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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뒤셀도르퍼 Aug 02. 2016

워홀러의 추억_ 언어

(Feat. 이히 리베 디히의 나라)

내 인생 첫 독일어는 한국에서 보통교육을 받은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이히 리베 디히'에서 시작했다. 사실 그 가곡도 전부 외우지 못한 채 가창 시험을 봤고, 덕분에 그 곡을 마저 다 부르지 못한 기억. 인문학 공부에 빠져들며 번역서 곳곳에 읽을 수도 없는 독일 단어가 두 번째 기억. 그리고 대학교 1학년, 교양 수업 내내 독문학과 학생들에게 밀리자 교수에게 '이건 불공정한 일'임을 알리고, 중간고사 때 열심히 외운 독일 시 한 편을 써서 낸 것이 세 번째 기억이다. 


스무 살, 독일에서 5개월 간 영어로 독일어를, 독일어를 독일어로 배웠다. 하지만 한국에 돌아와 학문으로, 시험 수단으로 배우며 나의 독일어는 독일과 한국 사이 어딘가(아마 터키 정도의 위치 아닐까)에 자리 잡게 됐다. 명색에 독일 워홀러로 왔는데 계속 엄한 나라에서만 일했던 것이 아깝고, 다시 스무 살처럼 공부해보고 싶어 학원을 등록했다. 그리고 부전공 딱지가 부끄럽게도 A2 반에 입성했다. 


학원은 3개월을 다녔고, 그중 1개월은 미약한 독일어를 쓸 수 있는 식당에서 일을 했다. 물론 한인 식당이었지만 손님은 30%의 독일인, 40%의 한국인, 30%의 외국인으로 이뤄졌기에 한국 손님을 받을 때가 아니면 독일어를 사용해야 했다. 언어는 장벽이었다. 아무리 학원에서 열심히 배워도 식당 종업원이 사용할 말은 아니었으니까. 오히려 그곳 손님들에게 더 많이 배웠다. 


Kein Problem, ich kann auch Koreanisch nicht sprechen

상관없어, 나도 한국어를 할 수 없어.


내가 종종 더듬거나, 몇 번이고 말을 되물었을 때. 좀처럼 붉어지지 않는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리고 항상 미안하다는 말을 전했다. 한국에서 아르바이트생인 나는 '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를 달고 살았으니까. 하지만 이 식당에서 일하는 나는 아주 자주 저런 대답을 받았다. 


가끔은 독일인들이 마치 짠 듯이 저런 대답을 하는 것에 신기해서 정규 교육으로 배우는 것인가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여행 중에도, 실생활에서도, 일할 때도 외국인인 나에게 그들은 저렇게 답했다. 말은 마법과 같아서 대답을 듣고 나니 한결 편하게 말할 수 있었고, 실수가 있어도 부끄럽지 않았다. 그래서 언어 교환을 하고 있는 친구가 '미안해요. 내 한국어가 좋지 않아요'라고 했을 때, '괜찮아, 내가 하는 독일어도 좋지 않아'라고 대답했다. 

 

나는 종종 언어를 배우면서 언어를 사용하면서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이 어디에서 비롯됐는지 고민한다. 누군가 윽박을 지르며 강요한 것은 아닌데 언젠가부터 문법에 맞지 않으면 '틀린' 것이라 생각했다. 틀릴 것이 두려워 더 많은 긴장을 했고, 외국인으로서의 나는 말수가 적고, 주로 긍정만 하는 사람이 돼있었다. 내가 마주한 수많은 독일인들은 내게 서툴러도, 틀려도 괜찮다고 했다(물론 공적인 일은 주의를 해야 하지만). 서로 친구가 되는 과정에 중요한 것은 완벽한 문법이나 문장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저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경험을 했는지 궁금했으니까. 


여전히 98%가 부족한 독일어를 구사하면서도 자신감을 잃지 않고 계속해서 나아갈 수 있는 이유는 여기에 있을지도 모른다. 기다리고 이해하는 상대. 언어에 있어서 이보다 중요한 것이 있을까. 워홀러 기간에 얻은 값진 생각 덕분에 나는 아직도 독일어를 배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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