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리서치를 만난 날 (1)

- 일이 예술로 다가왔던 순간

by Kelly Kenye Kwon

생애 첫 출장길에 올랐다. 작년 이맘 때 난 NGO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것도 바라고 바랬던 국내 최대 NGO 재단의 홍보팀. PR을 전공한 나는 Fundraising. 즉 기금모금 분야에 관심이 많았고, 그 일을 할 수 있는 NGO에 들어갔다. 나름 굴지의 홍보대행사를 박차고 나와 6개월간 준비해 들어간 곳이었지만, 역시나 배운 것과 현실은 너무도 달랐다. 홍보대행사 경험에서 이어진 PR 산업에 대한 회의와 존경했던 NGO에 대한 실망감에 마음의 길을 잃고 있었다. 지금 이 리서치회사는 NGO 입사를 준비할 때 교수님의 소개로 아르바이트 삼아 들어간 곳이었는데, 마침 그 때 같이 일했던 사수가 전화가 왔다. 괜찮으면 리서치를 다시 해 볼 생각이 없냐는 내용이었다. 아르바이트로 일한 것은 데스크리서치였지만, 리서치라는 영역에 호기심을 가지기에 충분했다.

이 회사는 작은 부띠크 형태로 개인이 운영하는 회사라기 보단 그냥 조직이었다. 4대 보험도 안되고, 직원도 10명이 안되며, 사무실도 좀 큰 주거형 오피스텔을 임대해 사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름 대기업의 일을 수주하고, 빈약한 회사 Name value를 만회하기 위해 퀄리티에 공을 들여 프로젝트를 해 나갔다. 반면 준비해 들어간 이 NGO는 준 공부원이라 불릴 만큼 안정적이고, 정년퇴직도 보장되어 있었다. 그래서 내가 이직을 결심했을 때 은행에 다니는 삼촌은 대출금리가 낮을 정도로 안정적인 그 회사를 왜 그만두냐고 했었다. 하지만 나는 무엇에 홀린 듯 사수의 제안을 받아 들여, 공들여 들어간 NGO를 6개월만에 나왔다.

이유는 모르겠다. 다만 내가 모르는 것을 알아나가는 것이 좋았고, 세상 사람들에게 새로운 사실과 인사이트를 알려주는 것도 좋았다. 무엇보다 리서치는 소비자와 기업의 가교 역할을 한다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리서치의 대상은 소비자 즉 '사람'이다. 그들의 행태, 심리를 알아내서 기업에게 그들에 맞춤형 제품/서비스를 내 놓으라고 말하는 것이 리서치이다. 누군가는 반박할 수 있지만, 짧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세운 리서치에 대한 내 정의는 아직도 변하지 않았다. 아무튼 당시 난 확실하지 않는 매력에 끌려 작은 리서치 회사에 들어갔다. 좀더 정확히 '리서치'를 선택했다.


물론 들어가자마자 야근 강행군은 쉴새 없이 진행되었다. 전화나 회의 없이 모든 일을 노트북 하나로 하면서 12시 1시 퇴근이 비일비재했다. 찾는 자료도 미국시장, 유럽시장, 일본시장 다양해서 그때그때 마다 내 키보드 언어 설정이 바뀌었다. 내가 하는 일 외에 사람들에게 질문할 질문지와 리크루팅, 보고서 구성 등 다양한 이슈가 사수와 클라이언트 간에 오고갔고, 공유되는 메일을 보면 내가 하는 자료 조사가 그 큰 구성안에 하나의 돌로 박힐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뿌듯했었다.


그렇게 2달을 보낸 뒤, 사수가 말했다.

"너 여권있지?"

"네"

"나랑 출장 좀 가야겠다"

"어디요?"

"함부르크랑 밀라노"


'응? 함부르크는 독일이고 밀라노는 이태리?' 출장지를 국가가 아닌 도시로 말하는 것도 생소했다.


"얼마나요?
"한 2~3주"


'출장기간이 안정해졌다고?' 기간이 없는 출장은 더 생소했다.

동시에 묘한 쾌감이 올라왔다. 내 안에 잠자고 있던 역마살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근데, 차장님. 제가 출장이 처음이라서 그러는데, 가서 뭘하는 거에요?"

"뭘하긴. 조사하는 거지"

"그 곳 사람들을 우리가 어떻게 조사해요?"

"야. 우리가 지금 독일이랑 이태리 자동차 시장을 공략하려고 조사하는 거잖아. 그럼 그 곳 사람들이 어떤 차를 타고, 어떤 차를 좋아하고, 왜 그 차를 좋아하는지 등등을 알아야 할 거 아니야. 그러니 조사를 하는거지. 우리가 직접 하는게 아니고, 그 곳 업체를 고용해서 할 거고, 우리는 그 결과를 토대로 보고서를 쓸 거야"

"아~~. 그럼 그 업체가 조사하도록 자료 주고, 우리는 결과만 받으면 되는 거 아니에요? 왜 굳이 직접 가서 조사하는 걸 봐요? 독일어 이태리어도 어차피 못하는데......"

"휴~~. 그게 말이야. 사람은 말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아. 절대 생각이나 속내를 그대로 말하지 않는다고. 그렇다고 그들이 거짓말 한다고 비난할 일은 아니고, 본래 사람이 그렇게 생겨 먹은거야. 그렇다면 우리가 직접 그 시장에 가서 실제 도로 상황은 어떤지, 교통신호는 어떤지, 주거지는 어떻게 생겼는지 등을 직접 봐야 그들이 하는 말이 어느정도 이해가 가고, 또 이상하다 싶은 것들은 걸러내고 할 것 아니니. 물론 우리가 며칠 가서 본다고 다 알 수는 없겠지만, 어느 정도 현장에 가 봐야 조사 데이터를 읽는 감이 생기는 거 아니겠어? 즉. 인사이트 말이야. 조사자의 인사이트(Insight)!"


뭔가 이해가 갈 듯 하면서도 애매했다. 우리가 며칠 체류한다고 뭘 더 볼 수 있을까. 무작정 돌아다니나?


그렇게 어벙벙한 마음으로 출장 준비를 하고 날아갔다.

처음 도착한 함부르크.

도시는 미친 듯이 고요했다. 자전거가 많았고, 공기가 맑았다. 출장비를 아껴쓰라는 사장님의 엄명에 중앙역 근처 모텔 비슷한 호텔을 숙소로 잡았다. 긴 여정에 피로 풀 시간도 없이 짐을 풀고 바로 협력업체 오피스가 있는 곳으로 갔다. 트램을 타고 가는데, 트램 내부 역시 고요하다.


주택가에 위치한 협력업체 오피스는 아담하면서도 깔끔하다. 사수랑 꽤 오래 일했는지 사장과 진한 포옹을 하고, 그 곳 사람들과 일일이 인사를 했다. 그리고 바로 시작된 회의. 영어로 고객사의 신차 컨셉에 대한 사장의 견해와 독일 사람들이 좋아하고 싫어할 만한 포인트를 줄줄 풀어놨다. 그 역시 리서처이므로, 신차 컨셉을 미리 보고 어떤 점이 좋고 나쁜 지에 대해 나름의 견해를 생각해 놓은 것이다.

그러면서 나온 단어 ''Understatement"

나는 꿀먹은 벙어리처럼 앉아있다가 처음 듣는 단어에 "Pardon?" 이라고 개미만한 소리로 물었다.

사장은 웃으면서 말했다.

"독일 사람들은 뭔가 힘이 응축되어 있는 모습을 좋아해요. 작은 체구에서 힘이 뿜어져 나올 것 같은 느낌. '단단함'과는 또 다른 느낌인데, 단순히 하드웨어 적으로 튼튼한 것이 아니라, 소프트웨어 적으로 즉 내면에서 뭔가 알차게 쌓여져서 나오는 파워를 느끼기를 바라죠. 사실 이것은 일상생활에서 더 많이 나타나는데, 내실이 갖춰지지 않고 요란하고 말만 떠들어 대는 성향을 매우 싫어하죠. 그래서 그런 사람들을 좀 경시하기도 하고. 반대로 눈에 띄지 않아도 몇 마디 말을 나눈 뒤에 그 사람의 진가가 나타나는 그런 느낌을 좋아해요.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게 되려고 하기도 하고요. 이런 '겉으로는 조용하고 소박해 보이지만, 실제 안에는 큰 힘과 매력으로 채워진 것 같은' 느낌을 Understatement라고 표현합니다. 이 표현은 제품, 사람, 서비스, 도시 분위기 전반에 적용될 수 있어요"


갑자기 골프 GTI가 생각났다. 마트카, Mom car 라는 이미지의 해치백을 hidden super power로 이미지 변신을 시킨 장본인이다. 이 GTI 골프 덕에 해치백은 Power 이미지를 하나 더 얹었다. 그런데 이 곳은 골프를 탄생시킨 독일 아닌가. 게다가 이 프로젝트의 컨셉카는 바로 해치백이었다. 이 곳에서의 해치백 전략은 좀더 정교해야 했다.


같은 생각을 했는지, 사수가 말했다.

"그러게 말이야. 토마스. 골프 GTI가 Underestatement을 잘 공략한 거 아니야. 그 골프 때문에 더 골치아프게 생겼어. Performance는 마케팅에서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이잖아"

"그러니, 마케팅을 더 정교하게 해야지. 실제로 Underestatement가 잘 느껴지도록. 단순히 광고로는 안되고 Performance가 이전 차량에 비해 상대적으로 얼마나 강력해졌는지 잘 표현해야할 것 같아. 실제로도 Performance가 상당히 개선된 편이니까"


처음 듣는 이 단어를 사전에서 그 단어를 봤다고 해도, 독일인에게 이런 깊은 의미를 가지는지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현지 사장을 통해 독일 사람들을 좀더 알아낸 기분이었다.


이틑날. 뒤늦게 도착한 담당 클라이언트와 토마스, 그리고 차장님은 독일 시장에 대한 논의와 프로젝트 방향성에 대한 회의를 했다. 난 속기사처럼 기록하고, 조사 자료들을 챙기는 것만으로도 벅찬 하루였다.

마침내 조사 날. 공략할 만한 소비층이라고 판단된 사람들이 조사 장소로 왔다. FGD(Focus Group Discussion)인 이 방식은 사전에 타깃 소비자들을 선정해 우리 컨셉에 대한 의견을 심층적으로 묻고 토의하는 조사 방식이다.


응답자들이 회의실에 들어가자 우리는 연결되어 있는 one-way mirror 룸으로 들어갔다. 영어 동시통역사가 진행자와 응답자의 내용을 통역했고, 나는 또 미친듯이 기록해갔다. 조사가 진행되면서 사람들은 차량에 대한 의견과 사용 패턴에 대한 얘기를 했고, 그 과정에서 우리의 전략 이슈에 도움이 될 만한 것도 많이 건질 수 있었다.


그렇게 며칠 간 매일마다 2~3개의 FGD가 진행되었고, 사이사이 쇼핑몰이나 대형 센터들을 돌면서 그 나라 주차장은 어떻게 생겼고, 도로 간격은 얼마나 되는지 등을 살펴 보았다. 동시에 길에서 주로 보이는 모델과 차량 색깔, 택시로 운행되는 모델은 무엇인지 등을 보면서 시장을 알아나갔다. 어찌보면 장님 코끼리 다리 만지는 식이겠지만, 한국에 있었으면 코끼리 다리를 구글 이미지에서 보는 수준 밖에 안됐을 것이다. 왜 차장님이 출장을 와야 하고, 출장지에서도 열심히 돌아다녀야 한다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소비자와 기업의 가교 역할을 하는 리서처. 소비자는 결국 인간이고, 인간의 소비 행태는 그들의 삶의 방식과 분리되지 않는다. 결국 인간과 삶을 깊이 있게 이해해야 가교역할이 분명해 질 것이다. 이런 것이 리서치라고 생각을 하니, 안정된 NGO 직장을 나온 게 조금은 위안이 되었다. 동시에, 전 세계의 사람들의 삶과 소비행태를 파헤쳐내는 일에 내 커리어와 열정을 헌납하리라는 희미한 다짐 같은 것이 올라왔다.


그렇게 난 리서치에 빠져들었다. 마치 마법에 홀리듯이, 내 안의 어떤 열정이 외부의 어떤 것과 연결되는 것 처럼. 그렇게 내 안의 쾌감과 연결되는 일을 만난 것 같았다.


난 월급을 받고 일을 한 것이었지만, 내 행위는 예술적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되어가는 것에 난 기쁨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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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9년 간 리서치 회사를 다니면서 얻고 잃은 것을 써내려가려고 합니다. 지금은 백수이고, 이 업계로 돌아갈지 말지 (물론 받아주는 회사가 있을 때의 얘기지만) 바닥을 뒹굴며 계속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결론이 나든 나의 젊음과 열정을 바친 이 업계에서 경험한 다사다난한 일들, 그리고 비단 리서치 종사자에게만 적용되지 않을 일과 나의 관계에 대한 많았던 고민들을 써내려갈 생각입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이름은 모두 가명이며, 사건 역시 실제 일어난 일에 상상을 더한 것입니다. 혹시라도 리서치 업계나 특정 회사에 대한 오해가 없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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