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책임을 선택한 날
빈센트 님께,
입춘이 지났지만 추위는 여전합니다.
마치 20여 년의 직장 생활을 뒤로하고 홀로서기를 시작하려는 제가 마주한 현실의 공기처럼요. 달력 속 ‘입춘’이라는 두 글자를 바라보며, 회사를 세우고 내 삶에 봄을 선언하려 했던 제 마음을 다시 붙들어봅니다.
어제 법인 등록을 마쳤습니다.
1인 법인의 주주명부를 작성하면서, 지분 100%를 가진다는 것은 곧 책임도 100% 져야 한다는 뜻임을 배웠습니다. 법무사는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해 지분을 50% 미만으로 나누어 책임을 분산하는 방법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두려움이 밀려왔습니다.
제가 꿈꾼 사업은 그저 좋아하는 일을 마음껏 해보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현실의 사업은 세상 앞에 법적인 책임을 지는 일이기도 하다는 것을 그제야 실감했기 때문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습니다.
독촉하는 법무사의 시선 끝에서 저는 겨우 입을 열었습니다.
“제가 100% 책임지겠습니다.”
법무사는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제 어깨 위에는 기개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대표이사’라는 이름의 무게가 얹혔습니다. 이제 겨우 첫 삽을 뜬 것뿐인데, 한 치 앞이 보이지 않습니다.
사십 대 초반의 제가 내린 이 선택은 정말 맞는 것일까요.
창업 초기의 저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무엇인지 여쭙고 싶습니다.
입춘이 지난 어느 추운 날에,
켈리 드림
“인생은 생각보다 길다. 비 오는 날도 있고 해 뜨는 날도 있다. 미리미리 준비하라.” — 빈센트
켈리 님께,
그날의 당신은 아직 많은 것을 몰랐습니다.
사업이 좋아하는 일을 마음껏 펼치는 무대이기 전에, 결국 한 사람의 이름으로 감당해야 하는 책임의 자리라는 것도, 그 책임이 생각보다 오래 사람을 단단하게도 하고 외롭게도 만든다는 것도요.
그래서인지 그날의 침묵이 오래 남습니다.
법무사 앞에서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던 사람.
그 짧은 침묵 속에는 두려움도 있었고, 망설임도 있었고, 어쩌면 돌아갈 수 있다면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잠시 스쳤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도 결국 당신은 말했지요.
“제가 100% 책임지겠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그 말은 단지 법인 지분에 대한 대답만은 아니었습니다.
앞으로 닥쳐올 불확실함과 외로움, 후회와 배움까지도 자기 몫으로 받아들이겠다는, 어리고도 깊은 선언이었습니다.
그날의 당신은 아마 다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람이 떠나는 일도, 믿었던 것이 흔들리는 일도, 애써 만든 것들이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시간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요. 혼자 버티는 날이 생각보다 길고, 책임이라는 것은 생각보다 조용하고 집요하게 사람을 시험한다는 것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쩌면 사람은 다 알면 시작하지 못합니다.
모르기 때문에 건너가고, 서툴기 때문에 끝내 자기 힘으로 부딪쳐보게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다시 이 편지를 읽으며 저는 그날의 당신을 오래 바라봅니다.
헛헛하게 웃다가도 마음 한구석이 뜨거워지는 것은, 그때의 당신이 무모해서가 아니라 진심이었다는 것을 이제는 알기 때문입니다. 다 알지 못했지만 도망치지 않았고, 아직 감당해보지 않은 삶 앞에서도 자기 이름으로 서보겠다고 마음먹었으니까요.
사업은 좋아하는 일을 실컷 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사업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끝까지 지키고 싶은지, 무엇 앞에서 흔들리고 또 무엇 앞에서 다시 일어서는지를 오래 묻는 과정에 더 가까웠습니다.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일 같지만, 실은 자기 자신을 통과하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그때 빈센트 님은 30년 비즈니스를 꿈꾸라고 하셨지요.
그리고 그 끝에 남는 것은 결국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앞으로 10년. 그 시간 동안 켈리님은 성공보다 먼저 자신에 대해 조금 더 알게 될 것이고, 버티는 법과 놓아야 할 것을 구별하는 법도 아주 조금 배울 것입니다.
그리고 묻겠지요
남은 20년 동안, 당신은 무엇을 만들며 살고 싶은지.
어떤 이름으로 기억되고 싶고, 어떤 사람들과 끝내 함께하고 싶은지.
돌아보면 그날의 침묵은 약함의 순간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 앞에 처음으로 정직해진 순간이었습니다.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물러서지 않았던 순간.
어쩌면 그때, 당신은 처음으로 자기 삶의 주인이 되기 시작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늦었지만, 이제야 이 말을 건넵니다.
그날의 당신에게.
시작해주어서 고맙다고.
당신이 어떤 일을 시작하던 날, 혹은 삶의 중요한 결정을 내리던 날을 기억하나요?
그날의 당신은 무엇을 알고 있었고,
무엇을 알지 못한 채 한 걸음을 내디뎠나요?
다음 주 목요일, 2화 〈노동법을 지키는 회사〉가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