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프랑스와 밀레
장 프랑수아 밀레 (Jean-François Millet, 1814.10.4 ~ 1875. 1.20)는 우리들에게 너무도 잘 알려져 있는 19세기의 위대한 프랑스 농민 화가로 프랑스 바르비종파(Barbizon School)의 창립자들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이삭 줍기, ' '만종, ' '씨 뿌리는 사람' 등 농부들의 일상을 그린 작품으로 유명하며, 사실주의(Realism) 혹은 자연주의(Naturalism) 화가로 불린다.
그는 1814년 10월 4일 프랑스 노르망디의 셰르부르 근처 그림쉬에서 가난한 농민의 8남매 중 둘째이자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외가편 조부 가운데서는 프랑스 대혁명 때 가톨릭의 사제로서 로마 법왕청에 선서를 거부하고 자신의 신앙을 굽히지 않은 사람이 있었다. 이 친척 할아버지와 신앙심 깊은 외할머니, 또 독서가인 다른 친척 할아버지 등이 밀레의 성격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밀레는 소년 시절부터 성경을 애독하였으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할 때는 반드시 경건한 기도를 올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그림에 뜻을 두고 성경의 삽화를 보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으며, 이윽고 농가 주변의 마당, 외양간, 꽃, 논밭이며 벌판을 스케치하였다. 이런 노력이 헛되지 않아 22세 때 파리로 진출하게 되었고 2년간 들라로슈의 아뜰리에에서 배우며, 가끔 루브르에 가서 고전에서 영향을 받으면서 화가로의 꿈을 키울 수 있었다. 그러나 도회 생활에 익숙지 못한 데다 27세 때 연상의 여인 폴리느 빌지니 오노양과 결혼 후 3년 만에 상처하여 실의에 빠지기도 하였다.
그 후 카트리느 르메르 부인과 재혼하여 인생의 새 출발을 시도하였으나 끝없는 빈곤의 연속으로 생활을 위해 본의 아니게 나체화와 풍속화를 그려나갈 수밖에 없었다. 이런 밀레에게 궁핍한 생활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신의 예술이 결정적인 전환을 맞게 된 것은 1849년 파리에서 전염병이 유행하여 아내와 세 아이를 데리고 바르비종이라는 농촌으로 이주하면서부터였다.
생활환경을 바꾼 밀레는 오로지 농민의 생활 속으로 파고들어 땅을 갈고, 씨 뿌리고, 추수하는 농민상을 화폭에 담았다. 여기서 태어난 작품들이 <씨 뿌리는 사람>을 비롯하여 <만종>, <이삭 줍는 여인들>, <양치는 소녀>등의 불멸의 작품들이다. 특히 <양치는 소녀>는 자신의 딸을 모델로 그린 것인데, <송아지의 탄생>이란 작품과 함께 1884년 살롱전에 출품하여 2등 상을 받은 작품이다.
필자가 이 작품을 대할 때 구약성서 시편 23편이 연상되며, 사실적이고 소박한 농촌의 양치는 소녀를 묘사하고 있지만 그 작품 내용에 숨은 화가의 깊은 신앙심을 읽을 수 있다. 또 이 작품에 대해 많은 비평가들이 찬사를 아끼지 않았는데, 그중 외제느 스피레르의 글을 옮겨보면, ‘이 작품 앞에 선 순간 우리의 상상력은 지평의 넓이와 10월 어느 날 오후 5시경의 전원의 고요함, 그리고 하얗고 생생한 빛깔에 물든 구름 낀 하늘에 사로잡힌다. 화면 전면에는 겸허하고도 부드러운 얼굴에 깊고도 맑은 아름다운 눈을 가진 아직 나이 어린 소녀가 뜨개질을 하면서 서있다. 그녀는 아직도 어리기는 하나 엄숙한 몸가짐을 하고 있다. 그녀는 그 고장의 풍경에 젖어 들어 들어 자연의 일부분으로 동화되고 있는 모습이다. 멀리 보이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선 그녀의 모습이 마음속 잔잔한 안도감과 행복감을 일깨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