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뒤셀도르퍼 Sep 19. 2020

기어이 우리가 닿기까지

스치는 빛에 관한 진심

1.

2000년부터 2009년까지 반지하에 살았습니다. 그래서 퀴퀴한 매연이 방을 머무는 것이, 낯설고 익숙한 발걸음 소리가 귀를 울리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압니다. 대체로 별로인 그곳에 유일하게 좋아하는 것이 있었어요. 잠시 스쳐가는 빛입니다. 내가 살던 곳은 그 동네에 가득 지어진 평범한 빌라 중 하나입니다. 빛이 들어오는 시간이나 방향보다 제 몸 하나 욱여넣은 공간만 고려한 것 같은 모양이었지요. 그래서 빛은 모든 우연적인 요소로만 찾아왔습니다.


2.

옆 건물 창문을 다녀온 빛, 버려진 거울에 반사된 빛. 이런 것들이 가끔 창문을 두드렸습니다. 비록 스쳐가는 작은 빛들이지만 이곳까지 흘러든 빛은 그 자체로 따스함이었어요. 무기력이 자리한 매트리스 위에 조각 빛이 어른거릴 때면 팔을 뻗어 함께 살랑이곤 했습니다.


3.

이런 빛만 좇기 시작했어요. 카메라를 쥐고 난 뒤에는 반사적으로 셔터를 눌렀죠. 자연광으로 물체를 찍으라는 대학 첫 과제 때도 그랬습니다. 연인이 누운 곳에 빛이 들었을 때도 망설임 없이 셔터를 눌렀습니다. 이 어두운 곳에 기어이 닿기까지 겹친 우연 때문이었을까요. 찰나여서 낚아채고 싶은 욕심이었을까요. 나는 유독 스치는 빛에 관대하게 셔터를 눌렀습니다.


4.

내가 머무는 곳은 3층입니다. 반지하보다 사방에서 들어올 빛이 많지만, 창문은 이중으로 잠겨있습니다. 창가 병상을 선택한 첫 밤, 나는 이곳으로 보낸 이들에 대한 원망을 안고 잠들었습니다. 눈을 떴을 땐 원망 대신 가늘고 긴 빛을 안고 있었어요. 바깥 풍경도 보기 어려운 틈을 지나 기어이 나에게 닿아있던 것입니다.


5.

오래도록 잊고 있던 풍경이 떠올랐습니다. 땅 속으로 푹 꺼진 반지하집, 불을 켜도 어두운 낮, 눅눅한 벽지와 바닥, 모래알이 낀 운동화 소리, 쿰쿰한 매연 냄새 그리고 그 사이를 비집고 스쳐가는 조각 빛. 무기력한 청소년을 스친 그 빛이 다시 주저앉은 청년에게로 향하는 상상. 나는 이곳에서 다시 스치는 조각 빛을 찍습니다. 안과 밖을 자유로이 다니며 빛을 선택할 수 있는 이들과 달리 우리는 2중의 잠금장치를 빠져나온 빛만 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6.

참 놀라운 것은 화요일부터 토요일 오늘까지 해가 가득했다는 사실입니다. 축복받은 여름을 빼고는 이렇게 하루도 빠짐없이 맑을 일이 없는 곳이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나는 '아 힘내서 다시 일어나라는 뜻인가'하고 혼자만의 희망을 품어봅니다. 자연의 무의미에 희망을 덧씌워서라도 어쩌면 난 살고 싶었나 봅니다.


오늘처럼 내일도 가느다란 조각 빛 위에 서늘한 바람이 불면 좋겠어요.

작가의 이전글 초점 에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