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호의 바다
1.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 성벽 안에는 매일 그림 그리는 할아버지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그 모습이 신기해 사진을 찍었습니다. 나중엔 매일 같은 시간, 같은 자리를 지키는 그는 그 옆의 조각상처럼 익숙해졌습니다. 그리고 두브로브니크를 떠나던 날, 그에게서 그림을 샀습니다. 비슷하지만 조금씩 다른 성벽과 바다 사이에서 하나를 골랐습니다. 손바닥만 한 캔버스에는 눈에도 선한 풍경이 오롯이 남아있었습니다. 그 그림을 시작으로 사정이 될 때마다 크고 작은 도시 풍경을 모았습니다.
2.
그 그림들은 어슴푸레한 인공조명 아래, 온통 하얀 벽에, 또 머리맡에서 집 안의 풍경이 되었습니다. 비슷한 풍경을 찍은 사진도 훨씬 많지만 나는 그려진 풍경을 사랑합니다. 카메라가 정확히 재현한 사진이 기록이라면, 눈과 손, 시간으로 재현한 그림은 어딘가 여행의 추억으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3.
14E 병동 240호에 들어선 날, 나는 다른 색을 발견했습니다. 흐릿한 시야에도 그것은 분명 그림이었습니다. 손바닥만 한 크기의 바다 그림. 좁은 창문 틈이 전부인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 그런 그림이었습니다.
4.
잡지 따위에서 조심스럽게 찢은 흔적이 눈에 띕니다. 그 언젠가 240호에 머문 누군가는 애써서 이 그림을 여기에 붙였을 겁니다. 바다의 이름도, 바다를 선택한 이의 이름도, 그리거나 찍었을 사람의 이름도 모르는. 작자미상의 무제, 빈 텍스트로 가득한 이미지. 이것은 이름 모를 당신의 희망이었을까요. 그저 우연히 손에 잡힌, 눈에 걸린 그림일 뿐인가요.
5.
흐릿한 시야에도 풍경이 밟힐 때마다 나는 자리를 잃고 캐리어에 있을 내 그림들을 떠올립니다. 어째서인지 그림을 샀던 곳은 다시 갈 수 없던 얄궂은 우연도 더불어 떠오르네요. 당신은 여길 벗어나 저곳에 한 번쯤 닿았을까요. 아니면 이 방에 머물던 다른 이들이 저곳을 찾아갔을까요.
6.
나는 오늘 초점을 맞추기 위해 그림에 바짝 붙어서 살펴봤습니다. 가까이 본 바다는 조악한 그림이었습니다. 화질 낮은 사진처럼 보이기도 했어요. 주제가 명확하지 않은 아마추어의 그림 같기도 해요. 기억 같은 사진이든, 추억이 될 그림이든 사실 당신에게 중요하지 않았겠죠. 당신은 그저 온통 흰색뿐인 곳에서 바다를 그리워했을 겁니다. 손가락만 한 틈으로 불어오는 바람이 파도 소리처럼 들렸을까요.
7.
그래서 나도 240호에 걸린 바다를 매일 바라봅니다. 일주일 전 물에서 건져져 이곳에 온 주제에 이름 모를 바다를 상상하는 환자입니다. 그리고선 흰 벽에 붙은 당신의 바다를 사진으로 찍었습니다. 이로써 240호에서 본 당신의 바다는 추억이 아닌 기억이 될 참입니다.
그래요 우리, 그저 이곳을 사진으로, 기억으로만 남깁시다. 언젠가 이름 모를 그 바다에 서면 그때 추억으로 되새기길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