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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elly KyuHyang Lim Mar 09. 2021

갑자기 떠났다

 

일정기간 일을 하면 주말이라는 휴식이 정해져 있는 보통 사람들과는 달리  화랑 운영자로서 거의 대부분의 업무를 혼자서 하고 또한 집필, 영상편집을 비롯한 개인 브랜딩까지 하다 보니 휴일은 스스로가 부여하지 않으면 절대 가질 수 없는 것으로서 내 삶은 프로그래밍되어있다.     


정확히 말하면 핸드폰을 켜 두는 한 내 일은 밤새 끝나지 않는다. 인스타그램에도 사적인 사진보단 끊임없이 올라오는 새로운 전시소식 때문인지 가끔 이런 질문을 받는다.     


쉬지 않고 일하시는 것 같은데
언제 쉬세요?     


뭐라도 대답하기 위해 생각해보았다.

그러고 보니 최근에는 잠자기 전 잠깐 애니를 보는 것 이외엔  딱히 쉬려고 마음먹은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주말 이틀 정도는 마음 놓고 푹 쉬어버리는 규칙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이 부럽기도 하다. 나에게 있어 주말은 전시 오픈 후 가장 바쁜 이틀이 되기 때문이다.

그럼 내게 쉼이란 무엇일까? 예전엔 놀면서 일해왔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일이 어느 정도의 궤도로 오르자 더 이상 논다는 기분으로 일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지극히 외향적인 성격으로  MBTI 검사에서도  ENTP로 진성 외향형 (E) 기질을 타고난 나는 바깥에서 새로운 것들을 접하고 자극받고 영감 받는 것을 즐기며 사람 만나는 것에도 어려움이 없는 타입이라 말하고 다닌다.     

하지만 이 말은 맞으면서도 틀렸다.


난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소설책을 즐겨 읽고 글을 끄적이는 것도 좋아한다. 솔직히 나는 내향적인 기질 또한 타고났다. 지금도 일할 때 요긴하게 쓰이는 사람에 관한 통찰력도 내향적 기질로부터 나온 것이다. 나는 현실과는 먼 세계에 빠져들어서 좀처럼 돌아오지 못하는 것을 즐기는 때도 있었다. 브런치에 업로드된 대부분의 글들은 그럴 때 쓰인 것이다.     

 


어제는 온라인 SNS 미술시장에 대한 강연이 있었다. 일요일 오전 11시의 강연이었기에 금요일부터 긴장해있었다. 잠도 4시간밖에 못 잤다. 같은 장소에서 다섯 번째로 하는 강연이지만 전날은 늘 긴장감에 사로잡힌다. 내 이야기를 들으러 와 줄까 , 실수하지는 않을까 하는 잡념과 강연자료는 더하고 더하는데도 왠지 부족하게만 느껴진다.      


앞으로 우리는 온라인 시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 나는 지난 몇 년간 팬데믹에 어떻게 대처하고 비즈니스를 했는지 이야기했다. 먹고사는 일만큼 중요한 게 어딨을까. 예술로 먹고사는 일 그 어떤 비즈니스보다 복잡하다.

  

“치열하게 살았어요”

“돈을 벌어야 하니 기획을 멈출 수 없었죠”     


와 같은 종류의 말을 하면 사람들의 눈빛이 유독 반짝인다.          



 

강연이 끝나자 통렬한 허기와 피곤함, 그리고 문득 어디로 떠나야 만 한다는 강렬한 이끌림에 시달렸다. 샤부샤부를 먹다 말고 숟가락을 탁 놓고 무작정 제주도로 가는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빨간 가방 안에 대충 짐을 욱여넣었다. 어차피 패션쇼를 하거나 예쁜 인증숏 같은 건 찍지 않을 생각이다.      



김포공항으로 가는 공항철도에서 인터콘티넨탈 호텔에 걸린 우리 작가의 작품을 보고 누군가 연락이 왔다. 작품 가격을 물었고 나는 동일한 가격대의 다른 작품의 리스트도 보내주겠노라 즉시 응답했다. 순간 만사 제쳐두고 급히 노트북을 꺼내어 좁디좁은 지하철 좌석에 앉아 억지로 핸드폰으로 와이파이를 켜고 작품 리스트를 수정하여 갤러리 인턴에게 전달했다. 대체로 이런 일은 그때그때 처리하는 편이기에 내 빨간색 여행가방에는 노트북도 들어있었던 것이 다행이다. 내 노트북은 언제 어디에서도  펼쳐져야 하기에 늘 함께 동행한다.  토요일이라 그런지 지하철에는 사람들이 많았고 허겁지겁 노트북을 가슴에 끌어안고 인파를 물리치고 간신히 김포공항에 내렸다. (뛰어내렸다) 누군가 날 보았다면 수억이라도 버는 사람처럼 보였겠지.


마치 어떤 상징적 퍼포먼스처럼 나의 서울에서의 치열한 루틴은 이로서 뮤지컬 1 부의 막이 내려졌고 이내 새로운 막이 열린다.

     



해가 막 질 때 즈음 공항과 가까운 라마다 호텔에 도착했다. 거울을 보니 내 몰골이 형편없었다. 집에 오자마자 허물처럼 벗은 스커트는 집에 그대로  그 모양을 유지하고 있을 것이다. 구겨신은 흰색 컨버스에 하얀색 바스락 거리는 질감의 통바지, 손에 잡히는 대로 걸친 검은색 봄 바바리. 하지만 뭐 어때.  


유튜브 영상도 , 인스타에 올릴 예쁜 사진도 찍을 필요 없다. 속눈썹도 허리가 조이는 스커트도 필요 없다.


4월에 있을 아트페어에 대한 걱정도 , 당장 다다음주에 시작될 전시 콘셉트에 대해 생각하는 것도,

당장 지금 갤러리에 걸린 작품들에 대한 판매 걱정도 , 얼마 전 출간된 내 책에 관한 홍보에 대한 부담감도 딱 하루만 날려버릴 요량이다.



             


            


다음날 제주도에서 맞이한 아침

늦잠 자리라 마음먹었건만 습관적으로

잠결에 희미한 눈으로 핸드폰을 확인한다  


“네이버 스마트 스토어 강동호 작품 신규 주문 2 건”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다시 단잠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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