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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뒤셀도르퍼 Mar 31. 2017

워홀러의 추억_ 아르바이트

한인 식당에서의 시간들

큰 도시에는 확실히 일자리가 많다. 문제는 일자리보다 많은 지원자. 베를린도 다를 것 없었다.

독일인과 경쟁하기엔 턱 없이 부족한 실력이기에 아르바이트 자리를 알아보는 것도 제한이 많았다. 온라인으로 서류를 보내거나 연락을 취해봤지만 자리는 쉬이 나지 않았다. 살짝 포기하고 '홀리데이'에 치중하자고 생각했을 때, 학원 친구로부터 일자리를 구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곳은 바로 한인 식당. 


당장 일을 하고 싶었지만, 한인 식당은 가장 기피하는 대상이었다. 일단 어떤 것도 보장되지 않은 블랙 잡이었고, 소문에 의하면 일하는 환경이 한국과 같거나 더욱 나쁘다고 했기 때문이다. 이미 한국에서 갖은 알바로 잔뼈가 굵은 나로선, '굳이 독일에서까지..'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장 잔고는 한인 식당으로 향하게 됐다. 면접 전 친구에게 간단한 설명을 들었다.

언어 자격에 제한이 없다. 고로 단순 노동 혹은 최저 시급 이하일 가능성이 높았다.

5시간에 40유로. 2015년 기준 독일 최저 시급(Mindestlohn)은 8.50유로였으니 2.50유로를 덜 받는 셈이었다. 2017년 현재 독일 최저 시급은 8.84유로다. (출처 http://www.mindest-lohn.org/)

팁은 가져갈 수 없음. 내가 팁을 받을 수 있을 생각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 생각 없었다.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제안을 덥석 물었다. 


그리고 대망의 첫 출근.

하나하나 배워가는 과정이 나쁘지 않았다. 평일이었기에 붐비지 않았고, 일 눈치가 없지 않아 금세 일에 적응할 수 있었다. 문제는 주방과의 소통이었는데, 주방의 공식 언어는 중국어. '니하오마'의 성조도 잘 모르는 내가 뭔가 잘 될 리 없었다. 하지만 만국 공통 언어인 손짓 발짓 미소를 활용해 최선을 다했다. 첫 교육을 나쁘지 않게 마치고 내가 배정된 곳은 독일인이나 여행자들이 즐겨 찾는 분점이었다. 


새로운 곳에서의 첫날, 그리고 잘림 위기

일 시작 전, 불고기가 가득 담긴 그릴을 주면서 손님이 오기 전에 식사를 하라고 했다. 일부 한인 식당에서는 잠시 앉아 있는 것조차 용납되지 않는다는 소문을 들어왔던 터라 사실 좀 감격스러웠다. 감격스러움도 잠시, 손님이 아닌 이상 여유롭게 먹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함께 일할 분과 폭풍 식사를 한 후 바로 손님을 맞고, 서빙을 시작했다. 

함께 일한 분은 이곳에서 일한 지 이미 한 달 정도 됐는데, 워낙 아르바이트생이 빠르게 들어오고 나가는 곳이라 한 달만 해도 굉장해 보였다. 초반에는 차근차근 알려주며 일을 진행했는데, 어느 순간 편해졌는지 내게 잡담을 건넸다. 그냥 밉보이는 것보단 나으니, 열심히 대답해주고, 동시에 일도 열심히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사장 입장에선 '신입 조무래기'가 시답잖게 일하면서 수다까지 떠는 모습이 보기 좋았을 리가 없다. 덕분에 일 마치고 일당을 받은 후 보통은 언제 또 오라고 말을 해주는데 그게 없었다. 제대로 일한 지 하루 만에 잘리는 것인가 싶었다. 


패자부활전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아 면접을 봤던 총괄 책임자로부터 연락이 왔다. 교육을 받았던 곳으로 와서 일하라고. 사실상 분점에서는 나를 본지 하루 만에 마음에 들지 않아 거부한 것이다. 하지만 면접과 교육 때 열심히 하는 것을 눈여겨 보신 그분은 나를 불렀다. 그리고 그곳에서 본격적인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게 된다. 


5분 대기조

베를린 한인 식당에는 일주일 주기로 파트가 나뉘고, 일정한 시간에 일을 하게 돼있다. 하지만 예기치 못하게 펑크가 나는 상황이 있다. 이때는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은 조무래기나 과거에 일했고 그만뒀지만 친분으로 종종 시간을 낼 수 있는 사람이 메꾸게 된다. 특별히 시험도 없고, 오전 학원만 다니면 되는 조무래기+백수인 나는 가장 자주 불려 나갈 수 있는 사람이었다. 덕분에 장시간 근무를 하기도 했는데, 문제는 그런 일이 잦아지자 5분 대기조가 된 느낌이었다.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다가도 불려 가고, 약속을 취소하고 나가야 하는 경우도 생겼다. 그래도 주머니는 늘 두둑했다. 


살이 찐다. 팡팡팡

밥을 주지 않을까 봐 걱정했던 것은 기우였다. 일 시작 전 주방 식구들과 다 함께 식사를 하고, 일을 마치면 또 다 함께 식사를 했다. 한인 식당임에도 중국 음식이 대부분이었지만 '진심' 맛있었다. 중국 전통 음식을 독일에서 먹다니 신기하고도 재미있는 체험이었다. 주방 분들은 매우 친절하고 순박한 분들이라 금세 친근해졌는데 퇴근할 때면 김치를 싸주기도, 주문이 취소된 음식을 따로 포장해주시기도 했다. 덕분에 집에서 음식 할 일은 점점 줄었고, 그럼에도 살은 팡팡 찌기 시작했다. 


기숙사의 아기 새들

아르바이트를 마칠 때마다 음식을 싸들고 오자 어째서인지 나를 기다리는 친구들이 생겼다. 아기 새처럼 내 손의 비닐봉지를 탈취하며 오늘 메뉴는 무엇이냐 묻곤 했는데, 그 아기 새들은 가끔씩 술 셔틀을 시키기도 해서 호구를 자처한 것은 아닌가 심각하게 고민했다. 


술 때문에 일하러 가는 것일지도..

라는 추측을 할 만큼 퇴근 후 술자리가 잦았다. 물론 클로징 파트에 아주 오래 일하고, 술을 즐기며, 모두와 친한 분이 있을 때만 가능하긴 했다. 초면에 소주를 권하시기에 아주 오랫동안 마시지 못해 그리워했던 소주를 보자마자 콜을 외치고 자정이 넘도록 마셨다. 다음에도 또 그다음에도. 참고로 그 한 병에 8유로 정도로 판매했고, 실제 한인 마트에서도 한 병에 3유로 대였다. 너무 신명 나게 마신 나머지 나중엔 조절해야 했으나 그 시간은 참으로 즐거웠다. 소주를 양껏 마시고 한 손에 메로나, 한 손에 음식을 들고 집으로 가는 날이 잦아졌다. 


기억해주는 손님들

베를린에 거주한 기간이 총 4개월이었고, 그중 한인 식당에 일한 시간은 2개월 정도였는데.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음에도 나를 기억해주는 손님들이 제법 있었다. 점심때마다 메로나를 사러 오는 인근 직장인 무리가 그랬고, 종종 저녁을 먹으러 오는 아시아 학생 무리도 그랬다. 한 번은 머리를 자르고 일하러 간 적이 있는데, 짧은 머리가 잘 어울린다며 기억해준 고마운 손님도 있었다. 팁은 사실상 모두 개인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계산 시에 추가로 계산하는 돈은 받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아는 손님은 내 손에, 내 앞 주머니에 따로 챙겨주기도 했다. 그래 봐야 2~5유로 사이지만 괜스레 찡한 그런 게 있다. 



독일 내 한국인의 아주 오래된 소식통인 '베를린 리포트'나 최근 급부상하고 있는 페이스북의 '독일 유학생 네트워크' 내에서 한인 식당 아르바이트에 대한 이야기는 여전하다. 피해를 주고, 피해를 받고, 상처를 주고받는다. 사실 내가 일했던 곳은 우리가 쉬이 말하는 연변 사람이 주인인 곳이다. 술을 많이 마시면서 들을 수 있던 이야기지만, 그들은 한국에서 아주 오랫동안 일했다. 한국인 주인들은 밥상도 따로 가졌고, 그들이 먹는 것과 다르게 형편없는 반찬과 밥을 받았다고 한다. 월급을 밀리는 경우도 있었고, 떼여 먹은 적도 많다고. 그래서 본인은 밥과 돈은 확실하게 해주고 싶었다고. 나는 그 마음이 고마웠다. 그가 복수의 마음을 가졌다면, 증오의 마음으로 우리에게 똑같이 그렇게 대했다면 어땠을까. 

이곳을 이후로 한인 식당을 경험하지 않았기에 정확히 어떠한지는 모른다. 간접 경험에 의하면 한인 식당은 '음식 가격은 독일, 직원 대우와 시급은 한국'이라고 평하는 경우를 보기도 했다. 그런 사례를 접할 때마다 안타깝다. 부디 직원 대우와 시급도 독일 다워지길 바랄 뿐. 독일에서 작은 일자리를 구하는 한국 청년 모두가 잘 되길 바라며! Viel Erf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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