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공무원의 감성, 구리다고만 했던 나를 반성하며
이번 글은 돈을 지불하는 공간과 세금으로 운영되는 공간을 다녀보며 느낀 개인적인 감상이다.
어느덧 백수 4개월 차. 쉬면서 박물관, 미술관, 전시관, 정원, 공원, 도서관 등을 '엣 헴-' 뒷짐 지고 다니며 즐기는 중이다. 입장료나 시설 이용료가 있는 곳, 없는 곳을 다니면서 무료라고 시설이 '후지다'고만할 수 없음을, 공공시설의 중요성을 깨우친 계기들이다.
최근 다녀온 곳 중 입장료가 가장 비싼 곳은 경북 군위에 위치한 사유원으로 1인당 5만 원에 달했다. 그 외 미술관의 경우 평균 1만 5천 원 대였으며(갤러리 제외) 박물관, 도서관, 공원 등은 무료였다.
내 기준 가장 비싼 입장료를 기록한 사유원(思惟園)은 태창철강의 유재성 회장이 조성한 사유지(私有地)다. 다녀오고 보니 5만 원이 아까운 곳은 아녔다. 물론 이건 다녀온 뒤에 감상이며, 가기 전엔 결코 저렴하지 않은 금액에 부담스러웠던 것도 사실이다. 이곳에 가기 위해 전날 숙박을 잡아야 했고, 밥을 사 먹어야 하고, 기름 값과 톨게이트 비용을 지불해야 하고, 커피도 사 먹고 간식도 먹어야 하니까. 다녀와서 정산하니 1박 2일에 꽤 많은 비용을 썼더라. 사유원에 간 것을 후회하는 것은 절대 아니나 멋진 걸 보기 위해 치러야 할 시간과 비용이 만만치 않음을 새롭게 깨달았다. (해외여행을 가면 하루에 박물관/미술관 입장료에만 몇 만 원씩 쓰면서 국내에선 조금 아까워하는 것도 발견했고)
예약제로 한정된 인원만 입장할 수 있는 곳이라 주말은 연일 매진이다. 나야 지금은 시간 여유가 있으니 평일에 다녀올 수 있었고, 나 외에 다른 평일 이용객들도 휴가를 썼을 가능성도 높지만 어쨌건 이곳을 오기 위해 시간과 돈을 투자할 수 있는 여유와 이런 문화에 익숙한 사람들이 올 가능성이 많다.
사유원을 다녀와서 좋아할 것 같은 지인들에게 추천을 했다. 문화 예술을 꽤나 즐기는 사람들에게도 입장료 5만 원은 헉! 하는 금액이었다. 거기에 추가 이동 시간과 비용 등을 더해야 하니 말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경험'을 위해 기꺼이 시간과 비용을 투자했다. 이들에겐 사유원 경험이 시간+돈을 쓸 수 있는 가치가 있는 것이다. 반면 '그렇게까진 부담스러워서 못 가겠다'는 사람들도 있다. 주저하는 배경에는 경제적 상황과 시간도 있고 경험의 차이도 분명 있어 보였다.
국뽕을 맞는 일이 잘 없는데 두 번이나 맞은 곳이 있다. 바로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 민속박물관이다.
게다가 둘 다 무료입장. 국뽕을 맞은 이유는 거두절미하고 정말, 너무, 멋있었다. 두 곳 모두 관람 후에 '와 이게 무료라고? 외국인에게라도 1만 원씩 받아야 하는 거 아냐?'에 이어 '내 세금이 이렇게 잘 쓰이고 있다'는 감상평을 남겼다.
이렇게 놀라웠던 건 이전까지 나에게 '박물관'은 재미없는 곳이었다. 시대 별, 국가 별 유물을 그저 주르륵 나열해둔 기억만 있었을 뿐이다. 그. 런. 데! 21세기의 박물관은 그야말로 멀티미디어가 잘 활용된, 국격이 느껴지는, 시쳇말로 '짜치지 않는' 공간이었다. 유물 전시뿐 아니라 특별전, 상설전 역시 시의적절하고 구성이 탄탄해 기획자와 디자이너, 시공사 등등의 많은 이의 노력이 느껴졌달까. 아주 커다란 영상관에서 사방에 설치된 스크린이 주는 압도감과 수준 높고 재미있는 영상 콘텐츠를 보며 이게 요즘의 박물관임을 알게 됐다. 이런 걸 보고 크는 아이들은 또 새로운 콘텐츠를 만들어 내겠지? 문화산업 강국이 이런 데서 시작하나 봐!
최근 자주 가는 곳은 동네 도서관이다. 한 번은 책을 빌리러 갔는데 엄청 따뜻해서 놀랐다. 꽤 추운 날이어서 더욱 인상 깊었다. 대여하고 바로 나오려고 했는데, 따뜻함에 사로 잡혀 자리를 잡고 한 참 책을 읽고 왔다. 그 뒤로 도서관에 빠져 시간 나거나, 귀찮음이 덜 한 날엔 도서관으로 간다. 노트북을 들고 갈 때도 있고, 커피만 보온병에 담아 갈 때도 있고. 세상에 이런 공간이 어디 있겠는가. 따뜻하고, 깨끗하고, 책도 많고, 와이파이도 지원된다. 그런데 무료라니. 도서관에서 반나절 간 책 보고 놀았는데 100원도 쓰지 않았다니! 이것이 공공시설의 순기능인가! 싶었다.
일상생활에서 K-공무원 감성 쯧, 하게 되는 건 연말마다 돌아오는 화려한 조명이 감싸는 어딘가!이다. 흔히 일루미네이션이라고 말하는 조형물 말이다. 광장 같은 곳에 대형 트리까지 하는 건 오케이, 따뜻해 보이고 좋다. 그러나 인도가 좀 긴 곳에는 꼭 일루미네이션이 생긴다. 거기에 '오늘도 수고했어' 같은 글귀를 곁들인. 몇 해 동안 이어지는 광경을 보며 새로운 것 좀 하지, 저 반짝거리는 색은 좀 빼지, 문구는 안 쓰면 큰일 나나, 등등의 감상을 곁들였다.
지역민들이 하는 맛집 공유 오픈 채팅방에서 늘 눈팅을 하고 있는데, 어느 날 'OO공원에 설치된 일루미네이션이 별로다'라는 이야기를 누군가 남겼다. 함께 공유해준 사진을 봤을 때 왜 저런 감상평을 남겼는지는 공감했지만 나였으면 그렇게까지 여러 명이 있는 방에 남기진 않았을 것이다. 아무튼 그 방에 관계자가 있었는지 죄송하다는 메시지를 남겼다.
구린 걸 구리다고 말하는 게 잘못된 건 아니다. 내가 낸 세금이 저렇게 밖에 쓰이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화가 나는 부분이니까. 하지만 구리다고 말하는 건 너무나 개인적 취향의 영역이기도 하고, 담당자도 더 크고 멋지고 예쁜 걸 하고 싶었겠지만 '예산'의 문제로 차선의 선택을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쩌면 익숙한 것을 계속하는 게 많은 사람들을 실망시키지 않는 안전한 선택지일 수도 있다.
겨울밤에 반짝이는 공공시설은 사람들에게 대단한 미적 감각을 키워 준다기보다 일상의 삭막함을 잠깐이나마 덜어주고, 깜깜한 거리를 밝혀주는 역할 말하더라도 성공적인 게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결정적인 계기는 지나다닐 때마다 남녀노소 불구하고 사진 찍고 구경하는 사람들의 표정이 마스크 너머 즐거워 보였다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촌스럽고 어딘가 모자라 보인 다하더라도, 내가 공원을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어떠한 기쁨을 대가 없이 줄 수 있을까? 단연코 아니다.
도시에 많은 공간은 어떤 형태든 이용료를 지불해야만 즐거움을 향유할 수 있다. 입장료를 내거나, 커피를 사 마시거나. 소비하지 않고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은 공원과 박물관, 도서관뿐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카드나 현금 없이 오롯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유익한 공간은 불경한 곳일지 모르지만, 자본주의의 폐단이 만연한 시대에 공공시설의 중요성을 새롭게 배웠다. 보기 구리다 해도, 그건 내 생각일 뿐. 아니 그래도... 이왕이면 더 예쁘고 멋졌으면 좋겠어... 물론 박물관은 수준급이니까 언젠간 지방자치까지 내려오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