 하나.


동지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순태, 그리고 수많은 이름들. 그들은 이 날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동지들... 드디어 그 날이 왔네. 해내었어."


중근은 중얼거렸다. 하지만 대답은 없었다.


1945년 - 1963년, 해방 이후


전쟁이 터졌다. 6.25. 또다시 피가 흘렀다.


중근은 서울에 남아 피난민들을 도왔다. 이름은 또 바뀌었다. 안승민에서 다른 이름으로.


전쟁이 끝나고, 폐허가 남았다. 중근은 부산에서 막노동을 했다. 항만에서 짐을 나르고, 건설 현장에서 벽돌을 쌓았다.


몸은 지치지 않았다. 하루 종일 일해도 다음 날이면 회복되었다. 중근은 그 능력을 이용해 여러 일을 전전했다.


공장 노동자, 철도 인부, 시장 상인.

살아가는 법을 배웠다. 평범한 사람처럼,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그리고 1950년대 중반, 서울로 돌아왔다.


작은 봉제 공장에서 일을 시작했다. 바느질을 배웠다. 총보다 바늘이 조용했다. 조용한 만큼 오래 남았다.


실밥을 숨기는 법을 배우며, 중근은 자신의 정체를 숨기는 법도 익혔다.

한 땀 한 땀. 보이지 않게. 흔적 없이.


1963년, 서울

"안 선생님, 실력이 정말 좋으시네요."


공장 사장이 말했다. 중근은—이제 안승민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었다—미소를 지었다.


"감사합니다."


"근데 이상하네요. 이렇게 실력이 좋으신데 왜 여태 이쪽 일을 안 하셨어요?"


"늦게 배웠습니다."


거짓말이었다. 10년 넘게 배웠다. 하지만 사장은 의심하지 않았다.


그때였다.


"사장님!"


젊은 남자가 공장으로 들어왔다. 30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패기 넘치는 얼굴.


"아, 박 사장님. 어서 오세요."


"안녕하세요. 오늘 샘플 보러 왔습니다."


박동희였다.


중근은 작업대에서 조용히 일을 계속했다. 하지만 귀는 열어두었다.


"수출이 대박이래요, 사장님. 정부에서 섬유 수출 장려한다고 지원금도 나온대요."


"그래요? 좋은 시대가 오긴 오나 보네."


"우리도 수출 쪽으로 방향을 틀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동희의 시선이 공장 안을 훑었다. 그리고 중근에게 멈췄다.


"저분은?"


"아, 안 선생님이요. 최근에 들어오셨는데 실력이 정말 좋으세요."


동희가 중근에게 다가왔다. 중근의 손놀림을 지켜봤다. 바늘이 들어가는 각도, 실밥의 간격, 원단을 다루는 섬세함.


"...대단하시네요."


"고맙습니다."


중근은 고개를 숙였다. 동희는 한참을 중근을 바라보다가, 명함을 꺼냈다.


"혹시 시간 되시면 제 사무실로 한번 오시겠습니까? 상의드릴 게 있어서요."


"저한테요?"


"네. 사업 같이 해보실 생각 없으세요?"


중근은 동희를 바라봤다. 동희의 눈에는 진심이 있었다. 그리고 묻지 않는 눈빛도 있었다.


1963년 가을


중근과 동희는 작은 사무실에 마주 앉았다.


"정부에서 수출 장려 정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습니다. 섬유, 의류 쪽에 지원금도 나오고요."


동희가 서류를 펼쳤다.


"저는 자본은 있는데 기술이 없습니다. 안 선생님은 기술은 있는데 자본이 없으시죠?"


"...그렇습니다."


"그럼 같이 하는 겁니다. 제가 자본을 대고, 안 선생님이 기술을 담당하시는 거죠."


중근은 잠시 망설였다. 사업. 그것은 눈에 띄는 일이었다. 지금까지 중근은 늘 그림자 속에 있었다. 드러나지 않는 것이 생존의 방법이었다.


"박 사장님, 저는..."


"과거는 묻지 않겠습니다."


동희가 중근의 말을 끊었다.


"안 선생님이 어디서 오셨든, 무슨 일을 하셨든, 저는 상관없습니다. 지금 여기서, 함께 미래를 만들면 되는 거죠."


중근은 동희를 바라봤다. 묻지 않는 눈. 받아들이는 눈. 순태의 눈과 닮아 있었다.


"...좋습니다. 해보죠."


"감사합니다!"


동희가 손을 내밀었다. 중근은 그 손을 잡았다. 약지가 없는 손으로.

동희는 그 손을 보고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1963년 - 1980년대


대한실업이 시작되었다.


작은 봉제 공장에서 출발했다. 수출용 셔츠, 재킷, 코트. 정부의 지원과 동희의 경영 감각, 중근의 기술이 합쳐졌다.


7~80년대를 거치며, 회사는 빠르게 성장했다. 수출량이 늘고, 직원이 늘고, 공장이 확장되었다.


"승민 씨, 우리 이름 좀 바꾸는 게 어떨까요?"


동희가 물었다.


"이름이요?"


중근은 고개를 끄덕였다. 동희는 알고 있었다. 중근이 드러나면 안 된다는 것을.


"승민이란 이름도 벌써 10년 넘게 쓰셨잖아요."


"...그렇군요."


중근은 생각했다. 어떤 이름이 좋을까.


도현, 승우, 태훈, 승민. 모두 지나간 이름들. 이제 새로운 이름이 필요했다.


"안지혁. 어떻습니까?"


동희가 제안했다.


"안지혁..."


"네. 지혜로울 지, 빛날 혁. 지혜의 빛이란 뜻입니다."


중근은 그 이름을 되뇌었다. 안지혁. 나쁘지 않았다.


"좋습니다. 안지혁으로 하겠습니다."


그렇게 안지혁이 탄생했다.


1990년대 중반, 서울


대한실업은 중견기업으로 성장했다.


동희는 여전히 대표였고, 지혁은 뒤에서 회사를 지원했다. 아무도 지혁의 존재를 몰랐다. 얼굴 없는 공동창업자.

그리고 그즈음, 독립유공자 후손 지원 행사가 열렸다.


"지혁 씨, 이번엔 꼭 참석하셔야 합니다."


동희가 말했다.


"왜요?"


"이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지혁 씨가 평생 하고 싶었던 일이잖아요."


지혁은 망설였다. 하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행사장 뒤편, 지혁은 조용히 서 있었다. 무대 위에서는 후손들에게 장학금이 전달되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지혁의 옆에 섰다.


백발의 노인이었다. 80대쯤 되어 보였다. 노인은 지혁을 바라봤다. 한참을, 아주 오래.


지혁은 그 시선을 피하려 했다. 하지만 노인이 지혁의 손을 잡았다.


약지가 없는 손을.


노인의 입술이 떨렸다. 눈에 눈물이 고였다.


"...아저씨?"


지혁의 심장이 멎었다.


희열이었다.


어린 시절 작고 연약했던 아이가, 이제 백발의 노인이 되어 있었다.


"희열이..."


지혁은 겨우 말했다. 희열은 지혁의 손을 꽉 잡았다. 떨리는 손으로.


"아저씨... 정말... 아저씨시죠?"


"..."


지혁은 대답할 수 없었다. 대답하면 인정하는 것이다. 자신이 80년을 늙지 않고 살아온 괴물이라는 것을.


하지만 희열은 이미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말씀하셨어요. 아저씨... 언젠가 다시 올 거라고."


눈물이 희열의 뺨을 타고 흘렀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지혁의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이렇게 얼굴 보니... 너무 좋습니다..."


희열은 울먹였다. 지혁은 희열의 손을 잡았다. 약지 없는 손으로, 주름 가득한 손을.


"나도... 고생 많았네."


지혁은 낮은 목소리로 겨우 말했다. 목이 메었다.


주변 사람들이 둘을 바라봤다. 백발의 노인과 젊은 남자가 손을 잡고 우는 모습. 누군가 사진을 찍었다.


지혁은 알았다. 이 순간이 기록될 것이라는 것을. 하지만 놓을 수 없었다. 희열의 손을.


"아저씨... 이름이..."


"안지혁이라고 하네."


"안지혁..."


희열은 그 이름을 되뇌었다. 지혁은 알았다. 희열이 눈치챘다는 것을. '안'씨 성을 유지한 것을.


"부르지 않겠습니다."


희열이 작게 말했다.


"그 이름은... 부르지 않겠습니다."


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희열은 이해하고 있었다. 안중근이라는 이름은 이미 역사 속에 있다는 것을.

지혁도 조용히 말했다.


"고맙고 또 감사하네, 희열이."


"아닙니다. 제가... 감사합니다."


희열은 지혁의 손을 놓았다. 그리고 깊게 절을 했다.


지혁은 그 모습을 바라봤다. 여덟 살 아이가 여든 노인이 되어, 자신에게 절을 하고 있었다.


시간은 모두를 데려간다. 지혁만 빼고.


2010년대 중반


동희가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장에서 지혁은 동희의 아들, 박창희를 만났다.


"아버지가... 말씀하셨습니다."


창희가 말했다.


"안지혁 회장님을 잘 모시라고. 그리고 묻지 말라고."


"..."


"저도 묻지 않겠습니다. 다만..."


창희가 지혁을 똑바로 바라봤다.


"회사를 지켜주세요. 아버지의 뜻을 이어주세요."


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때, 지혁은 마지막으로 이름을 바꿨다.


안지혁에서 안지혁으로. 한자만 바꿨다. 이번엔 '지혜'가 아니라 '뜻 지(志)', '빛날 혁(赫)'.


뜻의 빛.


살아온 이유를 찾고 싶었다.


2026년 11월, 현재


지혁은 눈을 떴다.


회장실 소파에 누워 있었다. 언제 잠들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꿈속에서 희열의 얼굴을 봤다. 여든 살의 희열이, 여덟 살의 희열이.


휴대폰을 확인했다. 창희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


[회장님, 최정인 디자이너가 1990년대 행사 사진을 복원하려 하고 있습니다.]


지혁은 한숨을 쉬었다.


'또 시작이구나.'


의심에서 확신으로. 확신에서 추적으로.


그리고 결국—

지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갔다. 1층 샘플룸에 정인이 보였다. 그녀는 동료들과 대화하고 있었다. 웃고 있었다.


'이번에도 떠나면, 또 누군가가 망가지겠지?'


희열처럼. 순태처럼.


하지만 머물면 어떻게 되는가.


정인도 위험해진다. 오범준이 노리고 있다. 자신에게 가까운 사람을 인질로 삼으려 한다.


"떠나야 하나..."


지혁은 중얼거렸다. 하지만 발은 움직이지 않았다.


100년이 넘는 그 긴 시간 동안, 지혁은 늘 떠났다. 떠나는 것이 보호하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이번만큼은 다른 선택을 하고 싶었다.


그날 밤, 오범준은 정인의 동선을 추적하고 있었다.


집, 회사, 지하철역. 규칙적인 패턴. 예측 가능한 삶.

"완벽한 미끼야."


오범준은 미소 지었다.


안지혁을 끌어내는 방법은 간단하다. 그가 신경 쓰는 사람을 위협하면 된다.


오범준은 노트북을 열었다. 정인의 어머니, 김효숙의 의료 기록이 떴다.


유방암 완치 판정.

하지만 오범준은 알고 있었다. 최근 재검사 결과가 좋지 않다는 것을.


"이것도 쓸 수 있겠군."


오범준은 계획을 짰다.


먼저 정인을 압박한다. 어머니의 병, 경제적 어려움, 심리적 불안.

그리고 안지혁이 나타나길 기다린다.


영웅은 언제나 구하러 온다. 특히 자신이 신경 쓰는 사람을.


"곧 만나게 될 거야, 안지혁."


오범준의 눈빛이 빛났다.

샘플을 포획할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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