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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분더카머 Mar 24. 2022

오늘도 찌그러집니다

잡초 같은 프리랜서의 삶


얼마 전, 프리랜서 카피라이터를 모집하는 공고가 오랜만에 올라왔다. 그동안의 작업물을 가볍게 정리하여 지원했고, 기분 좋게 그들에게 뵙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 회신 한번 오지 않는 지원이 많았기에 한 발자국 전진한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그런 연락에도 가끔은 설렜다.


담당자와 전화 통화를 했다. 회사 다니던 때 이골이 날 정도로 연락과 의사소통을 했기 때문일까? 말을 꺼내는 순서에서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쉽게 캐치할 수 있었다.


첫째로, TVC 카피라이팅 경험이 있고, 보내준 포트폴리오가 마음에 들었다는 말을 하며, 제약 바이오 회사의 카피라이팅건을 진행하고자 한다는 것을 알렸다.

둘째로, 납기 일정이 타이트 한데 짧은 시간 동안 작업을 진행할 수 있는지를 물었다. 얼마나 뭉개고 있었을까, 대체로 프리 건은 모든 작업 일정이 타이트 한 편이다. 일주일도 안되는 시간을 오롯이 투자해야겠다 생각하며 가능하다 일렀다.

셋째로, 작가 선정에 앞서 먼저 대면으로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했다. 납기가 타이트하다면서 면접 아닌 면접을 보겠다? 내가 보여주고 말할 것은 이미 모두 지원서에 담았는데 무슨 이야기를? 그리고 그들은 해결해야 하는 과제가 담긴 내용을 보내준다고 했다. 그것에 대해 간략하게나마 생각을 듣고 싶다며. 카피라이팅을 해야 하는 건에 생각을 듣고 싶다는 건 곧 아이디어의 단초라도 가져오라는 소리로 들리는데, 하기로 확정되지 않은 건에 왜 그렇게 해야 하지?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자초지종을 물었더니, 그전에 하던 작가분이 부득이하게 하차했다는 동문서답이 따라왔다.

상황이 무안해졌는지 그들은 네 번째로 페이를 얘기하며 그 상황을 무마했다. 총 3-4개의 안을 제안하는 것에 그나마 페이는 합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대로 알지 못해, 반대로 너무도 잘 알아 말 같지 않은 페이를 제안하던 사람들은 수두룩했으니까.


과정의 수고로움, 머리를 짜내는 고된 노동에 비해 내가 책정한 최저페이도 만족하지 않는 건들은 허다했고, 그런 공고를 한참이나 허탈하게 보기도 했었다. 얼마를 받고 일해야 적합할까?라는 질문은 항상 머릿속에 떠다녔다. 문제는 그런 얼토당토않는 페이에도 지원하는 자가 있고, 작업하는 자가 있다는 것이다. 페이가 적다고 툴툴거리면서도 자기 발로 그 속으로 들어간다. 나는 그렇게는 못하겠고, 안 한다. 아직 배가 덜 고팠을 수도, 아니 배가 고파 굶주려도 그렇게는 안 하련다.


회사가 이번 건 이외에도 다른 작업들도 하고 있기에 한 번은 보고 싶다 말하여서, 연이 될 수 있겠다 싶어서, 좋은 시작이 될 수도 있는 만남을 굳이 걷어찰 필요는 없는 것 같아서 미팅을 하기로 했다. 일정을 맞추고 제약회사 브랜딩 광고 아이데이션을 했다. 백신을 개발하는 회사이고 사회적 기업의 가치를 녹이고 싶다는 그들의 전달사항은 잘 정리된 문서가 아닌, 카톡 메시지로 스크롤을 한참 내려야 할 정도로 길게 나열되어 나에게 넘어왔다. 그 정보를 드래그하고 복사, 붙여넣기 하여 노션 작업 페이지로 옮기는 딱 그 순간부터 마음을 먹었다. ‘대충해서 넘겨야겠다'라고. ‘다음번에는 소정의 금액이라도 요구해야겠다'라고. 생각을 보여줘야 하는 단계인 것은 알지만 시작하기도 전에 마음은 이상하게 떠버렸다. 또 누군가는 이 단계부터 열과 성을 다할 수도 있겠다 느꼈다. 나의 반골 기질은 어김없이 여기서부터 나오기 시작했다.


브랜드에 필요한 메시지의 방향성을 정하고 몇 개의 단초를 추려 안으로 디벨롭했다. 줄글만 써대던 그들과는 다르게 안을 설명해야 하니 그 과정을 잘 정리해서 PPT에 담아냈다. 무엇보다 내가 그런 사람은 되지 않기 위해서. 작업을 들어가기 전에 집중을 못 하고 고민하는 시간이 길었지만, 임하자마자 애초에 대충 해야겠다는 생각은 온데간데없이 아이데이션에 집중했다. 간단해 보였지만 어려웠고, 그 어려움을 헤쳐나가며 카피를 쓰는 게 또 재미있었다. 필요한 메시지는 명확했는데, 너무 노멀하게 보이기도 쉬울 것 같아 표현에 많은 공을 들였다. 그 과정을 진행하며 내가 얼마나 부족한지 절실히 느꼈다. 아직도 보고, 배우고, 느껴야 할게 많고 그것을 정리해서 써 내는, 압축하여 전달하는 스킬을 연마해야겠다는 생각을 나만의 과제로 머릿속에 각인시켰다.


주어진 이틀의 시간 동안 정리한 내용으로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중에 안 사실은 여러 명의 지원자가 나와 같은 과정을 거쳤다는 것이다. 이틀 동안 시간을 두고 몇몇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생각이 들었다. PD 격으로 보이는 담당자는 만나자마자 키가 몇이냐며, 외모와 스타일에 대해서 꽤 오래 말했다. 내가 지금 모델 오디션을 보러 온 건가 착각할 정도로. 여성 지원자가 왔다면 무슨 말을 했으려나. 분위기를 풀기 위한, 아이스브레이킹을 하기 위한 말이라고 했다 쳐도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그건 아니지 않나 싶었다. 일을 하고 싶어 온 사람에게 외모 이야기라니...


전혀 풀리지 않은 분위기 속에서 본격적으로 아이디어를 풀어냈다. 하나하나 조목조목 잘 따라오게 설명하고 있는데, 감독이라는 작자는 듣는 둥 마는 둥 하다, 목을 길게 빼서 내 모니터를 힐끗힐끗 쳐다봤고 그게 그의 리액션의 시작과 끝이었다. 일을 같이 진행할 수도 있는 관계라지만, 일말의 말도 질문도 없는 그의 태도에 조금 빡이 쳤다. 기업 대표도 그렇게는 행동하지 않으리라. 그 상황이 무안했는지 담당자는 또 쓸데없는 주제로 급발진하며 대화를 억지로 이끌었다. 사는 곳은 어디? (붙잡아두고 일 시키려고?), 자영업은 왜 하셨는지? (알아서 뭐 하시게요?), 운동을 하셨는지?(축구팀 소개해 주시게요?), 눈 딱 감고 억지로 끌려가 주었다. 그게 편할 것 같아서. 다른 작업이나 주로 하는 외주 업무 등을 물어보긴 했으나 업무에 관계없는 말들로 인해 묻혀버리고 말았다. 2~30분 정도 대화 끝에 나는 알아챘다. 그들이 이번 건으로 나를 불렀다기보다는 앞으로 있을 다른 건에 쓰임이 있을만한 사람인지 보는 것에 더 중점을 두었다는 것을. 아이디어 안에 별말이 없고, 두 명의 말고 태도가 그 방향을 정확히 가리키고 있었다. 그게 그들의 답이었다면, 나도 내 답을 내려야지. 그들이 준 명함을 가지고 쓰레기통 앞에서 서성거리며 내가 지킬 선을 어느 정도 정리했다.


오랜만에 재밌는 경험을 복기하며 4가지를 정리하며 글을 마친다.

이날도 역시 내 삶의 명장면으로 남았고, 실패라면 실패고, 성공이라면 성공이라 말하겠다. 그리고 일희일비하지 않기로 했다. 그것이 큰 것이건, 작은 것이건 간에.


1. 세상 공부, 카피라이팅 공부를 더 하고, 게을리하지 말 것.

2. 하는 일의 범위에 있어서 명확한 선 긋기와 그에 합당한 요구를 할 것.

3. 하기 싫은 억지로 하지 말 것. 그 에너지를 좋아하는 일에 오롯이 쏟아부을 것.

4. 신뢰를 주고 세련된 대화를 하고, 좋은 태도가 몸에 밴 사람이 될 것. 생각하고 말하고, 생각하며 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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