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부활의 심장

by Director Keige

자신의 세계가 끝나는 순간을 경험한 사람은 안다. 끝은 언제나 조용하다는 것을.


1910년 3월 26일. 중근의 세계는 그렇게 끝났다. 아니, 끝나야 했다. 교수형 집행 통지를 받은 그날 아침, 그는 오히려 평온했다. 마지막 기도를 마치고, 마지막 편지를 쓰고, 마지막 얼굴들을 떠올렸다. 죽음은 두렵지 않았다. 다만 미완의 일들이 가슴에 걸렸을 뿐이다.


죽음을 향한 길은 길고도 길었다.


그러나 그 길의 끝은 교수대가 아니었다.


금속 냄새가 먼저 코를 찔렀다. 약품 냄새가 그 뒤를 따랐다. 복도 끝의 문은 나무가 아니라 철제였고, 문이 열리자 하얀 타일과 차가운 조명이 그를 맞았다. 사형수들이 가는 곳이 아니었다. 이곳은 사람이 죽는 곳이 아니라, 사람을 '사용'하는 곳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다.


'나는 죽음조차 의롭지 못하구나.'


"번호 47. 앞으로."


일본어였다. 이름이 아니라 번호로 불렸다. 중근은 그 순간 자신이 더 이상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표본. 실험체. 숫자.


차가운 금속 침대 위에 눕혀졌다. 팔이 고정되고, 다리가 묶였다. 천장의 조명이 너무 밝아서 눈을 감았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가사하라 상, 준비 완료되었습니다."


"우리 구반(관동군 제9특별연구반)은 인류의 미래를 위한 첫발을 내딛는 것이다."


구반.


그 이름은 기억에 남았다. 마지막 순간까지 중근의 귓가에 남은 이름.


주사가 들어왔다. 한 번, 두 번, 세 번. 심장이 미친 듯이 뛰다가 멈췄다. 고통이 밀려왔다가 사라졌다. 의식이 가라앉았다.


그리고—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흙냄새가 먼저 돌아왔다. 촉촉하고 무겁고 차가운 흙. 그다음은 무게였다. 몸 위를 누르는 다른 몸들의 무게. 시신들이었다. 겹겹이 쌓인 시신들 사이에서, 그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박동은 규칙적이었지만, 그것은 "살아라"는 명령이 아니었다. "견뎌라"는 형벌에 가까웠다.


중근은 흙을 헤치고 기어 나왔다. 손톱이 부서지고, 입안에 흙이 들어찼다. 공기를 들이마신 순간, 폐가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왔다. 하지만 그는 살아 있었다. 죽었어야 할 사람이, 다시 살아 숨 쉬고 있었다.


구덩이 밖은 어두웠다. 달빛만이 희미하게 시신들의 윤곽을 비췄다. 그는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옷은 찢겨 있었고, 몸은 상처투성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고통이 빠르게 사라지고 있었다. 피부가 재생되는 느낌. 뼈가 제자리를 찾는 감각.


그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약지가 잘린 손. 그 손이 떨리고 있었다.


"나는... 죽었어야 했는데."


그 중얼거림이 밤공기 속으로 흩어졌다.


나는 안가 중근이었다.


시간이 흘러 안가 도현이 되었고, 승우가 되었고, 태훈이 되었으며, 승민이 되었다. 그렇게 수많은 이름을 거치며 지금은 '안지혁'이란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다.


지금 세상은 나를 훌륭한 독립투사, 의사로 기억하며 기린다. 하지만 난 이제 그들이 말하는 안가 중근은 아니었다. 아니, 그 이름이 나이긴 했을까? 의문을 넘어 희미해지기까지 하다.


매번 새로운 이름을 받을 때마다, 안중근이라는 사람은 조금씩 흐릿해졌다. 도현일 때는 아직 기억이 선명했다. 승우일 때는 조금 멀어졌다. 태훈, 승민을 거치며 그 이름은 역사책 속 다른 사람의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지혁.


지금의 나는 누구인가. 안중근의 기억을 가진 다른 사람인가. 아니면 안중근이 변한 것인가.


2025년 11월.


지혁은 서울 강남의 한 빌딩 지하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차에서 내렸다. 정장이 아니라 편한 청바지와 후드티 차림이었다. 야구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검정색 뿔테 안경을 썼다. 회장이 아닌 평범한 패션회사 직원처럼 보이는 게 목표였다.


평소라면 회사 정문이나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눈에 띄지 않는 존재여야 했으니까.


언제나 회사를 출입할 때에는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았다. 대신 비상계단으로 올라갔다. 3층, 5층, 7층. 아무도 그 동선을 알지 못한다. CCTV도 없다. 그 경로는 그가 직접 설계한 것이다. (주)대한실업의 회장이 건물에 들어오는 방식은, 정문도 직원 출입구도 아닌 이 '보이지 않는 통로'였다.


9층, 복도 끝의 작은 문. 보관실로 위장된 이 문 뒤에는 회장실로 이어지는 숨겨진 복도가 있었다. 카드키를 대고 안으로 들어서면 그의 방이 있었다. 대한실업 회장의 방, 그의 방이었다.


오늘은 평범한 직장인이고 싶었다. 자신을 드러내지는 않더라도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직원들과 함께 자연스럽게 정문을 통해 들어왔다.


그리고 사내 카페에 앉아 조용히 차를 한 잔 마시며 창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회장님, 어디시라고요?"


창희의 목소리에는 깜짝 놀람과 당황스러움이 묻어났다. 박창희, 대한실업의 대표이사. 30대 후반의 그는 이 회사의 실질적인 운영자였다. 그리고 지혁의 비밀을 아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회장... 아니, 지혁 아."


누가 들을까 봐 재빨리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왜 비상통로가 아닌 이곳으로..."

"이러실 거면 미리 제가 준비라도 좀 할 수 있게, 네?!"

"이러다 회장님 노출이라도 되면 어쩌시려고요."


지혁은 가볍게 웃으며 창희를 안심시켰다.


"가끔은 가장 안전한 길이라고 생각했던 길이 가장 위험한 길이 될 수도 있는 법이야."


창희는 다른 직원들 눈을 피해 지혁을 회장실로 모시고 업무를 보라며 물러났다.


회장의 책상 위에는 이번 달 보고서가 놓여 있었다. 그러나 지혁은 보고서를 먼저 펼치지 않았다. 대신 창문으로 다가가 아래를 내려다봤다. 본사 건물 1층, 유리창 너머로 봉제 샘플룸이 보였다. 디자이너들이 원단을 펼치고, 재단사들이 패턴을 확인하고 있었다.


지혁의 눈이 그들의 손끝을 따라갔다. 실밥의 간격. 바늘이 들어가는 각도. 원단의 질감. 보고서는 숫자로 말하지만, 현장은 손으로 말한다. 그는 숫자보다 손을 믿었다.


노크 소리가 들렸다.


"회장님, 들어가도 될까요?"


이 방을 노크하는 유일한 사람, 창희였다.


"들어와."


간단히 업무 보고를 마치고, 창희가 말했다.


"회장님, 요즘 자주 정문 이용하시는데 제발 좀... 비상통로로 들어오시면 안 될까요? 이렇게 직원처럼 변장하고 다니시면, 언젠가 사고가 날 겁니다."


지혁은 가볍게 웃었다.


"100년이 넘는 시간 잘 감춰온 인생이야. 그 정도로 위험해지지 않아. 걱정 마."


창희가 걱정스러운 마음에 말했다.


"그래도..."

"미리 연락은 좀 주세요. 저 매번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요, 회장님."


"창희야." 지혁이 창희를 돌아봤다.


"네가 놀라는 표정을 볼 때마다, 내가 아직 사람 같다는 기분이 들어. 그러니까 계속 놀라줘."


창희는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입가에는 미소가 번졌다.

"알겠습니다. 그럼 오늘도 놀라드렸으니 제 몫은 했습니다."


지혁은 다시 창밖을 바라봤다. 1층 샘플룸에서 한 여성이 원단을 들고 햇빛에 비춰보고 있었다. 머리를 한쪽으로 묶은 젊은 디자이너. 최정인. 그녀는 원단의 질감을 손끝으로 확인하고, 빛의 투과도를 눈으로 가늠했다. 섬세한 손놀림이었다.


지혁의 심장이 재빨리 한 번 더 뛰었다.

뭔가를 훔치기라도 한 듯.


그는 재빨리 시선을 거뒀다. 심장이 뛰면 위험하다. 감정이 움직이면 회복이 빨라진다. 회복이 빨라지면 들킨다. 그렇다, 빠른 심박수는 나를 32살의 중근으로 되돌려 놓는다.


"회장님?"


"아무것도 아니야." 지혁은 책상으로 돌아가 보고서를 펼쳤다. "오늘 일정은?"


"오전엔 내부 회의, 오후엔 신규 라인 점검입니다. 그리고..." 창희가 잠시 말을 멈췄다.

"회장님 동선 근처를 맴도는 사람이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지혁의 손이 멈췄다.


"어떤 사람?"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직원도 아니고, 거래처 사람도 아닙니다. CCTV에 몇 번 포착됐는데, 회장님이 계신 집과 회사 근처에서 서성이는 모습이 찍혔습니다."


지혁은 보고서를 덮었다. 오래된 기억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구반의 얼굴들. 차갑고 호기심 가득한 눈 빛.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시선들.


"감시를 강화해. 하지만 자극하지 마."


"알겠습니다."


창희가 나간 뒤, 지혁은 다시 창밖을 내려다봤다. 정인이 여전히 원단을 살피고 있었다. 그녀의 책상에는 대중교통 카드지갑이 놓여 있었다. 차를 타지 않는 사람. 무언가를 피하는 사람. 버티는 얼굴.


지혁은 알 수 없는 박동을 다시 느꼈다.


그날 저녁, 지혁은 회사를 떠나기 전 1층 샘플룸을 지나쳤다. 늦게까지 남아 있는 직원은 몇 명 없었다. 정인도 그중 하나였다. 그녀는 책상 앞에 앉아 스케치를 수정하고 있었다.


지혁은 복도에서 그녀를 잠시 바라봤다. 그녀는 집중할 때 입술을 살짝 깨무는 버릇이 있었다. 연필을 쥔 손은 섬세했지만, 어딘가 긴장한 듯 굳어 있었다.


"누구세요?"


정인이 고개를 들었다. 지혁은 재빨리 모자를 눌러쓰고 고개를 숙였다.


"아, 청소 업체 직원입니다. 실례했습니다."


"아... 네."


정인은 다시 스케치에 집중했다. 지혁은 조용히 그 자리를 떠났다. 복도를 지나며 그는 생각했다.


'견디는 사람의 무너짐은 언제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어난다.'

그는 그 방식이 너무나 익숙했다. 자신이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써온 방식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