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인수합병의 변증법적 실패

- 적군이나 아군 같은 구분은 사라지고 모두가 약자가 되어버린 것 같다

by Kelly Kenye Kwon

"그 사람들 출근이 내일부터지?"


새해도 아닌데 책상이 들어오고, 우리팀 레이아웃도 재조정했다. 하루종일 총무팀과 인사팀이 사무실을 드나들었고, 임원들은 한창 일할 시간에 이리저리 우르르 몰려다니며 회의를 했다. 모두 알고 있었던 상황, 하지만 누구도 입 밖에 내 놓지 않은 말을 결국 내가 하고 말았다.

그렇다. 내일 다른 회사에 소속되었던 여러 리서처들이 우리 회사에 합류한다. 개개인의 이직으로 보기엔 규모가 너무 크고 조직적이다. 그렇다고 공식적으로 인수합병을 한 것도 아니다. 형식은 '신규인력 리크루팅'. 여러 사업부와 지원부서까지 합류하는 대규모 이직일 뿐이다.

하지만, 원래 있던 인력들은 본능적으로 불안해졌다. 들어오는 리서처들의 과거 회사는 우리나라 2~3위를 다투는 글로벌 회사였다. 규모도 워낙 커서 어쩌면 원래의 사원 수보다 더 많아질 수도 있다. 무엇보다 산업군이 겹치는 부서가 너무 많다. 즉, 한 클라이언트사를 두고 경쟁을 했던 리서처들과 한 솥밥을 먹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기존의 인력들에게는 무언의 압력이다.

'혹시 나보고 나가라는건가......?'


전문리서치회사는 국내 기반의 토종 기업과 글로벌 기업의 한국 법인 형태로 나뉜다. 토종 기업은 규모에 따라 200명이 넘는 중소기업 혹은 준대기업 수준에서 2~3명의 소규모부띠크 형태까지 다양하게 포진해 있다. 글로벌 기업은 많지는 않지만, 세계 1~3위 회사의 법인은 일찍부터 진출했고, 국내시장에서 Top level의 명성을 쌓아갔다. 무턱대고 글로벌을 선호하는 성향이나 규모의 차이 등을 생각하면 무조건 글로벌 법인을 선호할 것 같지만, 시장이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 클라이언트 니즈나 예산에 따라 적합한 리서치사를 고르는데, 특히 소규모 부띠크 회사는 프로젝트 집중도나 비용면에서 클라이언트 니즈를 맞춰주는 유연성으로 나름대로 경쟁력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8년 전부터 이런 평화로운 생태계는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다. 글로벌 기업이 본사차원의 일방적 인수합병을 하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한국 지사들도 판단권 없이 마구 합쳐지기 시작한 것이다. 헌데, 모든 인수합병이 그렇듯 1+1=2를 만들지 않고, 1+1=1.5를 만들려고 하면서부터 문제가 발생했다. 이에 남겨진, 혹은 자발적으로 흡수되지 않은 0.5는 어디론가 가야했다. 그러다보니, 다른 조사회사로 이동하는 현상이 나타났고, 일종의 '뭉쳐야 산다'는 생각이 깔려 '팀단위의 움직임'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팀플레이로 동료, 상사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업무적 특성도 이런 움직임에 영향을 미쳤다. 회사규모 확장이나 매출 증대를 꾀하는, 여력있는 회사는 이 0.5 군단을 흡수하게 되면서, 1/1/1로 세 개였던 회사는 1.5 / 1.5의 2개 회사로 재편된다. 즉 3개의 회사가 2개로 줄어드는 것이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모든 사람이 옮겨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0.5를 흡수하는 과정에서 자발적 (리서처 당사자가 어디든 가기 싫어서), 혹은 비자발적 (흡수하는 회사의 요구로) 이유로 사람들은 그만두게 된다. 그렇게 그만둔 사람들은 프리랜서를 하거나, 부띠끄 회사를 차린다. 혹은 업계를 떠나거나, 이민을 가면서 어디론가 사라진다.

지난 7~8년간 이런 과정이 무한 반복되어 이제는 아주 작은 규모까지 포함해도 리서치 회사가 10개가 되지 않는다. 아니 솔직히 말해, 이름만 대면 아는 클라이언트 사가 의뢰할만큼 규모를 갖춘 회사만 친다면 5개 남짓 뿐이다. 리서처들도 많이 감소했다.


다음날, 출근하니 소문만 무성했던 그들이 출근해 있었다. 여러모로 우리회사 사람들과 다른 분위기였는데, 글로벌 2위 회사에 다녀서인지 뭔가 자유롭고 자신만만해 보였다. 공식적인 인사도 없이 앉아서 자기들끼리 수다를 떠는 모습에, 되려 우리가 손님이 된 기분이었다. 그렇게 불편한 며칠을 보내고 평소 같이 야근을 하는데 그 무리의 이사님이 말을 걸어왔다.

"권과장은 일이 참 많은가봐? 야근을 자주 하네"

"아, 네...... 제가 손이 빠르지 못해서요. 그런데 이사님은 왜 아직까지 계세요?"

"아, 나도 제안서가 있어서. 그런데 권과장 출장은 많이 다녀봤지? 혹시 전자에 관심있어?"

갑자기 훅 들어온 질문이었다. 역시 소문대로 '인력 헌팅의 장인' 다웠다.

"네.....출장은 많이 다녀봤는데, 제가 전자는 거의 안해봐서요"

"아, 그래. 근데 권과장도 큰 프로젝트 많이 해봤다면서. 해보면 금새 적응할 수 있을거야"

만만치 않았다. 동시에 본부 이사님이 떠올랐다. 우리 본부의 이사님이시자, 나를 뽑아주신 분이셨는데 곧 다른 회사로 이직하신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그래서인지 요즘 부쩍 외근이 잦으셨다.


나는 이런 저런 생각으로 뒤숭숭한데, 팀장님은 너무 평온했다. 심지어, 몇 주가 지나자 새로 들어온 이사님이랑 친하게 농담까지 하고, 새로 들어온 부장님들과 저녁도 드시곤 했다. 나는 왠지 배신감 같은 것을 느꼈다. 게다가 우리 본부 이사님과 팀장님은 여러 해를 동거동락 해 온 사이였다.

'어쩌면 저럴 수 있을까. 무슨 속내이시지? 이러다 우리팀도 저 본부로 넘어가는 거 아니야?'

며칠 간 고민하다 팀장님의 인격을 믿었기에 직접 여쭤봤다.


"팀장님, 요즘 왜그렇게 저쪽 사람들이랑 친하게 지내세요?"

'신규인력'이 합류한 지 한달이 되어갔지만, 음성적으로 '저쪽 사람들'이라는 말은 계속 통하고 있었다.

"왜? 이상하냐?"

"아니 이상할 건 없지만, 우리 이사님도 곧 다른 데로 이직하시고....... 좀.......그런데, 굳이 저 이사님이랑 농담하시고, 식사도 같이하시고 그래서요"

"우리 이사님이 그만두시는데, 넌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 할 것 같은데?"

"그건 잘 모르겠지만요, 지금 시기가 좀 그런 거 같아서요"

정말 바보처럼 얼버무리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 '팀장! 넌 의리도 없냐?'고 말하고 싶었다. 눈치빠른 팀장님이 바로 알아채고 말씀하셨다.

"왜? 내가 의리도 없고, 정도 없는 사람 같이 보여? 글쎄, 난 잘 모르겠다. 의리가 뭔지. 그렇게 따지면 여기 팀들을 두고 가시는 이사님이 의리가 없는거지. 어떻게 되든 끝까지 가봐야 하는 거 아니겠어? 회사에서 나가라고 한 것도 아닌데, 스스로 결정하신거야. 난 그게 더 실망스럽다. 저 쪽 사람들. 끝까지 가보려고 여기 온거야. 겉으로 하하호호 하지만, 그 큰 회사에서 소용돌이 다 겪고 이리로 와서 얼마나 어색하겠어. 게다가 여기는 시스템도 구리고, 네임벨류도 아직 미미해. 그런데 그들이 들어오면서 회사에 약속한 목표 매출이 있어. 그걸 해내기 위해서 어떻게든 여기 사람들과 친해지고, 협력하려고 애를 쓰고 있는거지"

난 아무말도 못하고, 먹먹하게 듣기만 했다.

"그렇다고 내가 라인을 완전히 갈아탔다고 생각하진 마라. 난 그냥 내 길을 가는거야. 저쪽 이사님이 우리 팀을 좋게 보셔. 팀워크도 좋고, 성과도 좋다고. 그래서 자기 본부로 끌어들이려는 건 사실이야. 물론 더 두고 봐야지. 길은 여러 길이 있어. 옆 팀 부장이 곧 이사로 임명 될 건데 그 쪽으로 갈 수도 있고, 저 쪽 이사님으로 갈 수도 있고, 아니면 그냥 독립팀으로 갈 수도 있고. 권과장이 보기에 내가 너무 시류에 영합하고 매정하게 구는 것 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중요한 건 그냥 내 노선을 지키면서 내 일을 하는 거야. 내가 어떤 본부에 소속되었다고 해서 그 이사님에 평생 충성할 것도 아니고, 떠난다고 해서 완전히 배반하는 것도 아니고. 그런 면에서 우리 이사님도 크게 비난 안해. 그냥 너무 빨리 포기하셔서 아쉬움이 드는거지"


@Kelly_회사는 와인 속 세상처럼 복닥거린다


작은 부띠크 회사에서 출발한 나는 사수와 부사수 같은 팀원간의 관계, 팀워크 같은 것이 가장 중요한 덕목이었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좋아야, 일을 편하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이 깊었다. 하지만, 세상은 변하고 그에 맞춰 회사도 끊임없이 탈피한다. 좋은 사람들과 손발을 맞춰가며 오랜시간 일한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지만 현실에서는 유토피아적 환상이었다. 갑작스럽고 씁쓸한 인력의 밀물썰물을 보면서, 그리고 이에 대한 팀장님의 대응법을 보면서 다시한번 깨닫는다. 회사는 유토피아가 발끝도 대지 못할 전쟁터라는 것을. 그런만큼 내 갈길이 중요하다는 것을.

물론 내 갈길만이 중요해 협력이나 배려를 버리자는 건 아니다. 사실 내가 먼저 '큰 회사에서 온 저쪽 사람들'이라는 딱지를 붙이며 방어적으로 나갔고, 이유도 없이 그들을 우리 이사님 이직의 원인으로 갖다붙였다. 객관적으로보면 개연성은 없었다. 모두들 자기 몸값을 위해 한 일이었고, 전투장에서 열심히 싸우고 있다. 화살촉은 일방적으로 인수합병을 수행하는 글로벌 본사에 겨냥해야 할 것이다. 이 얘기를 하자면 수십년간 발전이라는 것을 해보지 못한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로 넘어가야 하니, 여기서 멈추겠다.


어찌되었건 그렇게 리서치회사가 '마구잡이 식 섞어찌게'가 되면서, 리서처에게 회사와 직장에 대한 신뢰는 '개나 줘버려'가 되었다. 회사 역시 수행 프로젝트의 질과 의미를 평가하기보다, '돈만 되면 다 하는 식'으로 변화되었다. 그렇게 조직과 일의 성격은 변해갔고, 리서처들은 의미를 둘 곳을 잃어갔다.

아직도 이 현상은 진행중이고, 많은 리서처들이 번민과 고민을 한다. 야근과 철야는 괴롭지만 그나마 회사에 대한 신뢰와 프로젝트 자부심이 있었기에 버텨온 것인데 그마저도 어려워 진 것이다. 그래서 요즘 후배들의 고민은 이렇다.

"제가 왜 이 대접을 받으며 밤을 새우나 싶어요. 자존감도 떨어지고......"

적어도 내가 대리였을 때는 '야근이 많아요'가 전부였는데 말이다.


사람 손으로 하는 리서치 업에서 그 사람의 전문성이 사라지고 있다. 직장에서 내 위치가 다른 사람으로 대체되고 있다. 이는 거대한 변화의 흐름이다. 그렇다고 무기력하게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에 우리는 야근 후 성취감의 진한 맛을 아직 잊지 못한다. 예전 팀장님이 살아계셨다면 지금 이 상황에서 뭐라고 하셨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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