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아무일을 안했는데 승진을 했다

- 승진은 개인 성과에 대한 보상이 아니다, 그냥 체스판 게임이다.

by Kelly Kenye Kwon

예상을 했겠지만, 나는 작년 입사를 한 회사에서 정말 열심히 일하지 않았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정말 온 힘을 다해 열심히 일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초반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다. 열심히 제안을 했고, 개선하려고 했고, 그것을 증명하는 자료도 만들었다.

하지만, 회사는 답정남/여 였다. 애초에 그들의 입장은 정해져 있었고, 내가 제안한 방식은 구색 맞추기 위한 참고자료로 활용되고 버려졌다. 그 야비한 매커니즘을 파악한 나는 정말 온 몸을 다해 일을 열심히 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조금이라도 정성이 들어가려고 하면, 스스로를 제어 했고, 조금이라도 자료가 풍부해지려고 하면 애써 서치를 멈췄다. 내 생애 그런 근무태도를 가져본 적이 없어 내심 양심의 가책을 받아, 친한 옆 팀의 대리에게 고해 성사하듯 얘기했더니 대답이 가관이었다.

"과장님, 그래도 과장님은 솔직하시네요. 그런데 여기 그런 월급 루팡들 참 많아요. 아니... 사실 그들에 비하면 과장님은 근무태만 축에도 못껴요. 사실 아무일도 안하다 가시는 분들이 얼마나 많으신데요"

"아....."

난 이 외마디 외에 더 아무말을 하지 못했다.

캡처.JPG @pinterest/chess

그 대리의 말에 힘입어 난 더 힘껏 일을 열심히 하지 않았다. 천성적으로 시간을 허비사는 건 참지 못하는 성격이라 '월급루팡'까지는 못했지만, 내 안에서는 '이러다 바보 멍청이가 되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들만큼 그 어떤 머티리얼에도 고민와 정성을 쏟지 않았다. 그리고 그로 인한 결과물들은 내 연봉에 비해 매우 저조한 수준이었다. 시간은 무식하리만큼 성실해서, 그렇게 보낸 삶 조차 흐르고 흘러 연말이 다가왔다. 성과 평가가 시작됐고, 조직개편이 수면아래에서 꽤 시끌벅적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1년이 안된 나 같은 경력사원 귀에도 내년 조직이 어떻게 바뀔지 슬며시 들려올 정도였다.

애초에 성과 평가에는 아무 기대가 없었다. 내 직속 매니저이자, 조직에서 가장 말 섞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던 파트장은 대 놓고 말했다.

"애초에 성과평가는 공정하게 될 수가 없어요. 승진대상자가 있으면 몰아주기도 해야 하니..."

파트원들을 죄다 모아 놓고 하는 말이 이런식이었다. 나는 어차피 밑보인 과장이었으니, 대 놓고 물어봤다.

"신규 입사자는 보통 바닥을 깐다는데... 그렇죠?"

몇 초간 적막 후 떨더름한 대답이 돌아왔다.

"아...네. 아무래도 그런 경향이 있죠."

"그럼 저는 별 기대하지 말아야 겠네요."

"아...네, 그렇게 생각하시는 게 편할 겁니다."

공식적으로 텃새를 인정한 꼴이었지만, 파트원들도 모두 '원래 그런거지 뭐...'라는 일종의 끄덕임이 있었다.

사실 나도 지금에서야 문제시 삼는거지, 그 당시에는 워낙 그 얘기를 들어왔던 터라, 파트장의 대답을 원래 알고 있던 것의 확인으로 받아들이고 넘겼다.

그렇게 별 생각 없이 연말 성큼성큼 다가왔다. 난 이직을 준비하고 있었고, 마침 제안 온 곳과 열심히 조건을 맞추고 있었다. 조건만 맞으면 바로 이직하리라...강하게 다짐하고 출근한 어느날. 오전에 갑자기 인사발령 공고가 떴다. 보통은 금요일 오후에 뜨는 데, 이상하게 월요일 아침 10시에 메일이 날라왔다.

인사팀의 센스가 참 없다고 생각하면서 첨부파일을 열었다. 그런데 내 이름이 거기에 들어있었다.

'부팀장 승격'

직위은 그대로이지만, 직책이 승격되었다. 한마디로 승진을 한 것이다.

'왜? 내가 왜? 이렇게 일도 대충하고, 제안드린 건 마다 다 거절당했는데, 내가 왜?'

그런데 그 아래 줄을 보고 제대로 한방 더 맞은 기분이었다.

'000 과장, 차장 승진'

000 과장은 내가 입사하기 바로 전, 일처리를 제대로 하지 못해 회사에 막대한 손해를 끼쳤고, 경질차원의 좌천 인사를 받은 분이었다. 그 인사로 팀장 직책에서 물러나면서, 막대한 연봉을 부른 팀장을 신규 채용해 자리를 채웠었다. 누가봐도 새로 온 팀장을 앉힌 그 과장님의 앞길을 암울해 보였다. 그래서인지 그 과장님은 정말.... 심하게 일을 더 안하셨었다. 그런데, 그 분이 차장으로 승진을 하신 것이다.

뭔가 이 회사 인사발령의 원칙이 보이는 듯 했다. 승진의 단초는 '일을 잘하는 것'이 아니었다. 인사발령은 체스판에 말을 놓듯, 자신들이 그린 그림을 완성하는 과정에서, 빈자리에 사람을 채우고, 필요하면 없는 빈자리도 만드는 것이었다. 이 회사만 그런 게 아닐 것이다. 모든 인사발령은.... 임원/사장들이 오래 자기 밥그릇을 지키기 위한 그림 완성시키기에 지나지 않는다. 비약일 수도 있지만, 아무일도 하지 않은 내가 부팀장이 되고, 회사에 몇 백억의 손실을 입히고 좌천된지 1년이 되지 않은, 그닥 큰 성과를 보이지 않은 과장을 다시 차장을 승격시키는 인사발령을 이해할 방도는 없었다.


이렇게 생각하고나니, 사실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밥그릇을 지키기위해 소리없는 전쟁을 치르고 있는 조직원들이, 위로 올라가면 갈 수록 그 전챙은 더 치열해질 것이고, 자신의 야망은 더이상 길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field를 지키기 위해, 어리숙한 (즉 말 잘들을 것 같은) 차장을 밑에 두고, 똑똑하지만 말 많은 팀장은 짜르고 싶다는 계산이 설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수행할 power도 있다면... 그렇게 현실화 되는 것이다.

운이 좋은건지, 나쁜건지, 내가 다닌 리서치 회사에서는 이렇게 까지 공정하지 못한 인사이동은 없었다. 아니 있었는데, 주니어 직급이어서 몰랐을 수도 있다. 이제, 10년차 직장인이 되어, 제조사에 들어와 보니, 조직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뭐든 일어날 수 있는 곳. 그 곳이 사무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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