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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뒤셀도르퍼 Jul 15. 2020

세상 모든 적정에 대한 반감

이 시대의 카메라는 참 친절하다.

해가 강하면 조리개를 조여주고, 밤이 되면 야간 모드 터치 한 번에 흔들림 없이 멋진 사진을 안겨준다.

특별히 사진에 대한 A to Z를 배우지 않아도 각자의 휴대폰엔 멋진 사진이 가득하다.

이 모든 것은 대부분의 환경에서 빠르게 적정값을 찾아주는 소프트웨어 덕분일 거다.


적정값은 분할된 화면에서 최고와 최저를 분석했을 때, 그 가운데 값을 말한다.

카메라에서는 P모드나 자동모드를 선택하면 자동으로 밝기를 분석해 적정값을 제시한다.

또 오토화이트밸런스 모드를 선택하면 색온도도 매번 분석해서 중간값을 찾아준다.

이 적정값은 스마트폰을 들이댈 때도 어김없이 적용된다.

오히려 스마트폰은 세부적으로 조절하는 기능을 따로 찾아야 할 정도로 완전 자동에 익숙하다.


적정값은 선호도를 굳이 찾을 필요도 없도록 카메라와 밀착되어 있다.

왜냐하면 늘 적당한 사진을 안겨주기 때문에, 그 적정값에 대한 생각을 하는 것도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적정값에 의심을 더한다.

적정 노출값은 언제나 회색*을 중심으로 하고, 화이트 밸런스는 흰색을 기준으로 한다.

(*사진술에서는 노출의 정도를 존 시스템을 통해 파악한다. 가장 낮은 밝기의 존 0(3.5%)부터 가장 높은 밝기를 가진 존 10(100%)까지 10단계로 분류해둔 것이다. 이들 중 가운데 값은 존 5, 18%의 반사도를 갖는 회색이다.)

현실은 언제나 중간값으로 존재하지 않고, 언제나 또렷한 흰색으로 드러나지 않는데도

사진 속 풍경들은 한결 같이 중간값에 서있다.


야경은 중간보다 조금 더 어두워도 괜찮고, 눈 오는 풍경은 평소보다 조금 더 밝아도 괜찮다.

동이 트는 새벽에는 푸르름이 끼어드는 것이 당연하고, 가로등에선 노란 내 얼굴이 정상이다.

어둠을 밝게 하고, 디테일이 사라지기 직전인 밝음을 어둡게 해서 모든 것이 보이는 사진으로 만들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모든 것을 읽을 수 있는 무언가로 만들 뿐, 그 자체로 무언가가 되긴 어렵다.

사진은 책이 아니고, 사물은 단어가 아니기 때문에. 이미지가 되지 못한 사진은 금방 지루해지기 마련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나는 세상의 모든 가운데 값을 의심한다.

가운데에 놓인 적정값이 유일한 정상의 범주로 인지되어서 안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카메라로 들여다보는 풍경의 적정값이 때에 따라 바뀌며, 1/3 스탑 오른쪽, 1 스탑 왼쪽일 때가 있듯.

개인의 삶도 각각 다른 적정값을 가진다고 생각한다.


잡색 없는 회색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붉은색을 띠는 흰색이기에, 또 누군가는 푸른색이 감도는 검은색이기 때문에 회색에 비교될 이유는 없다. 그들이 꼭 모든 잡색을 뺀 회색이 될 필요도 없다. 세상의 빛은 모두에게 온전히 닿지 않고, 누군가는 종종 그늘에 숨고 싶을 때도 있으니까. 


그래서 가끔 나는 왼쪽으로 몇 스탑 치우친 채 세상을 찍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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