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릿속 세상과 발바닥 아래의 세상 사이의 이질감을 감지한 날
회사 복귀가 얼마 남지 않은 이 시점,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해 평소 하던대로 움직이고 있다.
아침 눈을 뜨면 양치를 하고, 냉수를 마시고, 어슬렁 몇 발자국 걸어다니다...다시 이불 속으로 기어 들어간다.
'아, 운동을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오늘은 그냥 더 잘까?' 하는 생각을 한 20분 하다가, 잠이 깨면 옷을 갈아 입고 밖으로 나간다.
문을 나서기까지는 참 멀지만, 그래도 나가자 마자 나오길 잘했다고 느낀다.
아침 8시에 나오는 바람에 출근하는 사람들을 꽤 많이 만났다. 정말 무슨 지하 세계에 사는 사람들처럼 몸을 웅크린 채 땅 바닥을 보고 걷다가 지하철 입구로 기어 들어간다. 항상 보지만, 얼마전까지 나도 그렇게 했지만, 정말 익숙해지지 않는 슬픈 광경이다. 더 슬프게, 지하철 입구 위로 해가 한껏 부풀어 떠오른다.
'나도 곧 저렇게 되겠지', 동시에 '정말 저 생활은 오래 할 게 아니다......' 라는 잡념을 반복하면서 가던 길을 간다. 좀 걷다보니 매일 가던 절두산 양화진 공원이 나오고, 그 계단을 넘어서니 한강이 나온다. 매일 오지만 정말 매일같이 좋은 곳이다. 처음 여기 올 때만 해도 계단을 한발씩 내딛는게 어려워 할머니처럼 두발을 천천히 계단에 내디뎌야 했었다. 그렇게 숨을 쉬고, 사지를 움직이기도 버거웠던 한달 전. 매일 같이 숨을 쉬기 위해 이 곳을 찾았다.
강 바람을 맞고, 날아가는 새를 보고, 갈대 밭 사이를 걸으면 조금씩 내가 느껴졌다. 그 전에 나는 마치 무생물 같았었다. 그래. 나는 무생물 같았었다.
밀려오는 클라이언트의 요청들, 월말이면 재무팀에서 날라오는 수많은 처리해야 할 이메일들, 그리고 팀원들의 피로감들 사이에서 나는 점점 굳어가고 있었다. 실제로 몸이 굳어갔다. 그래서 온갖 욕바가지를 얻어먹으며 휴직을 냈다.
이런 스트레스가 흔하디 흔한데, 나는 왜 몸이 굳어갔을까. 정신과도 다니고, 한약방도 다니면서 말 그대로 심신을 돌보았다. 그렇게 내 몸에 집중하니 알 것 같았다. 내가 왜 그렇게 현실에 압박감을 느꼈는지, 그것들에 왜 난 초연하지 못했는지....
내내 머릿속 세상에 머물렀던 나는 현실이 너무 버거웠던 것 같다. '하고 싶다, 모름지기 000 해야한다'에 사로잡혀서 발 아래 세상이 어떻게 굴러가는지는 놓치고 있었던 것이다. 머릿속에서 구현하고 싶었던 세상이 너무 강했고, 적어도 내가 포함되고 싶은 세상이 저쪽 어딘가에 있었다. 헌데, 뛰어들지 못했지. 계속 열망하고 그리워하면서 내 머릿속 세상은 현실만큼이나 비대해져 버렸다. 그렇게 커져버린 세상을 이고 발 아래 세상을 걸어가려니 그 사이의 압박감에 눌려버린 것 같다.
헌데, 머릿속 세상이냐, 발 아래 세상이냐 하는 구분이 중요할까. 결국 그 모든 게 현실이고, 이상이지 않은가......내가 하고 싶다고 열망하는 것도 어떤 틀에서 보면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이다. 그 안에서 난 열망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무엇을 감내하고 뛰어들어야 할테니. 상상만 하는 것도 하나의 현실이다. 상상하는 나는 현실에 있으니.
정신과 의사가 한 말을 잠시 차용했지만, 어차피 현실은 그 순간이차 찰나의 연속이다. 생각한다고 해서 현실이 멈추지 않는다. 배는 고파오고, 잠은 밀려온다.
이렇게 생각하면 내가 회사에 복귀하는 것이나, 퇴사를 하고 하고 싶은 일을 시작하는 것이나 매 한가지가 된다. 마음 속 이상향을 두고, 머릿속 유토피아 제국을 건설하던 나는 결국 대갈장군이 될 판이다. 그 무게에 짓눌려 발걸음을 떼지 못하고 째깍째깍 넘어가는 시계 바늘만 보고 있다. 그렇게 현실은 넘어가고 있다.
굳이 뭘 하고 안하고를 떠나서, 현실과 이상. 내가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하는 일 간의 이분법을 말하고 싶었다. 누구보다 나에게 말이다.
현실을 버겁고, 이상은 너무 부풀려져서 또 버거운 상황에 오도가도 못하는 나에게.
5일 뒤면 이 시간에 사무실에 앉아 있을 것 같다. 지겹고 씁쓸하겠지. 졸립기도 할테고.
정말 그 일이 의미가 없다고 느껴지면 예정대로 나올 것 같다. 나와서 의미있다고 살려면 다른 종류의 지겹고 쓸쓸한 시간들이 밀려오겠지. 졸립기도 할테고.
하루 안에 야채가 있는게 아니라, 이상과 현실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것을 이 나이 먹어서야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