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목적인 그리움에 빠지다.
사랑이란 동시성을 잃고 시간 밖에서 생각하면 늘 그렇듯이 의심스러운 거요. 그건 어느 시기에 두 사람의 발이 한데 묶였던 어떤 사건일 뿐인지도 몰라. 발이 풀리고 난 뒤에 생각하면 그런 공속은 아무런 실제성도 없어요. 에테르처럼 증발되어 버리지. 두 사람이 사랑했는데도 추억 속엔 자신밖에 없어. 자신조차도 어딘가 변형되고 과장되어 있어. 서글픈 모노드라마지.
- 전경린 <유리로 만든 배> 中
누군가를 믿지 않으려 노력했다. 한두 번도 아니고, 자꾸만 상처를 받는 내가 한심해서. 이제는 우는 것도 지겹다. 눈물이 나려는데 마음이 약해지는 걸 들키는 게 싫어서 참아보려고 애쓰다가 결국에는 터져버렸다. 이렇게 울 것 같았으면 차라리 예쁘게 우는 방법이나 연습해둘걸. 드라마에서는 여자 주인공들이 참 예쁘게도 울던데. 어쩌면 나는 K와의 이별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걸까.
나는 너무 서러웠다. 그래서 서럽게 울어버렸다. 서럽게 울면서도 코끝을 찌르는 향기 때문에 K를 생각했다. 내 옷과 몸 구석 구석에 뿌려진 이 향수는 K와의 추억이 가득한 물건 중 하나였다. 한순간도 K와 떨어지고 싶지 않았고 그럴 때마다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향기를 기억했다. 코를 훌쩍이며 숨을 쉴 때마다 의도치 않게 K와 함께했던 순간들이 스쳐갔다.
K는 그 날의 기분에 따라 향수를 골라 뿌리는 버릇이 있었다. 가끔 우리는 K가 어떤 향수를 뿌렸는지 맞히는 게임을 했다.
"자, 오늘은 몇 번 향수를 뿌렸는지 맞혀봐."
맞히면 K가 내 소원을 들어주어야 했고, 못 맞히면 내가 K의 소원을 들어주는 것이 암묵적인 규칙이었다. 나는 알면서도 모르는 척 틀린 답을 말하기도 했고, 문제를 풀기 위한 과정이라며 의도적으로 K의 곁에 바싹 달라붙기도 했다. 타인과의 만남에서 그 사람이 쓰는 향수가 무엇인지 궁금해하고 좋은 향이 나는 사람에게는 어떤 향수를 쓰는지 묻게 된 것도 모두 K 때문에 생긴 버릇이다.
당신과 헤어지던 그 날, 나는 맹목적인 그리움에 빠져버렸어요.
당신을 기억하고, 그리워하면서 다시 사랑하고 싶다는 마음보다 생채기 난 마음을 보듬어 줄 누군가가 필요했어요. 수화기 너머로 눈물이 흐르고 있다는 걸 들키고 싶진 않지만 그걸 알아주는 상대가 필요했고요. 시시덕 거리는 감정이 아니라 작은 떨림이 손끝 마디마디까지 전달되는 깊은 슬픔을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이 정말 필요했어요. '그게 당신이라면 정말 행복하겠다'라는 생각도 해봤지만 그건 욕심이고, 어리석은 기대겠죠. 다 알아요, 전부 다.
우리는 왜 헤어져야 했던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