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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홍윤 Jan 14. 2022

카타콤베의 벽화

초기 그리스도교 미술의 탄생

                                             

카타콤베 벽화


 그리스도교 미술의 탄생은 처음 그리스도교 자체의 성립보다 상당히 늦게 형성되었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그리스도교 전신인 유태교가 우상숭배(偶像崇拜)를 금지하고 있어 성자(聖者)의 예술적 표현이 저지되었기 때문이며, 또 하나의 이유는 새로 일어 난 그리스도교에 대한 역대 로마 황제의 박해로 공공연히 활동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박해는 1세기 초 네로(Nero) 황제로부터 시작되어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  황제에 의해 그리스도교 관용령이 공포(313)되기 까지 약 300년간 계속되었다.

그러나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은 로마 관헌들의 탄압의 눈길을 피하여 카타콤베 (Catacombae; 지 묘소로 잠복하게 되었고, 그들은 이곳을 종교활동의 예배실로 삼고 신앙생활을 펴 나갔다. 또 이런 박해 가운데서도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갈구하는 신도의 수는 날로 증가해 갔다. 이때 신도들의 ‘신앙’과 ‘희망’이 심령으로부터 우러나와 그림의 형태를 취하게 된 것인데,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교 미술의 기원이다. 그러므로 초기 그리스도교 미술은 카타콤베의 벽화에서 그 모습을 찾을 수 있다.


 

<선한 목자>의 벽화는 3세기경 로마 프리시라의 카타콤베 내 붸라다가 묘실의 천 정 중앙에 그려진 것으로 그리스도교 미술을 주제로 표현한 최고(最古)의 도상(圖像)의 하나이다.  


 화면은 목자를 중심으로 좌우 대칭하여 양과 새, 그리고 나뭇잎이 장식적으로 표현되고 있으며, 중앙의 목자는 번제를 드리기 위해 마련한 것 같은 어린양 한 마리를 목에 걸머지고 축복의 손길을 펴는, 선하고 자연스러운 모습과 그 시선에서 우리는 초대 교인들의 소박하고 진실된 신앙심을 엿볼 수 있을 것 같다.


 여기에 표상된 신도들의 신앙심은 그 이후 그리스도교 미술에 방향을 제시해 주었고 특히 상징성과 성상화(聖像畵)의 발전을 갖게 하였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닌다.  현존하고 있는 최고(最古)의 그리스도교 벽화는, 동방의 도라에로프스를 제외하면, 로마 주변에서 발견된 2-5세기 경에 만들어진 카타콤베의 벽화를 들 수 있다. 주로 로마 남북의 교외에 집중되어 있어 군(群)을 이루고 있는 이들 카타콤베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남쪽의 도미틸라, 상 칼리투스 등이고 1955년 발견하여 1962년에 공표 (公表)한 붸아 라테나의 새로운 카타콤베가 있다.


 카타콤베의 벽화 장식은 초기의 것에 많으나, 그 그려진 장소는 몇 군데로 한정되어 있다. 그 장소는 묘실의 천정이나 사자(死者)를 안치하기 위한 벽감(壁龕)의 내부가 대부분인 것이다.

 그리고 이 초기의 벽화는 헬레니즘 미술의 전통을 이어받아 성상이나 성서의 내용자체가 아닌 상징을 통한 표현이 행하여졌다. 자기들의 예배 장소를 아름답게 장식하고, 마음의 평안을 얻으려는 가장 소박한 이유에서 기하학적인 장식의 포도잎, 새, 동물, 정원에서 놀고 있는 어린이들을 묘사하는 등 세속적인 것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점차 이러한 주제에 그리스도교의 신앙적인 의미를 부여하여 단순한 장식도 하나의 상징을 나타내게 되었다. 흔히 쓰는 상징적인 도양(圖樣)으로서는 그리스도를 목자 ‘나는 선한 목자로라(요 10)’, 포도 문의 ‘나는 포도나무요 너는 가지이니라(요 15)’, 어린양 ‘보라 신의 어린양(사, 요 1)’ 등 성서에서 유래한 것인데, 이외에도 비둘기는 성령을, 불사조는 부활(復活), 그리고 물고기 (그리스어로 ‘신의 아들 예수, 구세주’의 앞글자(頭文字)를 조합하면 물고기의 의미가 된다는 데에서 유래된 것)와 십자가는 그리스도교적 상징으로 자연주의적인 표현에 의해 취급되었다.

이 카타콤베의 미술은 4세기 초 그리스도교가 공인되어 지사에 나온 후에도 5 세기 까지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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