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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ei Sarang Sep 04. 2019

장애인의 엘리베이터 투쟁을 응원합니다.

광화문의 변화

이제 세상을 디자인하고 설계할 때는 우리를 배제하지 말고 처음부터 포함시켜라, 그 시작이 지하철 엘리베이터.

96년도에 만들어진 광화문역에 장애인단체의 투쟁으로 23년만에 엘리베이터가 생겼다고 한다. 서울의 대표적인 중심지인 광화문에 이제야 엘리베이터가 생겼다는 사실에 처음 놀랐고, 곧 서울시에서 역마다 장애인을 위한 시설을 확충하겠다는 것에 기뻤다. 사실 지하철을 이용할 때마다 장애인을 위한 계단 옆에 매달려 있는 리프트를 보면서 늘 아슬아슬함을 느껴왔었다. 호출벨을 누르면 공익 요원이 와서 리프트를 내려서 그 위에 태워주고 다시 접어야 하는것이 수고로워 보였고 휠체어를 탄 채 외출은 참 어렵고 눈치 보일 것 같았다. 내 자신이 건강할때는 그 필요성을 못 느끼지만 피치못해 다리를 다쳤을 때, 또 임신을 해서 계단을 오르는 게 힘들 때 전철역에서 엘리베이터를 찾았지만 의외로 쉽게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 기사를 보았을 때 그들의 불편함이 얼마나 공감되었고, 또 투쟁을 하여 성취하였다는 것이 어찌나 존경스럽던지. 또 속으로 불편하다고만 생각했지 내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아무액션도 취하지 않았던 게 미안하기도 했다. 




가끔 뉴스를 보면 특수학교가 어느 지역에 들어온다고 하면 반대시위를 하는 장면들이 나온다. 집값을 이유로, 아이들 교육을 이유로 등등 여러가지 사람들만의 사정이 있다. 이쪽의 입장도 이해가 가고 저쪽의 입장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한가지 분명한 점은 세상 살면서 무엇이든 절대값은 없다는 것. 나의 입장과 미래가 어떻게 바뀔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다같이 더불어 살자는 그런 보편적인 가치가 나온 것이 아닐까. 


작은 예로 아주 옛날엔 정신병을 요즘 우리가 보는듯한 장애로 구분 짓지 않았다고 한다. 광인도 사람들과 자연스레 섞여 살았으며 그저 그 사람의 특징 정도로 여겼다고. 의외로 장애, 비장애를 심하게 구분짓는 현상은 현대에 와서 심해졌다고 한다. 실제로 요즘 조현병 범죄에 대해서 강력 보도를 하고 병원에 가야하는 나쁜사람? 쯤으로 여기니 더욱 차별과 구분 짓기가 심해지는 것 같다. 그치만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니 조금 생김새가 다르고, 조금 생각이 다르더라도 더불어 살아가고 싶다. 




내가 아는 장애를 가진 여성분이 생각났다. 아침마다 지하철 표 투입구에 손이 간신히 닿을 정도로 키가 작지만 몸을 최대한 올려 까치발을 하고 카드를 찍고, 계단을 이용하기는 힘드니 본인이 발견한 최대한 빠른 동선으로 엘리베이터 앞까지 순식간에 도달한다. 그렇게 작은 본인의 동선을 만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야했다. 만약에 그 동선 속에 엘리베이터가 없거나 협소해서 사용하기 힘들다면 얼마나 안타까울지. 그래서 이번 광화문 투쟁에 대한 기사를 보며 그들의 성취감이 나의 성취감 같은 쾌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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