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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뒤셀도르퍼 Sep 18. 2020

초점 에러

카메라를 껐다가 다시 켭니다

1.
5년을 밤낮으로 함께 했던 카메라가 고장 났습니다. 처음엔 렌즈부의 일시적 에러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엔 초점을 잃었습니다. 결국 이 녀석은 영영 꺼지지 않고 잠시 잠들다 깨기만 반복했습니다. 중고시장에선 이런 제 카메라를 전투형이라고 칭할 겁니다. 이제 막 박스에서 나온 듯한 민트급 카메라와는 모델부터 달라 보이는 녀석입니다. 뚜껑이란 뚜껑은 모두 잃어버리고, 제 것이 아닌 슈를 끼고, 바디가 온통 상처 투성이입니다.

2.
처음 초점 에러를 발견했을 때 놀랐지만 이 녀석의 자연스러운 노화 과정을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내가 안경을 벗고 본다면 이런 세상일 거야 라는 마음으로 사진을 찍은 날도 있습니다. 이제는 어떤 수리 센터에서도 고개를 젓는 이 카메라. 그것이 남길 수 있는 마지막 이미지까지 함께하기로 했습니다.

3.
나는 지금 그 카메라처럼 초점을 잃은 채 수리센터에 있습니다. 전투형에 가까운 삶이 고되어, 잠시 에러가 생겼습니다. 물속에서 리셋하고 싶었습니다. 전원이 다시 들어왔을 때, 렌즈는 사라져 있었습니다. 나는 계속 초점이 맞지 않은 채로 이곳을 서성입니다. 대강의 형태만으로 길을 찾고, 방을 찾고, 사람을 찾습니다.

4.
내가 그 카메라를 포기하지 않았던 것처럼, 고장 난 내 곁을 지켜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솔직히 나는 카메라처럼 솔직하지 않았어요. 경고 화면을 바지런히 띄우는 대신 스스로 단정 지었습니다. 나는 고쳐질 수 없다고요. 이제 버려질 차례만 남았다고 생각한 겁니다. 판단하고 심판하는 몇 명의 의견을 듣고 나는 내 남은 시간을 확정 지었습니다.

5.
"간단한 시스템 에러입니다. 3-4일 정도면 수리가 완료되겠네요. 여분의 렌즈가 있나요? 그건 누가 가져오죠? 네 알겠습니다."
의사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들의 손에서 에러는 언제든 고칠 수 있는 작은 실수인 것 같아요. 사람은 누구나 그럴 수 있다고 했습니다. 나에게 그 에러가 수리되길 기다리는 사람이 많다고 했습니다. 나는 아직 쓸모가 있다고 말했어요.

6.
시 외곽의 정신병원, 폐쇄병동 14E 건물에서 오늘도 하루를 시작합니다. 초점 에러는 계속되어 난 아침을 깨우는 당신이, 밥을 주는 당신이 그리고 나와 이야기하는 당신이 어떤 디테일을 가지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 와중에도 내 휴대폰 카메라는 아주 정확하게 이곳을 묘사하네요. 예전에 누군가가 카메라는 눈의 연장, 눈과 같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내 눈은 사실 이렇게 선명하게 볼 수 없습니다. 그 고장 난 카메라만 비슷하게 내 눈과 비슷한 이미지를 보여주겠네요.

7.
4번째 이사를 하면서도 고장 난 카메라를 버릴 수 없던 이유는 그 때문일지도 몰라요. 우리가 닮아서, 우리가 애잔해서, 우리가 아직 쓸모가 있을 거 같아서. 계속해서 잠들 뿐, 꺼지지 않는 카메라처럼 나도 그저 잠들기만 반복하려 합니다. 내일도 얼굴 모르는 이가 인사로 깨워줄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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