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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홍윤 May 28. 2022

양치는 소녀

장 프랑스와 밀레

장 프랑수아 밀레 (Jean-François Millet, 1814.10.4 ~ 1875. 1.20)는 우리들에게 너무도 잘 알려져 있는 19세기의 위대한 프랑스 농민 화가로 프랑스 바르비종파(Barbizon School)의 창립자들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이삭 줍기, ' '만종, ' '씨 뿌리는 사람' 등 농부들의 일상을 그린 작품으로 유명하며, 사실주의(Realism) 혹은 자연주의(Naturalism) 화가로 불린다.


그는 1814년 10월 4일 프랑스 노르망디의 셰르부르 근처 그림쉬에서 가난한 농민의 8남매 중 둘째이자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외가편 조부 가운데서는 프랑스 대혁명 때 가톨릭의 사제로서 로마 법왕청에 선서를 거부하고 자신의 신앙을 굽히지 않은 사람이 있었다. 이 친척 할아버지와 신앙심 깊은 외할머니, 또 독서가인 다른 친척 할아버지 등이 밀레의 성격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밀레는 소년 시절부터 성경을 애독하였으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할 때는 반드시 경건한 기도를 올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고 한다.


자화상 (장 프랑수아 밀레 , 1841)

그는 그림에 뜻을 두고 성경의 삽화를 보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으며, 이윽고 농가 주변의 마당, 외양간, 꽃, 논밭이며 벌판을 스케치하였다. 이런 노력이 헛되지 않아 22세 때 파리로 진출하게 되었고 2년간 들라로슈의 아뜰리에에서 배우며, 가끔 루브르에 가서 고전에서 영향을 받으면서 화가로의 꿈을 키울 수 있었다. 그러나 도회 생활에 익숙지 못한 데다 27세 때 연상의 여인 폴리느 빌지니 오노양과 결혼 후 3년 만에 상처하여 실의에 빠지기도 하였다.

그 후 카트리느 르메르 부인과 재혼하여 인생의 새 출발을 시도하였으나 끝없는 빈곤의 연속으로 생활을 위해 본의 아니게 나체화와 풍속화를 그려나갈 수밖에 없었다. 이런 밀레에게 궁핍한 생활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신의 예술이 결정적인 전환을 맞게 된 것은 1849년 파리에서 전염병이 유행하여 아내와 세 아이를 데리고 바르비종이라는 농촌으로 이주하면서부터였다. 


생활환경을 바꾼 밀레는 오로지 농민의 생활 속으로 파고들어 땅을 갈고, 씨 뿌리고, 추수하는 농민상을 화폭에 담았다. 여기서 태어난 작품들이 <씨 뿌리는 사람>을 비롯하여 <만종>, <이삭 줍는 여인들>, <양치는 소녀>등의 불멸의 작품들이다. 특히 <양치는 소녀>는 자신의 딸을 모델로 그린 것인데, <송아지의 탄생>이란 작품과 함께 1884년 살롱전에 출품하여 2등 상을 받은 작품이다.



필자가 이 작품을 대할 때 구약성서 시편 23편이 연상되며, 사실적이고 소박한 농촌의 양치는 소녀를 묘사하고 있지만 그 작품 내용에 숨은 화가의 깊은 신앙심을 읽을 수 있다. 또 이 작품에 대해 많은 비평가들이 찬사를 아끼지 않았는데, 그중 외제느 스피레르의 글을 옮겨보면, ‘이 작품 앞에 선 순간 우리의 상상력은 지평의 넓이와 10월 어느 날 오후 5시경의 전원의 고요함, 그리고 하얗고 생생한 빛깔에 물든 구름 낀 하늘에 사로잡힌다. 화면 전면에는 겸허하고도 부드러운 얼굴에 깊고도 맑은 아름다운 눈을 가진 아직 나이 어린 소녀가 뜨개질을 하면서 서있다. 그녀는 아직도 어리기는 하나 엄숙한 몸가짐을 하고 있다. 그녀는 그 고장의 풍경에 젖어 들어 들어 자연의 일부분으로 동화되고 있는 모습이다. 멀리 보이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선 그녀의 모습이 마음속 잔잔한 안도감과 행복감을 일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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