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깊어질수록, 지혁은 과거로 미끄러졌다.
회장실 소파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고 있지만, 눈에 보이는 것은 2026년의 서울이 아니었다. 1910년대 초반, 부활 직후의 혼란스러운 시간들이었다.
구덩이에서 기어 나온 뒤, 지혁은—아니, 그때는 여전히 '중근'이었다—한동안 방황했다. 죽었어야 할 사람이 살아 있다는 사실, 상처가 믿을 수 없이 빠르게 아문다는 사실, 거울에 비친 얼굴이 여전히 32세라는 사실.
공포였다. 축복이 아니라 저주였다.
1911년 가을, 조선
배를 타고 몰래 귀국했을 때, 조선은 이미 조선이 아니었다.
거리에는 일장기가 펄럭였고, 사람들은 고개를 숙인 채 걸었다. 중근은—이제 그는 다른 이름을 써야 했다—서울 변두리 작은 여관에 묵으며 상황을 파악했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대부분은 체포되었거나, 도망쳤거나, 전향했다. 하지만 한 사람, 윤순태만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중근은 순태의 집을 찾았다. 서울 외곽, 허름한 한옥. 문을 두드리는 손이 떨렸다.
문이 열렸다. 순태가 나타났다. 그는 중근을 보자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놀라는 대신, 주변을 살핀 뒤 재빨리 중근을 안으로 끌어들였다. 한마디 말도 없이.
방문이 닫혔다. 어둠 속에서 순태가 중근을 바라봤다. 한참을 바라보다가, 순태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중근이 형님이오?"
"그래."
"죽었다고 들었소."
"죽었어야 했어."
순태는 더 묻지 않았다. 대신 부엌으로 가서 차를 끓였다. 중근은 방 한쪽에 앉아 순태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순태의 등은 전보다 더 굽어 있었다. 고문의 흔적이었다.
중근은 그간의 일을 간단히 설명을 하고 자신이 '중근'이란 이름으로 살 수 없다고 말했다.
"형님을..." 순태가 차를 건네며 말했다. "어떻게 부르면 되겠소?"
"이름은 바꿔야 해. 중근이란 이름은 이제 역사 속에만 남아야 하니까."
"그럼?"
"안도현. 그렇게 불러줘."
순태는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왜 살아 있는지, 어떻게 살아났는지, 그 어떤 것도. 순태는 그저 받아들였다.
"며칠만 있다 가시오. 형편이 어려워 변변한 대접은 못하지만..."
"고맙다, 순태야."
"고맙긴요. 형님께서 우리 위해 하신 일을 생각하면..."
순태의 목소리가 떨렸다. 중근은 차를 마셨다. 뜨거운 차가 목을 타고 내려갔다. 살아 있다는 느낌이었다.
그날 밤, 중근은 작은 방에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순태의 집은 좁았다. 순태와 그의 아들, 그리고 이제 중근까지. 셋이 이 작은 집에서 지내야 했다.
아들. 윤희열. 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가 중근을 낯설게 바라봤다. 중근은 아이에게 미소를 지으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미소 짓는 법을 잊은 것 같았다.
"희열아, 인사드려라. 아버지 친구분이시다."
희열은 조심스럽게 중근에게 절을 했다. 중근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작고 따뜻한 머리. 살아 있는 생명.
'이 아이를 지켜야 한다.'
중근은 생각했다. 순태를 위해서, 그리고 자신을 위해서. 살아야 할 이유를 찾기 위해서.
1912년 봄
중근은 순태의 활동을 뒤에서 도왔다.
돈이 필요했다. 순태의 독립운동, 동지들의 생활비, 무기 구입비. 중근은 일본인 상인을 상대로 무역 중개업을 시작했다. 위험한 일이었지만, 중근에게는 특별한 이점이 있었다.
죽지 않는 몸.
밀수, 암거래, 위험한 협상. 총에 맞아도 회복되고, 칼에 베여도 아물었다. 중근은 자신의 몸을 도구로 삼아 돈을 벌었다.
그렇게 번 돈은 순태에게 건넸다.
"형님, 이건 너무 많소."
"쓰게. 동지들한테 나눠주고."
"하지만..."
"나는 쓸 데가 없어. 어차피 숨어 지내는 몸인데."
순태는 돈을 받았다. 그리고 중근의 손을 잡았다.
"형님... 고맙소."
중근은 손을 빼내려 했지만, 순태가 놓아주지 않았다. 순태는 중근의 손을 보고 있었다. 약지가 없는 손.
"이 손으로... 많은 일을 하셨구려."
"과거의 일이야."
"과거가 아니오. 지금도 형님은 싸우고 계시오."
중근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1913년 여름
순태가 잡혀갔다.
밀정의 밀고였다. 중근은 그 소식을 듣고 즉시 움직이려 했지만, 다른 동지들이 말렸다.
"도현 형님, 지금 가시면 형님도 위험합니다."
"순태를 그냥 둘 순 없어."
"하지만 형님까지 잡히면,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중근은 주먹을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에 파고들었다. 피가 났다. 하지만 곧 회복되었다.
'또 이런가.'
움직이면 들킨다. 들키면 더 많은 사람이 죽는다. 그렇게 배웠다. 1910년 실험실에서, 구덩이에서, 지난 2년간 숨어 지내며.
중근은 움직이지 않았다.
일주일 뒤, 순태가 고문 끝에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중근은 순태의 집으로 갔다.
집은 텅 비어 있었다. 순태의 물건들은 모두 압수되었고, 남은 건 여덟 살 희열뿐이었다.
아이는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울지도 않고, 떨지도 않고, 그저 멍하니 앉아 있었다.
"희열아."
중근이 다가갔다. 희열은 고개를 들었다. 아이의 눈에는 감정이 없었다. 너무 많은 것을 본 눈.
중근은 말 없이 아이의 손을 잡으려 했다. 그 순간, 희열의 시선이 중근의 손에 머물렀다.
약지가 없는 손.
"아저씨 손..."
"옛날에 다쳤어."
"아빠가 말했어요. 아저씨는... 끝까지 싸우는 사람이라고."
중근의 가슴이 조여들었다. 순태가 아이에게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 안중근에 대해, 독립운동에 대해, 맹세에 대해.
"희열아, 아저씨랑 갈래?"
희열은 고개를 끄덕였다. 중근은 아이를 안으려 했다. 하지만 그때, 창밖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시선.
누군가 이 집을 감시하고 있었다. 헌병대일 수도, 밀정일 수도 있었다. 중근을 '기억하려는' 시선.
중근은 멈췄다.
'데려가면 안 된다.'
희열을 데려가는 순간, 아이도 위험해진다. 자신과 함께 있으면, 아이는 평생 쫓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
"희열아."
중근은 조용히 아이의 손을 풀었다.
"...아저씨?"
"미안해."
"어디 가세요?"
"...멀리."
중근은 몸을 돌렸다. 희열의 "아저씨!" 하는 외침이 뒤에서 들렸다. 하지만 중근은 돌아보지 않았다.
뒷문으로 빠져나갔다. 골목을 지나, 거리로, 더 멀리.
떠나는 것이 익숙한 선택이었다. 그리고 그 선택이 가장 잔인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2026년 11월, 현재
지혁은 소파에서 눈을 떴다.
어느새 새벽이었다. 창밖으로 서울의 야경이 희미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과거는 언제나 이렇게 찾아왔다. 잠들지 않을 때, 조용할 때, 혼자일 때.
휴대폰이 울렸다. 창희였다.
[회장님, 최정인 디자이너가 회장님 관련 자료를 찾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지혁은 한참 메시지를 바라보다가, 답장을 보냈다.
[어떤 자료?]
[회사 연혁, 설립자 정보, 과거 행사 사진 등.]
[막지 마.]
[회장님?]
[어차피 막아도 찾을 거야. 차라리 찾게 놔둬.]
창희는 답장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혁은 알고 있었다. 창희가 얼마나 걱정하고 있는지.
지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갔다. 정인이 들어오는 게 보였다. 정인이었다. 그녀는 언제나처럼 일찍 출근했다.
지혁은 정인이 출근하는 모습을 바라봤다. 낡은 대중교통 카드지갑을 들고, 사무실로 걸어가는 뒷모습. 버티는 얼굴. 강한 척하는 얼굴.
그 모습이 순태를 떠올리게 했다. 고문을 받아도 동지들을 지키려 했던 순태. 죽는 순간까지 희열을 걱정했던 순태.
'나는 또 떠날 것인가.'
지혁은 생각했다.
지난 시간 동안 그는 늘 떠났다. 가까워지면 위험하다고, 드러나면 안 된다고, 떠나는 것이 보호하는 방법이라고 믿으며.
하지만 희열의 얼굴이 떠올랐다. 여덟 살 아이가 혼자 남겨진 순간. 자신을 찾으며 "아저씨..." 하고 중얼거리던 그 목소리.
'이번에도 떠나면, 또 누군가가 망가지겠지?'
희열처럼. 순태처럼. 수많은 사람들처럼.
지혁은 주먹을 쥐었다. 약지 없는 손으로.
이번만큼은 다른 선택을 하고 싶었다. 떠나지 않는 선택. 머무는 선택.
하지만 어떻게?
그날 오후, 정인은 회사 자료실에 있었다.
대한실업의 과거 기록들이 보관된 곳. 정인은 설립 초기 문서들을 하나하나 펼쳤다.
1963년 설립. 창업자는 박동희와... 이름이 지워져 있었다. 공동 창업자였지만, 기록에는 이름이 없었다.
"왜 지웠을까?"
정인은 중얼거렸다.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1970년대 수출 성장기. 1980년대 브랜드 론칭. 1990년대 CSR 활동 시작.
그리고 사진 한 장.
1995년 독립유공자 후손 지원 행사. 뒷줄에 서 있는 한 남자. 얼굴은 흐릿했지만, 윤곽은 알아볼 수 있었다.
같은 사람이었다.
정인의 손이 떨렸다. 30년 전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고, 전혀 늙지 않은 사람.
"당신은... 대체 누구죠?"
정인은 혼잣말을 했다. 하지만 대답은 없었다.
다만 확신만 있었다.
회장의 과거는 회사가 아니라 '시간'이 숨기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시간 속 어딘가에, 이 남자의 비밀이 있다는 것.
건물 밖, 오범준은 차 안에서 노트북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화면에는 대한실업의 비공개 동선 도면이 떠 있었다. 경비원 한 명을 매수해서 얻어낸 정보였다.
"비상계단, 9층 보관실, 회장실..."
오범준은 경로를 추적했다. 지혁이 어떻게 건물을 드나드는지, 어디에 머무는지, 언제 나타나는지.
모든 패턴이 정리되고 있었다.
"이제 시작이야, 안지혁 회장."
오범준은 미소를 지었다.
샘플을 포획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먼저 관찰하고, 패턴을 파악하고, 약점을 찾는다.
그리고 오범준은 이미 약점을 찾았다.
최정인.
화면을 넘기자 정인의 프로필이 떴다. 오범준은 프로필을 읽으며 중얼거렸다.
"회장이 신경 쓰는 사람. 이제 이 사람을 이용하면 돼."
오범준은 노트북을 덮고 시동을 걸었다.
사냥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