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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분더카머 Mar 09. 2022

Ep.8 허물만 팀장

'롤모델'을 찾습니다





팀장과 대표는 수년 전 한 회사에서 처음 만났다. 대리와 사원의 관계로. 많이들 그렇듯 쉽지 않은 환경에서 싹트는 전우애가 엄청났나 보다. 일하고 욕하고, 일하고 밥 먹고, 일하고 술 먹고. 가족보다 더 오래 하루의 시간을 함께 있더니 영혼의 파트너로 서로를 생각했을까. 사원이 먼저 퇴직하고, 대리 역시 퇴사 후 몇 번의 이직을 한 뒤 회사를 차렸다. 그 뒤 광고 회사를 떠나 자영업을 하던 지금의 팀장을 데리고 오려고 가게까지 찾아갔다고 한다. 삼국지의 삼고초려, 도원결의 보다 더 끈끈한 감동의 스토리를 그 둘은 무용담처럼 얘기했다. ‘끼리끼리 어울린다'는 말의 무서움을 절실히 느꼈고, 복숭아나무 아래로는 지나가지도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F&B 브랜드 PM으로 1년을 넘기고 다음 해로 넘어가면서 대표는 그 전권을 모두 나에게 쥐여주었다. 던지기 아닌 던지기에 또 속았을 수도. 전권의 책임감은 막중했다. 대표가 PT 하고 그 뒤에서 실무를 맡아하던 이전과 다르게 처음으로 메인 프레젠테이션을 진행했다. 대표와 나의 자리가 바뀌었고, 대표는 가벼운 보충 설명으로 내 의견에 힘을 실어주었다. 책임감은 온전하게 준비과정으로 이어졌다. 장표를 구성하고 어떤 말을 전할지 고심의 고심을 거듭했고, 긴장과 설렘으로 일몰을 보고 또 일출을 보는, 하루의 시작과 끝은 그렇게 뭉뚱그려 흐려졌다.


브랜드 이사, 팀장, 차장, 대리가 자리한 첫 PT는 순조로웠다. 강조하고자 하는 내용과 말에 그들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고, 많은 공감대를 함께 확인하고, 허심탄회하게 문제점과 솔루션의 방향성을 공유했다. ‘고민한 흔적이 역력하게 다 보인다. 좋은 의견을 제시해 주어 고맙다’는 이사의 말에 그동안의 수고로움은 눈 녹듯 녹았다. 대표 역시 수고했다며 이렇게 기획자로 경험을 쌓아가는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처음 PT 제안을 받았을 때 일언지하 거절했다. 이제 2년 차인 내가 어떻게 PT를 하냐며. 아직 모르는 것도 많고 부족하다고 손사래 쳤지만, 그들은 나의 ‘급’성장을 매우 중요시했다. 얼른 성장해 이 회사의 든든한 기둥이 되어주길 대놓고 바랐다. 결국 어차피 해야 할 일이라 마음을 단단히 고쳐먹었다. 막상 해보고 나니 크게 어려운 것도 없었고, 오히려 하길 잘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마치 게임에서처럼 경험치가 쌓여 레벨업이 되는 느낌을 받았으니까.


그에 비해 팀장은 PT를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언제나 대표를 앞세우고 그 뒤에 숨어 눈치껏 일했다. 대표의 영원한 충신으로, 죽으라면 죽는 시늉도 할 것처럼 받들었다. 그 행태는 비단 대표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이어졌다. 담당 PM 자리를 떠넘기더니 나를 앞에 세우고 그는 또 뒤에 숨어버렸다. 지난한 실무는 나에게 맡기고 이슈가 생기거나, 문제가 발생했을 때 마치 히어로물의 주인공처럼 나타났다. 매번 영화같이 등장했으나 그의 일처리는 영화가 아닌 현실이라는 것을 바로 일깨워 줄만큼 아쉬움이 컸다. 이전 회사 선배들에게 헬프를 치고, 결국 대표에게 가타부타 보고하는 방식이 그 일처리의 전부였고, 그에 발에서 나가는 패스는 아무런 의미없는 지치는 공돌리기일 뿐이었다.


그는 매번 힘들고 피곤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고, 그 말은 오롯이 ‘하기 싫다'라는 말로 들렸다. 하기 싫으면 나가야지, 왜 여기서, 이 직급에서 월급만 축내고 있는지 답답함은 해결되지 않았다. 누구나 업에 있어 롤 모델을 찾는다고 생각하고 앞서 간 선배들의 길을 따라가고 싶어 한다. 험난한 길을, 이전에 가보지 않은 길을 먼저 나서기에 선배고 선임일 것이다. 자신이 몸소 겪은 해결책, 노하우를 알려주고 같은 실수를 후배들은 반복하지 않도록 안내해 주는 조력자의 역할. 그래서 월급도 더 많이 받는 것인데, 그가 왜 더 많은 월급을 받는지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애석하게도 나에 모델은 없었다. 팀장은 예선에 오르지도 못했고, 그가 삶을 사는 방식, 업에 대한 태도 어느 하나  배울  없어 슬펐다. 후배들이 도움을 요청할 때면 외장 하드에 쌓인 예전 기획서 파일들만 던져주고 퇴근하는, 너희들이 몸소 부딪히고 겪으면서 성장하라는, 팔짱을 끼고 멀리서 스포츠 경기를 보는 듯한 그런 선배, 그런 팀장과 일하는 것은  인생 시나리오에서   번도 상상해  적이 없었다. 일은 수월해도 사람이 힘들면 그만두고, 일이 어려워도 사람이 좋으면 버텨지는  사회생활이라 하던데 그가  모델에 어느 정도라도 부합해 줬다면, 지금은 무언가 달라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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