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라고 후배가 묻는 데, 나는 침묵 뿐이었다
10년 전. 나는 망망대해를 걷는 것 같은데, 선배는 척척 머티리얼을 만들어냈다. 클라이언트가 내부이슈를 말하면, “그건 이렇게 물어보면 되죠”라고 바로 질문을 만들어냈다. 또는 클라이언트가 이유가 궁금하다면서 이유를 물어보자고 하면 “그 이유는 너무 뻔한 것 아닙니까? 그렇게 자명한 것을 물어보는 건 응답자들을 고문하는 겁니다!”라고 딱 짤라 말하기도 했다.
또 제안서는 어떤가. 조사 제안을 요청해 놓고도 구체적인 조사이슈를 모르는 담당자는 내부 문서라면서 관련자료를 넘겨주지 않는다. 그런데도 선배는 '뚝딱' 그들이 처한 시장상황과 향후 5년 간의 전망, 그러므로 그들이 어떤 조사를 수행해야 하는지 쭉쭉 스토리를 풀어낸다. 헌데 내가봐도 이건 처음 담당자가 팁으로 준 조사 견적을 훨씬 상회하는 수준이다. 보나마나 떨어지거나, 조사규모가 축소되겠거니 했는데, 왠걸. 제안 PT에 들어온 의사결정자(최소 이사로 보이는)가 "우리가 고민하는 것을 어떻게 딱 그렇게 짚어내셨습니까? 저희가 조사예산 확보할테니, 그 제안대로 진행하시죠!"라고 말한다.
10년 전 얘기다.
난 매번 그렇게 선배의 신공에 입이 딱딱 벌어졌다. 그래서 물었었다. 물론 술에 취해서.
"차장님. 어떻게 하면 리서치를 잘 할 수 있어요? 공부를 더 할까요? 근데, 난 이미 석사 땄는데....."
"그걸 알면 내가 이렇고 있겠냐?"
"에이. 그렇게 얘기하면 안되시죠. 어떻게 하면 그런 결론 페이지를 쓸 수 있어요? 제안서도 그렇고...... 사실 통계 공부한다고 되는 것도 아닌 것 같아요"
"통계랑은 상관 없지. 사실 통계는 내가 너보다 더 모를껄. 그런데 일단 지르는 거야. 대신 사전 조사를 토대로"
'질러본다.' 나같은 인턴한테는 가당치 않은 방법이었다. 10년이 지난 지금. 그 선배의 방식이 이해가 가고, 할 수 있는 상황도 되었다. 그러나, 질러보는 방식은 더 이상 통하지 않았다. 아니 솔직하게 말하면, 그 방식은 '리서치를 잘 하는 방식'의 정공법은 아니었다.
사실 리서치를 잘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학교나 대학원에 이에 딱 맞는 학과가 있는 것도 아니고, 교육기관이 버젓이 있는 것도 아니다. 물론 최근 Kora (한국여론조사협회.www.ikora.or.kr)에서 대학졸업자(예정자)를 대상으로 마케팅기본, 통계, 설문지 작성법 등을 가르치고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Basic 수준이고 청년취업 증진이 주요 목표이다. 그러다보니 일정 수준의 실무를 쌓은 경력자들이 자신의 실력을 level up 시킬 수 있는 교육기관, 학과를 찾는 게 쉽지 않다. (찾자면 심리학, 통계학 석사과정 등이 있지만, 이는 기간도 길고 depth가 너무 깊다)
그러다 보니 프로젝트 경험을 쌓으면서 몸으로 부딪치는 학습법을 택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최근의 상황을 보면 이 방식이 과연 리서치 전문성을 제고하는 데 도움을 주는가 하는 궁금증을 품게 된다. 이유는 리서치 회사가 프로젝트를 수주하는 방식과 클라이언트의 리서치 지식의 변화 때문이다. 이전 꼭지에서 언급했지만, 리서치회사는 대부분 글로벌 기업으로 재편되고 있다. 이는 즉, Korea office의 성과를 보여주기 위해 수익구조(이익율)가 중요하다는 얘기이고, 이것은 프로젝트 퀄리티, 의미성 보다는 수익구조가 좋은 프로젝트를 수주하는 데 더 주력하는 것으로 연결된다. 동시에 지난 10년간 클라이언트는 조사에 대한 경험을 많이 쌓아갔다. 그동안 수행한 조사 프로젝트가 쌓여가면서, 설문지, 보고서 등 내부 자료가 많이 있다. 즉, 조사를 수행하는 데 있어 기존 조사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고, 이는 동일한 (혹은 유사한) 설문지로 튀지 않는 데이터를 만드는 데 주력한다. (사실 이것도 일리가 있는 것이, 시장은 10년이 지나도 크게 변하지 않기 때문에 동일 제품의 유사한 이슈라면 데이터가 비슷하게 나오는 게 정상이다.) 물론 기존에 다루지 않는 새로운 이슈를 다룰 수 있지만, 그에 따르는 위험성은 누구도 감행하려하지 않는다. (그와 연관된 기존 데이터가 어디에든 있을 것이고, 그것과 다르게 나왔을 경우 그 책임을 누구도 지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조사회사나 클라이언트의 입장이 변했고, 몸으로 부딪쳐 프로젝트 경험을 쌓는 식의 전문성 함양은 '딴 나라 이야기'가 되었다. 그냥 투입비용을 줄이는 방식으로, 반복되는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것 뿐이다. 이것이 지금 리서처들이 갑갑해하고, 절망하는 포인트이다. 물론 글로벌 기업의 지적자산은 공유되고, 그들의 훌륭한 모델들을 활용할 수 있다. 단, 비용이 문제이다. 1개 프러덕트 분석에 수천만원을 오가는 비용을 감당하는 국내 클라이언트는 없다. 특히 국내 클라이언트는 다양한 프러덕트와 계열사를 보유하기 때문에 이런 식의 분석단위는 현실성이 떨어진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면, 어떻게 하면 리서치를 잘 할 수 있을까?
이것은 어쩌면 시장에서 묻지 않는 질문일지도 모른다.
지금의 리서치는 적정한 가격에 빠르고 효율적인 데이터 생산만을 요구한다. 리서치 조직과 클라이언트 모두가 말이다. 데이터의 인사이트와 depth를 주구장창 추구했던 나로써는 힘빠지는 상황이지만, 이 요구마저 잘 해내지 못하는 조사시스템의 한계에 다시 한번 절망한다. 데이터를 사랑하고, 리서치 과정 - 인간을 탐색하고, 그들에 맞는 설문을 만들고, 그 결과를 기업의 발전적방향으로 제안하는 -을 사랑하는 나로써는 이 상황에 갑갑증을 느낀다. 물론 내가 지금 뭘 할 수 있는 것은 없지만, 적어도 후배에게 좋은 리서처의 왕도를 말해주는 선배가 되고 싶다.
ps. 앞서 말한 프로젝트는 과거 대비 변화된 부분을 말한 것이다. 물론 현재에도 depth와 insight를 밝혀내느라 고군분투하는 리처서와 클라이언트가 있다. 차이점으로 언급한 점을 현재의 대부분으로 오해하지 마시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