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기적> 리뷰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그럴 시간에 단칼에 넘어가는 나무를 벤다면 더 많은 나무를 얻을 수 있다. 그런데도 왜 공들여 열 번 찍어야만 하는 나무를 원하는지 묻는 사람이 있었던가. <기적>은 주인공 준경에게 ‘간이역 만들기’라는 나무가 어떤 의미였는지, 그 이유에 반전이 있는 작품이다.
<기적>
오갈 수 있는 길은 기찻길밖에 없지만 정작 기차역은 없는 마을. 오늘부로 청와대에 딱 54번째 편지를 보낸 ‘준경’(박정민)의 목표는 단 하나! 바로 마을에 기차역이 생기는 것이다.
기차역은 어림없다는 원칙주의 기관사 아버지 ‘태윤’(이성민)의 반대에도 누나 ‘보경’(이수경)과 마을에 남는 걸 고집하며 왕복 5시간 통학길을 오가는 ‘준경’. 그의 엉뚱함 속 비범함을 단번에 알아본 자칭 뮤즈 ‘라희’(임윤아)와 함께 설득력 있는 편지 쓰기를 위한 맞춤법 수업, 유명세를 얻기 위한 장학퀴즈 테스트, 대통령배 수학경시대회 응시까지! 오로지 기차역을 짓기 위한 ‘준경’만의 노력은 계속되는데...!
포기란 없다 기차가 서는 그날까지!
기차가 내는 소리와 miracle이라는 중의적 의미를 담은 제목이 재밌었다. 심지어 제목만 가지고 장난친 게 아니라, 영화 내용 역시 기적 소리가 들리는 그날이 바로 기적이 일어난 날이라는 상황을 담고 있다.
미국 작품은 수사, 일본 작품은 교훈, 한국 작품은 사랑 없이 이야기를 진행하지 못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기적>이 특별한 이유는 이들이 일으키고자 한 기적이 연인 간의 사랑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표면적으로 준경과 라희의 러브라인은 쉴 틈 없이 나온다. 하지만 라희는 준경이 찍는 나무가 아니라, 나무를 찍기 위한 도끼다. 준경과 라희의 사랑이 중심 사건이었다면 영화는 꽤 무게감을 잃었을지 모른다. 풋풋한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간이역에 얽힌 판타지를 그린다는 점에서 <지금 만나러 갑니다>와의 차별성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기적>은 준경이 값지고 튼튼한 라희라는 도끼를 이용하는 게 하나의 과정일 뿐, 그 끝엔 모두의 안녕을 위한 간이역이라는 ‘열 번 찍어야 할 나무’가 따로 있기에 더 감동적이다.
단순히 어린 천재의 호기인 줄 알았던 간이역 프로젝트는 누나인 보경의 죽음으로 인한 상처, 아버지 태윤의 관심이 고팠던 준경의 아픔이 담겨있음이 드러나며 무게감을 더한다. 이 무게감은 왜 준경이 그 천재성을 지니고도 서울로 가지 않았는지, 단칼에 베이는 나무들과 함께 쉽게 성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쳐두고 열 번의 도끼질을 투자해야 하는 간이역에 집착했는지 납득시킨다.
사실 영화의 내용 자체가 기적이다. 준경의 천재성도 기적에 가깝고, 양원역이라는 간이역이 생긴 것도 기적이다. 제대로 된 기차역조차 없는 시골에 국회의원의 딸인 라희가 있다는 것, 라희가 준경을 좋아한다는 것, 죽은 보경이 계속 준경의 눈에 보이는 것도 모자라 잃어버린 원서까지 찾아준다는 것 모두 기적이라는 말로밖에 설명할 수 없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우연으로 버무려진 이 이야기가 시시했다. 하지만 그 기적들도 쉰 번 넘게 청와대로 손 편지를 보내야 했던 준경의 간절함이 만든 게 아닐까. 산신령 앞에 정직하게만 있어도 금도끼, 은도끼 다 퍼준다고 했다. 산신령이 준경을 봤다면, 라희라는 도끼 하나 내어줄 법하지 않나. 도끼질 한 번에 나무가 바로 베이지는 않았어도, 내리찍을 때마다 나무는 흔들리며 잎과 열매라는 기적을 떨궜을 수 있다.
천재 준경이 대의를 위해 간이역을 만들고자 하는 줄 알았을 땐 그저 경건한 마음이 들었다. 무언가를 저 정도로 간절하게 바란 적 있느냐고 묻는다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를 위해 노력했냐고 묻는다면, 나름대로 노력도 했다고 답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무리 많은 나무를 베어도 내가 머물 통나무집에 썼을 뿐, 모두를 위한 땔감으로 내놓은 적 없다. 그래서 준경의 큰 뜻에 깨달음을 얻기보단 말 그대로 ‘영화 속 이야기’ 같았다. 오히려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어 시작한 일이라는 사연이 나왔을 때, 비로소 준경의 진심이 눈에 들어오고 그에게서 배울 점이 보였다.
간절한 마음이라는 것 자체가 힘들어서 회피했었다. 뭔가를 바라지 않으면 실망할 일도 없을 테니까. 나무를 고르는 것조차 사치라고 생각하며 판단력과 안목을 외면해왔다. 그런데 오랜만에 애끓으며 열심인 청년 이야기를 보니 자극받는다. 그토록 간절하게 원한 걸 얻었을 때의 뿌듯함과 성취감을 이 영화가 상기해줬다.
다시 힘내서 나무를 둘러봐야겠다. 열 번, 혹은 그 이상 찍어야 할 나만의 나무, 그 고집 센 나무를 위해 오늘도 열심히 도끼질해 보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