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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뒤셀도르퍼 Aug 21. 2016

워홀러의 추억_ 한국인

(Feat. 뒤통수가 아릿)

어릴 때부터 사람을 잘 믿는 타입이었다. 그래서 배신을 당한 적도, 상처를 받는 적도 있지만 이윽고 '이 사람은 다를 것'이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운이 좋았던 것인지, 아직 세상은 따뜻한 것인지 사람과 세상을 적으로 두고 살만큼 크게 당한 적은 없었다. 낯선 사람에 대한 경계심은 있어서겠지. 그리고 돈이 무서웠던 것도 큰 몫을 했을 테다. 덕분에 한국에서도 길을 걷다 조상신의 안부를 묻는 사람은 많았지만 한 번도 당한 적은 없었으니까. 다만 돈 나가는 것을 무서워하는 만큼 돈 들어오는 곳은 일단 듣고 본다. 베를린에서 나의 뒤통수를 아릿하게 만든 장본인도 돈과 믿음 아닐까. 


같은 학원에 다니는 한국인 동생으로부터 '애국가만 부르면 되는 알바가 있다'라고 전해 들었다. 한국인으로 살아오며 애국가를 못 부르는 사람이 있을까. 조금 의아했지만 일단 지원했다. 메일이 왔고, 그들은 '안익태 재단'이며 오는 9월 작곡가 안익태를 기념하는 공연을 열 것이라 했다. 전공과 경력은 무관했다. 어딘가 이상했지만 일주일에 한 번, 1~2시간만 연습하면 된다는 말에 솔깃했다. 


첫 연습. 고등학교를 다니며 3년간 합창 동아리에 있었고, 두 번이나 합창 대회에 나갔지만 사실 음악에 조예가 깊은 편은 아니다. 음정도 소리의 힘도 부족해 입만 뻥긋하는 것이 주임무였으니까. 걱정과 기대로 뒤섞인 채 도착한 연습실은 베를린 외곽에 위치한 성당이었다. 한인 교회에 소문이 났었는지 이곳저곳에서 수다가 벌어졌다. 내가 맡은 파트는 알토. 비 전공자의 눈에는 그저 음이 올라가지 않는 여자 파트였다. 


양 옆에 선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니 전공이 제각각, 상태도 제각각이었다. 모두 다른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사실은 그저 우리가 애국가를 부를 것이라는 가벼운 사실뿐이었다. 지휘자와 반주자가 들어오고 간단한 설명과 함께 악보를 나눠줬다. 애국가와 코리아 판타지, 아리랑. 고작 몇 그램일 그 악보가 무겁게 느껴졌다. 비전공생을 지휘하는 그분은 꽤나 심각했다. 한마디도 제대로 넘어가기 어려운 상태. 발성도 제대로 되지 않아 상대적으로 사람이 많은 파트가 곡을 지배했다. 그리고 나는 그 곡을 읽어나갈 수가 없었다.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으니까. 


함께 학원을 다니는 친구에게 후기를 전하니 '안익태는 친일을 한 작곡가'라고 설명했다. 고민을 했지만 주최 측에 폐를 끼치고 싶진 않았다. 아마 이것도 결국은 핑계였겠지만. 틈틈이 연습한 곡을 들으며 혼자 연습했고, 4주간 일요일마다 연습에 참가하며 사람들과도 가까워졌다. 연습 시간마다 지휘자에게 전공생이 더 필요하다며 요구하기도 했으나 연습에 참가하는 사람은 언제나 똑같았다. 


공연을 앞두고 독일에서도 유명한 도이치 오퍼(Deutsch Oper)에서 오케스트라와 연습을 했다. 비전공생 95%, 전공생 5%로 이뤄진 합창단의 소리가 오케스트라를 이길리 만무했다. 합창단의 소리는 차치하고 내가 내는 내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좌절의 순간이었다. 아마 주최 측도 이를 파악했으리라. 안익태 재단을 이끌고, 이 공연을 위해 투자했다는 한인은 우리에게 실망스러움을 감추지 않았다. 더 많은 연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공연 전날, 연습실에 방문했을 때 완전히 새로운 사람들도 가득 차 있었다. 급하게 모은 성악 전공자들이라고 했다. 함께 연습한 무리에게 이야기를 들어보니 페이도 훨씬 많았고, 연습 시간은 단 하루 1시간뿐이었다. 그들과 함께 했을 때 우리가 더 이상 필요 없음을 깨달았다. 적극적인 분들이 나서 부당함을 제기했다. 4주간 성실히 연습에 참여했는데 어째서 그들과 우리의 페이가 크게 차이 나는지. 억울함은 길었으나 그들의 대답은 간결했다. '그러니까 그렇게 못하라고 했나. 부당하면 나가라' 


이 외에도 여러 모욕을 당했으니 결국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원했던 것은 저렴한 가격에 높은 품질이었을 테다. 4주간 교통비를 지불하며 연습을 했던 나에게 이 상황은 마이너스였다. 그래도 자존심은, 사람들과의 연대감은 페이로 책정된 100유로를 초월했다. 억울했지만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지배했다. 재단에 대한, 안익태에 대한 찝찝함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이 내게 남았기 때문이었다. 


유럽에서 공부하고 터 잡은 사람들이 입버릇처럼 말한 말이 떠올랐다. '한국 사람을 조심하라'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아 그들을 믿었다. 상황이 닥쳤을 때 그 조언, 충고가 아릿한 뒤통수를 스쳐갔다. 잠시나마 내가 가진 믿음을 의심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나는 아직도 사람과 세상을 믿는다. 약간의 경계심이 생겼지만 이는 비단 한국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조금 조심할 뿐 난 여전히 사람을 믿는다. 단 하나의 가능성 때문에 더 많은 것을 잃고 싶지 않기 때문. 아릿한 뒤통수를 부여잡고 있을 때 내 곁에 있어준, 나를 위로해준, 나를 믿어준 사람 역시 베를린에서 함께 공부하는 한국 사람들이었다. 상처를, 아픔을 이겨낼 수 있는 것은 증오나 혐오, 불신이 아닌 또 다른 믿음, 따뜻함, 신뢰라고 생각한다. 


'한국 사람을 믿지 말라', '한국 사람을 조심해라' 쉽게 들을 수 있는 말이지만 그 말을 결코 강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한다. 누군가에게 나 역시 한국 사람이니까. 선량하되 경계를 쉽게 허물진 말 것. 이 사건을 통해 내가 세운 철칙이자 배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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