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얼굴 없는 회장

by Director Keige

"회장님 얼굴 본 사람 있어요?"


휴게실에서 들려온 대화였다. 정인은 커피를 타다 말고 귀를 기울였다.


"없을걸요. 저도 입사한 지 3년 됐는데 한 번도 못 봤어요."

"그럼 정말 있긴 있는 거예요?"

"당연하죠. 박 대표님이 늘 보고하잖아요. '회장님 결재 받았다', '회장님 지시사항이다' 하면서."

"그럼 유령 회장인가..."


웃음소리가 터졌다. 정인은 커피를 들고 자리로 돌아왔다. 유령 회장. 황당한 말이었지만, 완전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대한실업에는 회장이 '있다'는 소문만 있을 뿐, 그 실체를 본 사람은 없었다.


정인은 모니터 앞에 앉아 디자인 시안을 수정했다. 마감이 이틀 남았다. 손이 저릿저릿했지만 멈출 수 없었다. 멈추면 생각이 들어찼다. 어머니의 병원비. 월세. 다음 달 카드값.


버티는 것. 그것이 정인이 가장 잘하는 일이었다.


같은 시각, 지혁은 9층 회장실이 아닌 4층 자재 창고에 있었다.


원단 롤이 쌓인 창고 한쪽에서, 그는 무릎을 굽히고 앉아 실밥을 살폈다. 손가락 끝으로 원단의 올을 따라가며, 직조의 밀도를 확인했다. 이 원단은 다음 시즌 메인 라인에 쓰일 것이었다. 보고서에는 '합격' 판정이 났지만, 지혁의 손끝은 다른 이야기를 했다.


"밀도가 고르지 않아."


그는 중얼거렸다. 원단의 왼쪽 끝과 오른쪽 끝의 질감이 달랐다. 미세한 차이였지만, 이 차이는 봉제 과정에서 뒤틀림을 만들어낼 것이다. 완제품이 나왔을 때는 이미 늦다.


지혁은 휴대폰을 꺼내 창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4층 창고, C-24 롤 재검수 필요. 밀도 불균일.]


답장은 곧바로 왔다.


[회장님, 거기 왜 또 계세요? 창고는 제가 확인하겠습니다.]


지혁은 미소를 지었다. 창희는 늘 걱정했다. 회장이 직접 현장을 돌아다니는 것을, 직원처럼 구석구석을 확인하는 것을. 하지만 지혁에게 이것은 숨기는 방식인 동시에, 살아남는 방식이었다.


보고서는 거짓말을 한다. 숫자는 편집된다. 하지만 원단의 올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작업자의 손목 각도는 숨기지 못한다.


지혁은 천천히 일어섰다. 창고 문을 열고 복도로 나서려는 순간, 누군가와 부딪칠 뻔했다.


"앗, 죄송합니다!"


정인이었다.


그녀는 자재 샘플을 들고 있었고, 지혁을 보자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잘 보지 못했다고 사과했다. 지혁은 재빨리 모자를 눌러쓰고 한 걸음 물러섰다.


"괜찮습니다."


"아, 자재팀 분이세요? 처음 뵙는 것 같은데..."


"외주 업체입니다. 원단 검수 때문에 왔어요."


정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러시구나. 저는 디자인팀 최정인입니다. 혹시 C-24 롤 보셨어요? 그거 이번 시즌 메인 원단인데..."


"밀도가 고르지 않더군요."


"...네?"


정인의 눈이 커졌다. "어떻게 아셨어요? 저도 아까 샘플 보면서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지혁은 더 말하지 않았다. 대신 정인에게 고개를 숙이고 재빨리 그 자리를 떠났다. 복도를 지나며, 그는 심장 박동이 빨라지는 것을 느꼈다.


'가까워지지 마.'


자신에게 말했다. 하지만 심장은 듣지 않았다.


이틀 뒤, 정인은 회의실에서 신규 라인 발표를 준비하고 있었다.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점검하고, 샘플을 배치하고, 예상 질문을 정리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었다.


C-24 롤이 교체되어 있었다.


"어? 이거 언제 바뀐 거예요?"


옆자리 선배가 고개를 갸웃했다. "모르겠는데? 어제 퇴근할 때까지만 해도 원래 롤이었는데."


정인은 새로 들어온 원단을 만져봤다. 밀도가 균일했다. 질감이 훨씬 좋았다. 누군가 밤사이 교체한 것이 분명했다.


"박 대표님 지시일까요?"


"아마?"


정인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틀 전 창고에서 만난 외주 업체 직원의 말이 떠올랐다. '밀도가 고르지 않더군요.' 그 사람이 보고한 걸까?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누군가 현장을 제대로 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지혁은 회장실에서 창희의 보고를 받고 있었다.


"C-24 롤 교체 완료했습니다. 새 롤은 품질 검수 통과했고요."


"수고했어."


"그런데 회장님..." 창희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최정인 디자이너가 회장님을 봤다고 하던데요."


지혁의 시선이 창희에게 향했다.


"뭐라고 했어?"


"회장님을 직접 봤다는 이야기는 아니고, 창고에서 외주 업체 직원을 봤다고. 원단 검수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고 하더군요."


"그렇게 생각하게 놔둬."


"하지만 회장님이 너무 자주 현장에 나타나시면..."


"창희야." 지혁이 창희를 똑바로 바라봤다. "나는 이 회사를 보고서로 경영하지 않아. 현장을 봐야 해. 사람을 봐야 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창희는 말을 잇지 못했다. 지혁의 눈빛을 보면, 더 이상 말할 수 없었다. 그 눈빛에는 100년 이상의 무게가 담겨 있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창희가 태블릿을 꺼냈다. "지난번 회장님 주변을 서성인다는 그 사람, 신원 파악했습니다."


"누구야?"


"오범. 의학 박사이자 생명공학 연구자입니다. 최근 몇 년간 재생의학 쪽에서 논란이 많았던 사람이에요. 비윤리적 실험으로 연구소에서 쫓겨난 적도 있고요."


지혁의 표정이 굳었다.


"재생의학?"


"네. 세포 재생, 조직 복구, 불사 연구... 그런 쪽입니다."


지혁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구반의 냄새가 더 진하게 났다. 사람을 샘플로 보는 눈. 생명을 실험 대상으로 취급하는 태도.


"감시를 더 강화해. 하지만 절대 접촉하지 마."


"알겠습니다."


창희가 나간 뒤, 지혁은 창밖을 바라봤다. 1층 샘플룸에서 정인이 동료들과 대화하고 있었다. 그녀는 웃고 있었지만, 그 웃음은 어딘가 긴장해 있었다.


지혁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약지가 잘린 손. 이 손으로 그는 총을 쐈고, 바늘을 들었고, 회사를 세웠다. 그리고 지금은—누군가를 지켜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장이 또 뛰었다.


'위험해.'


지혁은 손을 주먹 쥐었다. 심장이 뛰면 회복이 빨라진다. 회복이 빨라지면 들킨다. 들키면 끝이다.

그런데 이상했다. 지금 이 순간, 그는 '들키는 것'보다 '떠나는 것'이 더 두려웠다.


그날 밤, 지혁은 비공개 루트로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주차장으로 향하는 길에, 그는 뒤에서 누군가 따라오는 기척을 느꼈다.


멈추지 않았다. 걸음을 늦추지도 않았다. 다만 감각은 열어두었다. 거리. 호흡. 발소리.


한 명.


오범준이었다.


지혁은 주차장 구석, CCTV 사각지대로 걸어 들어갔다. 오범준이 따라왔다. 그리고 지혁이 멈췄을 때, 오범준도 멈췄다.


"안녕하세요, 회장님."


오범준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그 부드러움 뒤에는 날카로운 호기심이 숨어 있었다.


지혁은 천천히 돌아섰다.


"사람 잘못 보신 듯합니다."


"안지혁 회장님."


지혁은 순간 동공이 확장되고 심장이 뛰었다. 하지만 조용히 물었다.


"누구시죠?"


"오범준입니다. 회장님에 대해 궁금한 게 많아서요."


"저에게 궁금해할 만한 게 없습니다."


"왜죠?" 오범준이 한 걸음 다가왔다. "당신은 특별하잖아요. 32세의 얼굴로 100년을 넘게 살아온 사람. 상처가 빠르게 회복되는 사람. 늙지 않는 사람."


지혁의 심장이 더 빠르게 뛰었다. 하지만 표정은 움직이지 않았다.


"소설 같은 이야기네요."


"소설이 아니라 사실입니다." 오범준이 미소를 지었다. "저는 증명하고 싶을 뿐이에요. 당신이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는지. 그 비밀이 뭔지."


"관심 없습니다."


지혁은 돌아서서 걸어갔다. 오범준은 더 이상 따라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회장님. 저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결국 알아낼 겁니다."


지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에서 멀어져 차에 올라탔다. 시동을 걸고, 핸들을 잡고, 한참을 그대로 앉아 있었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구반, 그들의 눈빛이 떠올랐다. 1910년, 실험실의 차가운 조명. 숫자로 불리던 순간들.


'또 시작이다.'


지혁은 엔진을 가동했다. 그리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이전 01화1화. 부활의 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