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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eily 케일리 Nov 04. 2022

김첨지와 함께한 상한 맛 인생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 리뷰

낯익은 제목과 뻔한 시놉시스 때문에 안 내켰다. 그랬던 <인생은 아름다워>를 본 건 SNS에 ‘세월이 가면’이라는 노래를 업로드하면서 염정아를 귀여워하는 고등학생 덕분이었다. 그녀를 7080 시절로 떠나보낸 타임머신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여전히 참신함이 기대되지는 않았다. 단지 ‘아는 맛이 맛있다’는 평이 나올 정도의 무난한 감동 한 그릇을 바랐는데, 영화는 익숙한 게 아닌 상한 맛을 선보이고야 말았다.


<인생은 아름다워>

무뚝뚝한 남편 ‘진봉’과 무심한 아들 딸을 위해 헌신하며 살아온 ‘세연’은 어느 날 자신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인생에 서글퍼진 ‘세연’은 마지막 생일선물로 문득 떠오른 자신의 첫사랑을 찾아 달라는 황당한 요구를 한다. 막무가내로 우기는 아내의 고집에 어쩔 수 없이 여행길에 따라나선 ‘진봉’은 아무런 단서도 없이 이름 석 자만 가지고 무작정 전국 방방곡곡을 누빈다. 시도 때도 없이 티격태격 다투던 두 사람은 가는 곳곳마다 자신들의 찬란했던 지난날 소중한 기억을 하나 둘 떠올리는데...

과연 ‘세연’의 첫사랑은 어디에 있으며 그들의 여행은 무사히 마칠 수 있을까?


<인생은 아름다워>에서 가장 아름답지 못한 인생을 사는 사람, 상한 맛의 최대 피해자는 염정아가 연기한 세연이다가족을 위해 한평생을 희생하며 살아온 세연은 살 날이 2달밖에 안 남았다며 시한부 선고를 받는다. 그녀가 그토록 헌신한 가족은 퉁명스러운 남편 진봉과 엄마가 말을 걸어도 이어폰 꽂고 무시하는 아들, 그리고 엄마가 영원히 안 들어왔으면 좋겠다는 딸뿐. 이제라도 자신을 위해 살아야겠다며 억울함을 표하던 세연은 버킷리스트를 작성하고, 그 일환으로 첫사랑 정우를 만나러 떠난다. 차라리 세연이 정말 새로운 사랑을 찾았다면, 이 상한 반찬 세트 같은 설정도 파격적인 큰 그림을 위해 둔갑한 카멜레온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유교 국가의 작품답게, 세연이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날 수 없다. 이를 위해 그녀의 ‘첫사랑 찾기’ 여정은 남편이라는 족쇄와 함께한다.


<인생은 아름다워>를 낡은 작품으로 만든 1등 공신은 세연의 남편 진봉이다. 진봉은 <운수 좋은 날>의 김첨지를 닮았다. 21세기 버전 김첨지는 병 걸린 아내를 한심하단 듯 무시하고, 생일 축하조차 안 해준다. 되려 세연이 생일을 자축하며 미역국을 끓이자 아들 수능이 코앞인데 미역국이라며 화를 낸다. <운수 좋은 날>에서 아내를 홀대하던 김첨지가 뒤늦게 사 온 설렁탕 한 그릇에 미화되는 게 역겨웠다. 꾸준히 실망감을 주다가 한 번에 모든 걸 만회하려면 로또 1등 정도의 보상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로또 미당첨은 실망스럽기만 하지, 진봉의 폭력적이고 형편없는 모습은 혐오스러웠다. 진봉을 욕하라고 판 깔아주던 영화는 갑자기 반환점을 돌며 ‘사실은 아내를 잃을까 봐 무서워한 진봉, 몰래 버킷리스트를 보고 이뤄주고자 노력한 진봉, 아내를 사랑하지만 표현이 서툰 진봉’으로 미화한다. 쓰레기에서 츤데레로의 탈바꿈 과정은 사탄도 울고 갈 신분 세탁이 따로 없다. 로또 5등만도 못한 이벤트에 김첨지 같은 진봉도 애처가가 되는 것이다.


김첨지 하나도 버거운데, 이 가족은 김첨지가 작은 김첨지를 낳은 덕분에 남편, 아들, 딸이라는 세 명의 김첨지가 등장한다. 그리고 세 명의 김첨지는 시한부, 가족, 개과천선이라는 소재와 함께 알아서 이야기를 진행시킨다. 전통 있는 감동 소재를 통해 첨지들은 알아서 슬퍼하고, 알아서 철들고, 알아서 행복을 깨우친다. 진봉은 아들이 음악 하는 게 싫어 기타까지 부쉈는데, 세연이 죽자 아들은 너무도 평온하게 음악에 열중한다. 대사 한 줄, 관련 사건 하나 없이 말이다. 죽음엔 늘 무게가 있지만, 거들떠보지도 않던 찬밥과의 이별이 이토록 기적적인 변화를 가져올지 의구심이 든다.


그동안 못 해준 게 후회가 되고, 시간이 얼마 안 남은 게 아쉽고. 이런 게 절절하게 다가오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 루틴의 시조새 같은 작품들이 나오고, 있을 때 잘하라는 교훈이 돈 지가 언젠데 아직도 저렇게 후회하고 아파하는 건 좀 뒷북처럼 느껴진다. 백 년 묵은 김첨지 이야기를 보고 싶은 게 아니다. 매일 못살게 굴고 무능함을 자랑하다가 죽고 나서 잘해주는 남편은 필요 없다. 매일 설렁탕 직접 끓여주고 가정을 위해 감정적으로도 최선을 다하는 조신한 남편이 보고 싶다.


엔딩 크레디트가 흐를 때 류승룡과 염정아가 <세월이 가면>을 부른다. 


‘세월이 가면 가슴이 터질 듯한 그리운 마음이야 잊는다 해도, 한없이 소중했던 사랑이 있었음을 잊지 말고 기억해줘요.’


하지만 진봉과 세연의 사랑이 정말 한없이 소중했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차라리 세연이 찾고팠던 첫사랑이 진봉이었다면 어땠을까 상상해본다. 진봉이 먼저 세연을 좋아한 줄 알았는데, 그래서 세연의 힌트를 듣고도 자신인 줄 몰랐는데 알고 보니 그 첫사랑이 본인이었다면. 그래서 그때의 그 사랑으로 돌아와달라는 메시지였다면 어땠을까. 진부한 건 마찬가지지만 적어도 진봉의 개과천선과 가족애로 직결하기엔 효과적이었을지 모른다.


다시 한번 로또에 빗댈 수 있을 것 같다. 늘 미당첨으로 로또 값만 앗아가다 당첨 한 번으로 모든 기억을 미화시키는 사랑. 김첨지의 사랑은 급박하게 준비된 인스턴트 사랑이다. 한없이 소중해지려면 좀 더 오래 우려낸, 깊은 사골로 준비해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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