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 : 속 이야기
친구에게 고민을 이야기하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최근 다양한 방송국에서 프로그램 기획 제안을 받았다. 말 그대로 어떤 프로그램을 만들지 회의를 해보자는 것인데 프로그램 기획이라는 게 회의를 하다가 엎어지기 일쑤고, 딜레이가 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친한 선배는 현재 방영 중인 프로그램을 기획하는데 수십 개에 달하는 기획안을 써 냈고, 끝도 없는 회의에 지쳐 못한다는 말이 앞니까지 나온 순간 최종 픽스를 받고 프로그램 제작 회의를 시작했다. 현재는 레귤러가 된 프로그램이지만 당시 선배는 방송국을 불 지르겠다며 매일 밤 상스러운 욕이 담긴 카톡을 살벌하게 보냈다.
나는 유튜브 콘텐츠나 외부 일을 할 때만 메인작가로 일을 해봤고, 방송 프로그램에서는 세컨 작가로만 일을 해왔다. 세컨 작가 타이틀을 단지 5-6년이 되었다고 하면, 주변 사람들은 두 가지 반응을 보인다.
"큰 프로그램 둘째면 대단하지, 쭉 버텨! 메인 해봤자 골머리만 썩어! 할 수 있을 때까지 둘째로 살아라!"
"여기까지 온 이상 메인작가 타이틀 달아야지. 기회가 오면 잡아! 누구한테나 주어지는 기회 아니다!"
스스로도 판단이 잘 서지 않았다. 잘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구심도 들었고, 과연 나를 온전히 믿어줄 피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앞서기도 했다.
그러던 중, 예전에 같이 프로그램을 했던 피디가 연차가 쌓여 총괄을 하는 입장이 됐다며 연락해왔고, 오랜만에 만나 회의를 했다. 이것저것 내가 가진 총알을 내밀었고 그중 하나를 콕 집어 기획안을 부탁했다. 이미 다른 제작사로부터 기획안을 많이 받았다는 말과 함께 부탁한지라 큰 기대는 하지 않았는데 기획안을 넘긴 지 며칠 뒤, 내가 쓴 기획안 반응이 제일 좋다며 조금 더 구체적인 기획안을 부탁한다고 했다. 시간을 쪼개서 후배와 함께 서치를 하고 다시 기획안을 수정해서 보냈다.
그리고 현재 하는 프로그램의 세컨 피디가 새로운 프로그램을 구상해보자는 제안을 했다. 맨땅에 헤딩 모드였지만, 나에게는 아직 남아있는 총알이 꽤 있었기에 회의를 해보자고 했다. 구체적인 아이템은 아직 나오지 않았고, 꾸준히 회의를 해봐야 할 것 같다.
마지막으로 후배가 믿고 따르는 분이 새로운 플랫폼에서 시작하는 일을 제안했다. 꽤 구체적인 기획안을 가지고 나오셔서 올해 안에 론칭을 하는 것을 목표로 해보자는 제안을 주셨다. 그 플랫폼 자체가 굉장히 좋은 곳이어서 열심히 해보고 싶은 마음 반, 기획 내용에서 섭외 비중이 부담으로 다가와 망설여지는 마음 반이었다. 일단은 설 이후에 다시 이야기하자고 했다.
현재 하고 있는 프로그램은 2월에 종영이 되고, 그 외에 유튜브 콘텐츠를 몇 개 하고는 있지만 메인 프로그램을 결정해야 하는 상황에서 이런 제안들이 들어오니 감사하면서도 이 모든 걸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지난주, 작가 친구를 만날 일이 있었는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조심스럽게 요즘 하고 있는 고민을 털어놓았다. 배부른 고민을 하고 있다는 소리를 들을까 봐 정말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친구의 조언은 현실적이었다. 모든 걸 쥐고 갈 수 없으니 잘 배분해보라는 것. 그리고 시기를 잘 타면 세 가지를 모두 다 이룰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대화는 길게 가지 못했다. 어딘지 모르게 불편한 기류가 흐르는 듯했다. 성사가 됐을 때 '이렇게 됐어'라고 할 걸 그랬나 하는 후회가 들었다. 나는 재빠르게 다른 이야기로 화제를 전환시키고 맛있는 걸 먹으러 가자고 했다.
가끔은 친한 친구라도 내 이야기를 전부 꺼내지 않는 것이 나을 때가 있다. 그것이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말을 꺼낸 쪽이 눈치를 보는 경우가 생긴다. 나의 경우 불편한 분위기가 조성되어 눈치를 보게 되면, 그 사람에게 다시는 속 이야기를 꺼내지 않게 된다. 우스갯소리나 겉도는 이야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등 다소 속 깊은 이야기보다는 가볍게 웃고 넘길 수 있는 이야기를 하게 되는 것. 한동안은 그 친구에게 내 이야기를 털어놓기는 힘들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