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뒤셀도르퍼 Aug 03. 2020

나로 살기 위해 카메라를 쥔다

소심예민 씨의 자아 찾기

'타인의 반응에 민감하며, 예민하고 창의력 있는...'


여느 성격 검사에서도, 심심풀이 심리 테스트에서도 한결 같이 난 타인의 반응에 민감한 사람이다. 타인의 반응에 민감하다는 것은 외부의 자극에도 쉽게 동요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누군가는 웃고 넘겼을 허점투성이 심리 테스트 결과에도 나는 지난 삶을 짜 맞춰봤다.


"엄마, 나 과자 먹으면 안 돼요?"


단도직입적으로 투정 부려도 될 나이에도 엄마의 기분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질문으로 다가갔다. 아이가 소심한 성격으로 자랄 것이 걱정되었는지, 엄마는 "~안돼요?"의 질문을 던진 딸에게 "그렇게 물으면 무엇이든 안된다고 대답할 거야"라고 단호하게 교육했다. 


제법 단호한 교육에도 나는 소심한 학생으로 자랐다. 서른일곱 명이 종 치기만을 기다리는 교실에서 팔을 번쩍 들고 질문할 용기가 없어, 숙제로 제출할 공책 한 구석에 매일 질문을 덧붙였다. 빨간 펜으로 적힐 답을 기대하고, 다음 수업을 기다리던 조용한 학생이 되었다. 있는 듯 없는 듯 자리를 지켰지만 나에게도 빛나는 순간이 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 있는 미술 시간이었다. 손재주의 DNA는 얄궂게도 동생에게 몰아줬지만, 나의 무기는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과감함이었다. 평가는 한결 같이 '창의적이나 완성도가 낮음'으로 끝났지만, 어제까지 없던 나의 것을 만드는 그 과정을 사랑했다.


아이디어를 따라잡지 못하는 가여운 손은 이내 카메라를 선택했다. 갑작스럽게 진로를 '사진학과'로 틀었을 때, 엄마는 '성수동 아줌마'에게 달려갔다. '밖을 돌아다니기 좋아하고 쇠가 잘 맞는 사주'라는 답변을 들고 온 엄마는 처음으로 사진학과에 지원하면 안 되냐는 딸에게 '된다'라고 답했다.


포트폴리오를 준비하는 사진학원에서 기본기를 익히고, 처음 나의 주제를 선택하라고 숙제를 받던 날을 기억한다. 입 밖을 벗어나지 못해 몸속에만 맴돌던 이야기를 적었다. 땀이 나고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야기가 담길 이미지를 상상하며 잠을 설쳤다. 이 떨림은 누군가의 눈치를 보며 더듬거리던 움직임과 달랐다. 머리가 핑 돌만큼 아찔한 경험이었다. 


처음 뱉은 이야기가 사진이 되고, 그 사진이 다시 이야기가 되어 나는 정식으로 사진학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그곳에선 나에게 없는 것을 배우는 곳이었다. 스스로를 예민하게 관찰하고 풀어가는 대신 모두가 인정할 이미지를 시간 안에 만들어 내는 것이 중요했다. 그곳에서 나는 자주 넘어졌고, 자주 눈치를 봤다. 밤 잠을 설친 아이디어는 단상에 서보지 못하고 스러졌다. 주어진 낱말을 사진으로 완성하는 것. 4년의 흐름대로 졸업 작업은 '졸업을 위한' 작업으로 완성했다. 


직장에서도 다를 것은 없었다. 가진 성격 중 유일하게 쓸모 있는 것은 '타인의 반응에 민감한 것'이었다. 다시 한번 솔직한 이야기를 몸에 가뒀다. 그리고 매 달 '불특정 한 독자'를 향한 글을 제출했다. 사진 월간지에 근무한 지 1년이 조금 넘었을 무렵, 나에게는 작은 자유가 생겼다. 한 코너 정도는 사심 가득한 인터뷰를 진행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인터뷰를 가장한 팬미팅에서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는 작가들을 만났다. 이야기를 자신의 언어로 재구성하는 모습을 보고 온 날이면, 이미지가 되지 못한 나의 언어들이 요동쳤다.


억눌려왔던 예민함이 몇 번 터지고 나서야 나는 퇴사를 했다. 그리고서 독일로 떠나왔다. 짧지도 길지도 않은 시간을 이름 대신 직함으로 불렸기에 나의 이름이 익숙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또 애써 감추고 살아온 성격으로 살아가는 것도 맞지 않는 옷처럼 낯설었다. 오롯이 이름으로만 살아가기 위해 매일 아이디어를 꺼냈다. 꺼내는 순간은 여전히 짜릿했고, 밤을 지새우는 날도 한결같았다. 


처음 사진을 시작한 이후 8년 만에 나를 위한 작업을 시작했다. 4년 간의 날 선 교육이 어리숙한 이미지를 볼만하게 만들어준 덕분에 가끔 지루했지만 점차 나의 방식을 찾아갔다. 벌써 나의 이름으로만 살기 시작한 것도 몇 년이 지났다. 나의 이야기로 석사를 시작했고, 작은 전시를 하며 살아왔다. 누군가는 이 이야기를 좋아하기도 한다. 사회적으로 성공했다는 방점을 찍을 수 없는 작은 일을 하고 있고, 여전히 가끔은 타인에게 발맞춰 걸으며 직함으로 살아가던 날을 떠올리기도 한다. 그때의 나 역시 나로 살아가고 있었지만, 언제나 반쪽에서도 모자란 1/3쪽짜리 삶이었다. 예민함이 가시가 되어 누군갈 불편하게 하고, 남들과 다른 생각은 틀 밖의 예외가 되었던 것을 기억한다. 하지만 나의 사진을, 이미지를, 언어를 구축하는 지금은 예민함과 창의성이 가장 큰 무기가 되었다.


엄마의 눈치를 살피던 아이는 학생이 되어 또 다른 이들의 감정을 살피느라 바빴다. 그 모습이 전부인 줄 알았던 삶에 카메라와 사진은 기꺼이 입이 돼주었다. 그때서야 나는 말하는 방법을 배운 사람처럼 사진을 찍고 글을 썼다. 그리고 여전히 두근거리기 위해, 밤 잠을 설치기 위해 그렇게 나답게 말하기 위해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는다. 요즘도 일에 치여 나로 살고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들 때마다 카메라를 든다. 긴 할 말이 생길 때마다 저장해둔 사진을 뒤적인다. 작고 보잘것없는 성격이 나를 설명하는 유일한 단어들이지만 그 단어들이 작업 속에선 나다운 것이 되어 반짝인다. 나다움을 향한 고마움, 나의 언어로 말하는 행복. 이들은 나다울 때 찾아오는 유일한 감정이라 믿는다. 



작가의 이전글 세상 모든 적정에 대한 반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