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유공자 후손 지원 행사가 열리는 날이었다.
대한실업 본사 1층 로비는 평소와 달리 북적였다. 현수막이 걸리고, 테이블이 배치되고, 직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지혁은 9층 회장실 창가에 서서 그 광경을 내려다봤다.
"회장님, 30분 후 개회식입니다."
창희가 말했다. 그의 손에는 준비된 연설문이 들려 있었다.
"내가 무대에 오를 일은 없어."
"알고 있습니다. 대신 제가 대독하겠습니다."
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 행사를 오랜시간 주최해왔지만, 단 한 번도 무대 위에 오른 적이 없었다. 사회자도, 축사도, 심지어 사진 촬영도 모두 창희가 대신했다.
"아카이브 전시는 준비됐어?"
"네. 1층 로비 한쪽에 독립운동 관련 자료들을 전시해뒀습니다. 회장님께서 기증하신 사진과 문서들도 포함되어 있고요."
지혁의 표정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기증. 그 단어가 묘했다. 그 사진 속 인물들은 지혁이 직접 만났던 사람들이었다. 함께 싸웠고, 함께 죽어간 사람들. 기증이 아니라 증언에 가까웠다.
"내용은 확인했어?"
"네. 회장님 지시대로 인물 정보는 최소한으로만 표기했습니다."
"좋아."
창희가 나간 뒤, 지혁은 한참을 창밖을 바라봤다. 로비에는 이미 참석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흰 머리의 노인들. 독립운동가의 후손들. 그들의 얼굴을 보면, 지혁은 언제나 같은 질문을 떠올렸다.
'내가 지키려던 것은 무엇이었나.'
독립은 이뤄졌다. 그러나 독립운동가들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가난과 무관심 속에서 잊혀졌다. 지혁이 이 행사를 시작한 이유는 단순했다. 빚을 갚기 위해서.
하지만 빚은 줄어들지 않았다. 지급하는 장학금도, 제공하는 의료 지원도, 그 어떤 것도 그들이 겪은 고통을 되돌릴 수 없었다.
정인은 행사 준비로 정신이 없었다.
디자인팀은 이번 행사의 현수막과 배너, 기념품 디자인을 담당했다. 정인은 마지막 점검을 위해 1층 로비를 돌아다녔다. 현수막 위치, 테이블 배치, 안내 표지판까지 하나하나 확인했다.
"정인 씨, 아카이브 쪽 조명 좀 확인해주실래요?"
동료가 소리쳤다. 정인은 로비 한쪽에 마련된 전시 공간으로 향했다. 유리 케이스 안에는 오래된 사진들과 문서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조명을 확인하다가, 정인의 시선이 한 사진에 멈췄다.
흑백 사진이었다. 1990년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행사 현장. 무대 뒤편, 사람들 틈에서 백발의 노인이 젊은 남자의 손을 붙잡고 있었다. 노인의 얼굴에는 눈물이 가득했다.
내용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1995년 ○○ 독립유공자 기념 행사 - 故 윤희열 선생"
정인은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노인의 표정, 잡힌 손, 그리고—
젊은 남자의 얼굴.
정인의 숨이 멎었다.
그 얼굴은 정인이 아는 얼굴이었다. 창고에서, 봉제 라인에서, 복도에서 스쳐 지나가던 그 사람. 외주 업체 직원이라던 그 사람.
하지만 이 사진은 30년도 더 전 것이었다. 사진 속 남자는 지금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30년이 흘렀는데, 전혀 늙지 않은 얼굴.
"왜... 늙지 않았지?"
정인은 중얼거렸다. 손이 떨렸다. 사진을 다시 봤다. 분명했다. 같은 사람이었다. 아니, 같은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 남자의 손. 사진은 흐릿했지만, 정인은 확실히 봤다. 약지가 없는 손.
"정인 씨! 개회식 시작합니다!"
동료의 외침에 정인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사진에서 시선을 떼고, 로비 중앙으로 향했다. 하지만 머릿속은 온통 그 사진으로 가득했다.
지혁은 행사장 뒤편, 아카이브 전시 공간 근처에 있었다.
개회식이 시작되고, 창희의 목소리가 마이크를 통해 들려왔다. 지혁은 귀 기울이지 않았다. 대신 전시된 사진들을 하나하나 바라봤다.
1920년대 상하이. 1930년대 만주. 1940년대 충칭. 그 속에는 지혁이 알던 얼굴들이 있었다. 함께 밥을 먹고, 함께 총을 들고, 함께 도망치던 사람들.
그들은 모두 죽었다. 지혁만 남았다.
유리 케이스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봤다. 32세. 그때와 똑같은 얼굴. 정확히 116년 전의 얼굴. 지혁은 그 얼굴이 낯설었다. 거울을 볼 때마다, 이 얼굴이 정말 자신의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안중근의 얼굴인가, 안지혁의 얼굴인가.'
그때였다.
사람들 사이로 정인이 보였다. 그녀는 멀찍이 서서 아카이브 전시 공간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은 혼란스러웠다. 무언가를 이해하려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얼굴.
지혁은 직감했다. 정인이 사진을 봤다. 1990년대 사진. 윤희열과 함께 찍힌 그 사진.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위험했다. 지금 당장 이 자리를 떠나야 했다.
지혁은 조용히 몸을 돌렸다.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로비 뒤편 복도로 빠져나갔다. 비상계단으로 향했다. 9층까지 올라가는 동안, 심장은 계속 뛰었다.
회장실에 도착했을 때, 지혁은 창가에 서서 숨을 고르려 했다. 하지만 숨은 고르지지 않았다. 심장은 여전히 뛰고 있었다.
'들켰다.'
정확히는, 의심받기 시작했다.
행사가 끝난 후, 정인은 다시 아카이브 공간으로 향했다.
사진을 다시 확인하고 싶었다. 자세히, 더 자세히 봐야 했다. 착각일 수도 있었다. 닮은 사람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전시 공간에 도착했을 때, 사진은 사라져 있었다.
"어?"
정인은 당황해서 주변을 둘러봤다. 분명 이 자리에 있었다. 백발의 노인과 젊은 남자가 손을 잡고 있던 사진.
"찾으시는 거 있으세요?"
뒤에서 창희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인은 돌아섰다.
"아, 박 대표님. 여기 있던 사진이요. 1990년대 행사 사진... 갑자기 없어졌네요?"
창희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아, 그 사진이요. 유족분께서 개인적인 사유로 전시 중단을 요청하셔서 회수했습니다."
"그렇군요..."
"혹시 무슨 이유로 찾으셨나요?"
정인은 잠시 망설였다. 말해야 할까? 하지만 뭘 말한다는 거지? '외주 업체 직원이 30년 전 사진 속 사람과 똑같이 생겼다'고?
"아니에요. 그냥... 사진이 인상 깊어서요."
"그렇습니까."
창희는 더 묻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뭔가를 경계하고 있었다.
정인은 자리를 떠났다. 복도를 걸으며, 머릿속으로 퍼즐을 맞추려 했다.
외주 업체 직원. 약지가 없는 손. 30년 전 사진 속 같은 얼굴. 갑자기 사라진 사진.
그리고 회장. 얼굴을 본 사람이 없는 회장. 비공개 동선. 숨겨진 존재.
'설마...'
정인은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퍼즐 조각들은 자꾸 한 방향을 가리켰다.
그날 밤, 지혁은 회장실에서 창희와 마주 앉아 있었다.
"최정인 디자이너가 사진을 봤습니다."
창희의 말에 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표정으로 알 수 있었어."
"사진은 회수했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이미 봤다는 건 변하지 않아."
창희는 한숨을 쉬었다. "회장님,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지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창밖을 바라볼 뿐이었다. 밤의 서울은 불빛으로 가득했다. 116년 전에는 없던 불빛들.
"정인 씨는... 똑똑한 사람입니다." 창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지금은 의심 단계지만, 시간이 지나면 확신으로 바뀔 겁니다."
"알아."
"그럼..."
"더 조심할게."
"조심하는 게 아니라, 거리를 두셔야 합니다."
지혁은 창희를 돌아봤다. 창희의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나도 노력하고 있어."
"노력이 아니라 실천이 필요합니다, 회장님."
지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창희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 앞에서 멈춰 섰다가, 뒤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회장님께서 가까워지면... 그 사람도 위험해집니다. 오범준이 노리는 건 회장님입니다. 회장님 주변 사람들은 그저 미끼일 뿐이고요."
창희가 나간 뒤, 지혁은 혼자 남았다.
그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약지가 없는 손. 이 손 때문에 들켰다. 정인은 이 손을 봤고, 사진 속 손과 연결했다.
지혁은 주먹을 쥐었다. 쥐었다 펴는 동작을 반복했다. 맹세의 손. 싸움의 손. 그리고 이제는 정체를 드러내는 손.
다음 날 아침, 정인은 회사에 일찍 출근했다.
로비는 조용했다. 어제의 행사 흔적은 모두 치워져 있었다. 정인은 아카이브 공간이 있던 자리로 걸어갔다. 텅 빈 공간만 남아 있었다.
"또 왔네요."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정인은 놀라 돌아섰다.
외주 업체 직원이었다. 아니, 정인은 이제 그가 외주 업체 직원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남자는 모자를 눌러쓰고 있었다. 하지만 정인은 그의 얼굴 윤곽을 기억하고 있었다. 사진 속 얼굴.
"어제 행사,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근데... 어제도 오셨나요?"
남자는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네. 검수 차."
거짓말이었다. 정인은 알 수 있었다. 그의 목소리에 묻은 미묘한 떨림. 그는 뭔가를 숨기고 있었다.
"혹시..." 정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여기 오래 다니셨어요?"
"왜 그러시죠?"
"아니, 그냥... 궁금해서요."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정인을 바라봤다. 모자 아래 그의 눈이 정인을 똑바로 응시했다.
"최정인 씨."
정인은 놀랐다.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회사 사람들은... 다 알죠. 좋은 디자이너라고 소문났으니까요."
남자는 그렇게 말하고 돌아섰다. 정인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로비를 가로질러, 복도 저편으로 사라지는 모습.
정인은 확신했다.
'회장의 과거는 회사가 아니라 시간이 숨기고 있다.'
그리고 이 남자는 그 시간 속 어딘가에 존재하는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