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이 예술로 다가왔던 순간
독일 함부르크 일정은 어느정도 성공적이었다. 이제 밀라노로 날아갈 차례.
이번 출장은 함부르크 - 밀라노 - 다시 함부르크로 돌아와야 하는 일정이라 마치 국제 유목민이 된 기분이었다. 유럽 간 이동이다보니, 공항 여유시간도 체크인도 부담이 줄었다. 같은 유럽이고, EU 내에서 주도권을 쥐는 대표국가들인 만큼 난 밀라노에서의 조사결과가 독일과 유사할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자칫 지루할 수도 있고, 멀리 봐서는 국가 별 보고서를 쓰기가 되려 어려울 것 같았다.
"차장님, 이태리 결과도 독일과 비슷하게 나오겠죠?"
난 짐을 부치면서 무심결에 물었다.
"응? 무슨 소리야? 이태리와 독일은 확연히 다르지"
"아...... 그게. 같은 EU 국가이고 GNP도 둘다 높은 수준이고......"
"임마! 일단 두 나라는 인종이 다르잖아. 독일은 게르만 족 혈통이고, 이탈리아는 프랑스, 그리스, 알바니아 등 혼혈이고. 그리고 역사 자체가 이탈리아는 로마 제국을 건설했던 나라고, 독일은 히틀러가 있었어. 이렇게 확연히 차이나는 나라인데 어떻게 결과가 비슷하겠냐?"
자동차 조사를 하러 왔다가 갑자기 세계사 수업을 듣는 기분이었다.
'자동차 조사를 하는데, 그런게 영향을 미치나? 과거에 로마제국이었던 히틀러 시대였던 어쨌든 지금 다같이 포드를 양산차로, 포르쉐를 럭셔리로 여기는 건 마찬가지 아닌가? 그리고, 글로벌 시민이 지향되는 21세기에 왠 민족성 타령이람?'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차장님의 일장 연설에 난 갑자기 머쓱해졌다. 무식하다고 면박을 주는 것 같아 괜히 심통도 났다.
"그게, 차장님 그래도 차량 라이프는 비슷할 거 아니에요? 둘다 산업 수준이 비슷하니"
나름 아는 척을 해봤지만 "그래 한번 가 보자. 차량 라이프가 비슷한가"라는 냉소적인 답변이 돌아왔다.
유럽 간 이동이라 비행기는 작고 아담했다. 짧은 비행 사이 머쓱해진 기분은 사라지고, 슬슬 호기심이 발동했다. 그래 만약 가까운 이 두 나라의 조사 결과가 다르다면 그 또한 흥분된 일 아닐까. 게다가 오래전부터 이탈리아에 살고 싶어 이탈리아어 인강을 수강할 만큼 흠모해오던 나라였다. 단순히 자동차 판매시장으로만 보지말고, 국가에 대한 이해를 하라는 차장님의 지나간 말도 생각났다.
낮에 출발했지만 연착이 길어 예정시간보다 늦게 도착했다. 짐을 찾고 호텔로 들어가는 길은 이미 깜깜한 밤이었다. 호기심이 꽉 차오른 난 그 깜깜한 길의 가로등 마저도 새로워보였다.
"좀 늦었지만, 그래도 새로운 여정을 위해 우리 제대로 저녁을 먹죠"
클라이언트가 제안했다.
동행 인원은 클라이언트, 차장님, 나 그리고 독일업체 사장이었다. 프로젝트 매니저 역할을 했던 업체사장은 사실 이탈리아에 올 필요가 없었다. 독일 시장은 독일 업체가, 이탈리아 시장은 이탈리아 업체가 담당하는 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해외 실사의 전체 PM을 맡는 조건으로 계약하기도 했고, 이탈리아 결과를 직접 봐야 독일의 비교 포인트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며 자진해서 동행해 온 것이다. 뭐든 전체를 조망하고, 디테일과 연결시키려는 노력은 차장님과 비슷했다.
이런 전반적 수행이 고마웠는지, 클라이언트가 저녁을 사겠다고 했다. 차장님과 나는 어버버하며 따라나섰지만, 업체사장은 처리할 일이 있다며 다음날 아침에 보자고 했다.
사장의 쿨한 거절을 부러워하며 우리는 짐을 대강 풀고, 호텔 로비에서 만났다. 가까운 레스토랑을 추천받아 가는데 길이 내내 돌길이었다. 그 위로 비추는 가로등은 예전 백열등 보다도 조도가 낮아, 발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돌 틈새로 발이 미끄러지는 걸 감수하고 레스토랑을 겨우 찾아 비몽사몽 간에 밥을 우겨 넣었다.
다음 날. 우리는 이탈리아 업체 사무실로 출근했다. 도착한 그 곳 역시 작은 오피스로 성당같이 생긴 건물에 입주해 있었다. 벨을 누르니 무거운 철문이 열렸고, 오래 된 철근이 그대로 드러난 엘레베이터가 철커덕 소리를 내며 내려왔다. 역시 독일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이 오피스만 그렇다고 볼 게 아닌게, 오는 길 내내 어제의 돌길이 주구장창 이어졌고 주변의 건물 역시 비잔틴 양식의 첨탑을 가진 건물들이 즐비했다. 박스모양 건물과 잘 뻗어진 도로가 가득한 독일과는 확연히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건물로 올라가니, 부드러운 인상의 담당자들이 나왔다. 파비오와 줄리아. 그들은 우리를 보더니 다짜고짜 포옹과 볼에 키스를 해댔다. 나는 영화에서 본 대로 어색하게 그들의 인사에 응하고, 책상을 찾아 노트북을 풀었다.
차장님과 나는 다음날 바로 FGD가 시작되기 때문에 독일 조사 결과를 그들에게 브리핑을 해 줘야 했었다. 그래야 진행자가 조사 내용을 대략 이해하고, 독일과 이태리의 차별점에 포커스를 두어 진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와 격하게 인사를 나눈 그들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한참이 되어도 나타나지 않았다. 노트북은 이미 부팅이 다 되고 있었다. 그렇게 자료를 준비하고 있는데, 파비오가 사장님을 데리고 나타났다. 헌데 그녀는 대충봐도 한 60대는 족히 넘어 보이는 백발의 할머니였다.
'저런 할머니가 리서치 회사의 사장이라고?'
리서치는 다른 업종에 비해 남녀 차별이 거의 없는 분야이긴 하다. 그래서 국내 회사에도 여자 매니저급, 임원이 즐비하고 CEO도 여성이 많이 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외모는 단칼 같은 눈매에 럭셔리 브랜드 혹은 고급스러운 옷과 액세서리로 무장하고 있다. 전형적인 커리어우먼인 것이다. 헌데 이 CEO의 모습은 무엇인가. 솔직히 파비오가 소개하기 전, 난 그가 자기 할머니를 모시고 온 줄 알았다. 작고 키에 소박한 옷을 입고 좁은 보폭으로 우리에게 걸어온 그녀는 '먼 길 오느라 고생했다'며 정말 따뜻하게 손을 잡아 주었다. 그 때 줄리아가 커다란 쟁반에 에스프레소와 갖가지 쿠키와 초컬릿을 담은 다과상을 가져왔다. 정말 그건 한끼 식사로도 충분했다.
그 때부터 그들의 담소는 시작되었다. 쉴새 없이 초컬릿을 까 먹고, 뒤에 있는 에스프레소 보온병에서 커피를 내려 마시는 분위기 속에서 마치 처음 만난 듯 그들끼리 온갖 얘기를 쏟아내었다. 물론 차장님이 이탈리아 자동차 시장, 독일 조사 결과 같은 주제로 시작해도 어느 덧 얘기는 자동차 안에서 일어난 일들, 얼마전 사고 날 뻔한 일들 같은 그들의 사적 대화로 이어졌다. 당췌 제대로 된 회의가 이뤄지지 않았다.
출장 전 차장님이 부여한 지침대로 FGD 진행을 맡을 줄리아에게 질문 내용에 대한 브리핑을 해야 했던 나는 그 말조차 꺼내지 못했다. 시간이 갈 수록 애가 끓고 있는데, 점심 시간이 되었다며 점심을 먹으러 가자고 했다.
차장님과 난 조식을 먹은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사무실에서 정리를 하겠다고 하고 그들을 보냈다.
"휴~ 차장님. 어떻해요? 줄리아에게 브리핑도 못했고, 독일 조사 결과도 다 전달하지 못할 것 같은데"
"그러게. 얘네들이 워낙 말이 많아서"
"여기 퇴근도 4시잖아요. 얘네 점심 먹고 오면 2시 넘을텐데, 그 때는 머티리얼 프린트하다보면 시간이 다 갈 것 같은데요......"
깨알같이 할 일을 스케줄링 해 온 나는 점점 조바심이 밀려왔다.
"됐어. 어차피 계획대로 될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어. 이탈리아 애들이랑 말 한번 섞으면 자기 말만 하고, 당췌 끊을 수가 없거든. 한국에서 질문지 미리 보내놨었으니까, 줄리아도 미리 봤을거고. 독일에서 바뀐 건 지금 말해줘도 기억 못할테니, 내일 아침에 말해주자구. 있다 파비오랑 줄리아 오면 머티리얼이나 프린트 해놔. 그게 우선이니"
"네......"
며칠 전 독일에 도착한 날 업체사장과 가진 회의가 생각났다. 얼마나 학구적이었던가. 독일인의 키워드인 'Understatement'라는 단어도 알고. 그런데 이 곳 이탈리아 첫 미팅에서 들은 건 파비오가 최근 친구랑 차를 타고 가다 왜 사고가 났는지, 줄리아가 주말에 차를 몰고 어디로 갔는지 같은 얘기들이었다.
아, 이것만 봐도 국별 보고서는 충분히 나올 것 같았다.
차장님이 처음 민족성과 역사를 운운한 게 괜한 잘난척이 아니었다. 어제 클라이언트와 저녁을 먹고 오다가 나눈 얘기 중 이탈리아는 과거 로마제국의 명성으로 오늘날까지 먹고 사는 것이고, 이곳 사람들도 그것을 잘 알고 있다고 했다. 사실 관광 수입이 대단하고, 이탈리아라는 국가 브랜드 파워(by Italy)도 상당하다. 동시에 그들이 감수해야 할 것들도 많아 보였다. 아까 파비오가 한 말들은 그것을 은연 중에 나타냈다.
"혹시 여기 올 때 불편하지 않았어요? 여기 처음 오는 사람들은 돌길을 너무 불편해하거든요"
"맞아요. 이탈리아가 자동차 강국이고 시장도 큰 데 운전하기 너무 안좋을 것 같아요"
"사실 여기 사람들은 주행감이나 승차감은 포기하고 살아요. 이 돌들이 모두 문화유산이라 콘크리트로 교체될 수 없고, 사실 너무 견고하게 박혀있어 교체비용도 만만치 않거든요. 게다가 지하 주차장을 만들 수 없어서 지상 주차장만으로 해결하려니 대형 세단 같은 큰 차는 꿈도 꿀 수 없죠. 저 같이 키 큰 사람도 smart for two나 조금 욕심을 부려 206 타는 정도에요"
"네? 지하 주차장을 만들 수 없다니요? 왜요?"
"지하에 유물들이 매장되어 있기 때문이죠. 새로 세우는 건물이라도 지층을 만들려면 엄청난 행정 절차를 거쳐야해요.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하죠"
아직도 나오지 않은 유물들이 있다는 말인가? 게다가 당국은 그것을 발굴할 생각도 없다고 한다. 동시에 언뜻봐도 190cm는 넘어 보이는 파비오가 Smart for two를 탄다니, 왠지 애잔해보였다.
잡담이었지만, 이탈리아 시장이 조금 감이 잡히고 있었다. 차장님이 말한 민족성과 역사는 역시 얽히고 섥혀 있었다. 역시 소비자 조사는 경영학적 지식만으로, 기업의 이윤창출의 시각만으로 접근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차장님의 예상대로 점심을 먹고 온 그들과 미팅은 불가능했다. 줄리아가 한장 프린트를 한 뒤, 일일이 나에게 보여주는 통에 두 시간을 다 써버렸기 때문이다. 독일에서는 20분만에 했었는데.
4시. 그들의 퇴근시간에 맞춰 주변 자동차 매장을 돌아봤다. 역시나 예술적 장인의 나라인 만큼 자동차 디자인이 자유로웠다. 흰색, 회색, 검정색 일색이고 조금 튀어보이고 싶을 때 시뻘건 컬러를 선택할 수 밖에 없는 국내 시장이 왠지 측은해졌다.
***********************
약 9년 간 리서치 회사를 다니면서 얻고 잃은 것을 써내려가려고 합니다. 지금은 백수이고, 이 업계로 돌아갈지 말지 (물론 받아주는 회사가 있을 때의 얘기지만) 바닥을 뒹굴며 계속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결론이 나든 나의 젊음과 열정을 바친 이 업계에서 경험한 다사다난한 일들, 그리고 비단 리서치 종사자에게만 적용되지 않을 일과 나의 관계에 대한 많았던 고민들을 써내려갈 생각입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이름은 모두 가명이며, 사건 역시 실제 일어난 일에 상상을 더한 것입니다. 혹시라도 리서치 업계나 특정 회사에 대한 오해가 없으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