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식은 정인이 가장 싫어하는 행사였다.
사람들은 술을 마시고, 웃고, 떠들었다. 정인도 웃고 떠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버티는 방식'이었다. 진짜 즐거움이 아니라, 동료들과 어울리기 위한 연기였다.
"정인아, 너 진짜 술 약하다." 선배가 웃으며 말했다.
"네, 원래 잘 못 마셔요."
"그래도 오늘은 축하할 일 아니야? 네 디자인이 메인 라인 채택됐잖아."
정인은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기쁜 일이었다. 정말로. 하지만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어머니의 병원비가 떠올랐고, 다음 달 카드값이 떠올랐고, 밀린 월세가 떠올랐다.
기쁨은 사치였다.
회식이 끝나고, 사람들은 삼삼오오 택시를 잡았다. 누군가 정인에게 물었다.
"정인아, 같이 탈래?"
"아니요, 저는 지하철 타고 갈게요."
"이 시간에? 택시 타, 회사에서 지원해줘."
"괜찮아요."
정인은 거절했다. 택시를 탈 수 없었다. 정확히는, 차를 탈 수 없었다. 대중교통은 괜찮았다. 지하철, 버스는 괜찮았다. 하지만 택시나 승용차는—안 됐다.
지하철역으로 걸어가는 길, 정인은 대중교통 카드지갑을 꺼내 만지작거렸다. 이 카드지갑은 5년째 쓰고 있었다. 낡았지만 버릴 수 없었다. 이것만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었다. 차가 없어도 괜찮았다.
그때였다.
뒤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정인이 돌아보았을 때, 동료 한 명이 달려오고 있었다.
"정인아, 우산!"
"아, 감사합니다."
우산을 받아 든 순간, 옆 차선에서 급정거 소리가 들렸다.
끼익—!
정인의 몸이 얼어붙었다.
숨이 막혔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손이 떨렸다. 우산이 바닥에 떨어졌다. 시야가 좁아졌다. 주변 소리가 멀어졌다.
"정인아? 괜찮아?"
동료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대답할 수 없었다. 정인의 머릿속에는 오직 하나의 장면만 재생되고 있었다.
열여덟 살. 아버지와 함께 탄 차. 초록불. 달리는 차. 그리고—
끼익—!
옆에서 달려오는 트럭. 아버지의 신음소리, 어머니의 울부짖음. 충격. 유리 깨지는 소리. 어둠.
"정인아!"
동료가 정인의 어깨를 잡았다. 정인은 그제야 숨을 들이켰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온몸에 식은땀이 흘렀다.
"미, 미안해요. 괜찮아요."
"괜찮아 보이지 않는데... 병원 갈까?"
"아뇨, 진짜 괜찮아요."
정인은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동료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정인을 바라봤지만,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정인은 우산을 주워 들고, 재빨리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계단을 내려가며, 정인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괜찮아. 괜찮아.'
스스로에게 말했지만, 심장은 믿지 않았다.
지혁은 그 장면을 봤다.
그는 회사 건물 근처, 어두운 골목에 서 있었다. 오범준의 감시피하고, 그를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정인이 지나갔다. 동료와 함께 걸어가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지혁은 발길을 멈췄다.
그리고 급정거 소리가 들렸다.
정인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몸이 굳고,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손이 떨리고, 숨이 가빠졌다. 동료가 그녀를 붙잡았을 때, 정인은 겨우 정신을 차리는 것처럼 보였다.
지혁은 그 모습을 보며 알았다.
'트라우마.'
과거의 상처.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 정인은 강한 사람이었지만, 강한 사람일수록 무너지는 순간을 더 깊이 숨긴다.
지혁은 그 방식이 익숙했다. 자신이 100년 넘는 시간 동안 써온 방식이기도 했다.
정인이 지하철역으로 사라진 뒤, 지혁은 그 자리에 한참 서 있었다. 다가가고 싶었다. 괜찮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다가가면 안 됐다. 가까워지면 위험했다.
"회장님."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창희였다.
"왜 여기 계세요?"
"...아무것도 아니야."
"거짓말."
창희가 지혁의 시선을 따라갔다. 정인이 사라진 지하철역 입구.
"최정인 디자이너요?"
지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회장님." 창희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가까워지지 마세요."
"알아."
"정말 아세요? 회장님이 가까워지면, 그 사람도 위험해집니다."
지혁은 창희를 돌아봤다. 창희의 눈빛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그 걱정은 지혁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정인을 위한 것이었다.
"나도 알아, 창희야."
"그럼 멈추세요."
"...노력하고 있어."
창희는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는 지혁이 '노력'과 '실패' 사이에서 얼마나 자주 흔들리는지 알고 있었다.
다음 날, 지혁은 회장실에서 보고서를 검토하고 있었다. 하지만 집중할 수 없었다. 정인의 떨리는 손이 자꾸 떠올랐다.
'급정거.'
그 소리에 그녀는 얼어붙었다. 과거의 어떤 순간이 그녀를 붙잡고 있었다.
노크 소리가 들렸다.
"회장님, 최정인 디자이너 인사 파일 가져왔습니다."
창희가 파일을 건넸다. 지혁은 파일을 펼쳤다.
최정인. 만 28세. 디자인팀 소속. 학력: 프랑스 Atelier Chardon-Savard 패션디자인학교 중퇴 (가족 사정으로 귀국) 특이사항: 운전면허 없음. 대중교통만 이용. 가족: 모친 김효숙 (유방암 완치 판정)
지혁의 눈이 '가족 사정'과 '운전면허 없음'에 머물렀다.
"창희야, 이 부분... 더 자세한 기록 있어?"
"네. 잠시만요."
창희가 태블릿을 조작했다. "10년 전 교통사고 기록이 있습니다. 최정인 디자이너가 열여덟 살 때, 부친과 함께 탄 차량이 사고를 당했고... 부친은 현장에서 사망, 정인 디자이너는 경상으로 회복했다고 나와 있네요."
지혁의 손이 멈췄다.
"...운전은?"
"부친이 운전하고 있었습니다. 신호 대기 중 옆 차선에서 트럭이 돌진했다고 합니다."
지혁은 파일을 덮었다. 심장이 아팠다. 정확히는, 심장이 '뛰는' 것이 아니라 '조여드는' 느낌이었다.
정인은 그날 이후 차를 탈 수 없게 된 것이다. 아버지를 잃은 그 순간이, 그녀를 지금도 붙잡고 있었다.
"회장님, 괜찮으세요?"
"...괜찮아."
하지만 괜찮지 않았다. 지혁은 자신이 왜 이렇게 흔들리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수많은 사람의 죽음을 봤다. 수많은 상처를 봤다. 그런데 왜 이번은 다른가.
왜 이 사람은 다른가.
그날 저녁, 지혁은 또 현장을 돌았다. 이번에는 봉제 라인이었다. 작업자들이 재봉틀 앞에 앉아 원단을 처리하고 있었다. 지혁은 그들의 손놀림을 지켜봤다. 바늘이 들어가는 각도. 실밥의 간격. 한 땀 한 땀이 완제품을 만들어냈다.
"누구시죠?"
뒤에서 정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혁은 놀라 돌아섰다. 정인은 샘플을 들고 서 있었다.
"앗, 죄송해요. 저 디자인팀 최정인이에요. 저번에 창고에서 뵌..."
"네! 외주 업체 직원입니다." 지혁은 재빨리 말을 끊었다.
"아, 그러시구나. 근데 자주 오시네요?"
"검수가 많아서요."
정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녀의 시선이 지혁의 손에 머물렀다. 약지가 없는 손.
지혁은 재빨리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실례하겠습니다."
그는 그 자리를 떠났다. 하지만 복도를 지나며, 정인의 시선이 자꾸 떠올랐다. 그녀는 뭔가 눈치챘을까? 아니면 그냥 이상하게 생각한 걸까?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위험해.'
지혁은 비공개 루트로 빠르게 이동했다. 회장실로 돌아와 창문 너머를 내려다봤다. 정인은 여전히 봉제 라인에 서 있었다. 그녀는 샘플을 살피고, 작업자와 대화하고, 뭔가를 메모했다.
버티는 얼굴이었다.
지혁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잘린 약지의 빈자리. 이 손으로 그는 맹세했고, 싸웠고, 살아남았다.
그런데 지금, 이 손으로 뭘 해야 할까.
그날 밤, 오범준은 대한실업 근처 카페에 앉아 있었다. 노트북 화면에는 지혁의 동선이 점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분명 비공개 루트가 있는 게 분명해. 흥미롭군."
그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또 다른 파일을 열었다. 최정인의 사진이 떴다.
"회장의 약점을 찾으려면, 회장이 신경 쓰는 사람을 찾으면 돼."
오범준은 정인의 파일을 확대했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과연 이 사람일까? 그의 삶을 흔들어놓을 사람."
그의 눈빛에 호기심이 번졌다. 샘플을 보는 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