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전히 애송이 Sep 29. 2024

만취한 침입시도자의 실수

그러나 실수라 넘길 수 없는 일



며칠 전 취침시간에 맞춰 서서히 잠에 빠져드는데 몽롱한 정신을 깨우는 키패드 소리가 들렸다. 처음 그 소리를 인식했을 때는 어렴풋하던 것이 어느새 정신을 번쩍 깨웠다. 문간방에서 자던 내 귀에 선명이 들리던 그 소리는 우리 집 키패드에서 나고 있었다.


누군가 우리 집 키패드를 누르고 있다는 걸 인식하니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1인 가구로 집에 있는 사람이라곤 달랑 나 하나에, 400km 밖에 떨어져 사는 가족들이 자정이 넘은 시간에 나에게 연락 한통 없이 올리가 없으니 더 무서웠다.


평소에 스스로를 겁도 불안도 많을지언정 엿도 못 바꿔먹을 자존심에 그래도 꽤 용감하게 산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이런 일이 닥치니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기척을 죽이고 계속해서 키패드를 누르고 손잡이를 달깍 거리는 소리를 듣다가 먹통이 된 키패드 덕분에(?) 소강상태가 된 틈을 타 조용히 거실로 나왔다. 손에는

플라스틱 구둣주걱을 쥐고.(ㅋㅋ)


그렇게 거실에 서있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인터폰을 가리겠다며 포스터를 붙여뒀던 탓에 바로 화면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무의식 중에 인터폰에서 문열기 버튼을 누른 전적이 있는 탓에 아예 손을 대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다시 키패드를 누르고, 틀리고, 손잡이를 덜컹대는 어떤 침입시도자의 반복 행동 속에서 패닉에 빠진 나는 얼른 같은 오피스텔에 사는 친구에게 카톡을 보내놓고 전화를 걸었다. 아주 작은 목소리로 '카톡 봐. 카톡... 카톡 보라고!!' 속삭이고 전화를 끊었다. 곧 친구가 관리실에 연락을 했고, 우리 집으로 연락을 주기로 했단다.


오 마이 갓!


지금 나는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있는데 인터폰을 하겠다고????? 아니나 다를까 갑자기 인터폰이 아주 선명하고 맑은 소리로 울렸다. 어쩔 수 없이 온 집에 불을 켜고 인터폰을 받았다. 관리실에서는 당장 출동할 인력이 없으니 경찰에 신고를 하란다. 결국 내 손으로 1,1,2를 눌렀다.


'모르는 사람이 집 키패드를 누르고 손잡이를 막 잡아당기고 있어요. 10분쯤 됐어요!!!!'  

'주소 알려주세요!'

'OO로 123, ###동 $$$호요. 빨리 와주세요.'


경찰에 신고를 하는 와중에도 키패드를 누르고 실패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고 보니 저 사람이 키패드를 누르는 소리가 마치 내가 키패드를 누를 때도 같은 것처럼 느껴졌다. 이러다 어느 순간 띠리릭- 하며 문이 열릴 것만 같은 상상이 극한의 공포로 몰려왔다. 그러다 다시 키패드가 먹통이 된 모양인지 손잡이만 덜컹덜컹 만지는 소리가 들렸다. 공포를 몰아내려 애써 다시 친구와 통화를 했다. 그렇게 조금씩 패닉 상태에서 빠져나오고 있는데 또다시 인터폰이 울렸다. 관리실이었다. CCTV를 통해 복도를 보고 있는데 지금 아무도 없다고.


아무도 없어..?


그러고 보니 어느 순간부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점점 정신이 또렷해졌다. 전신을 감싼 잔떨림은 그대로지만 아까보다는 좀 더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상태였다. 그때 마침 출동한 경찰관에게 전화가 왔다. 집 앞이니 문을 열어보라고. 전화기 안에서 울리는 그 목소리가 현관문 너머에서도 언뜻 들리는 것 같았다.


경찰관 두 분이 집 앞에 서있었다. 자초지종을 설명했더니 이 근방에 오피스텔이 꽤 있고, 구조가 복잡하다 보니 술에 취해서 집을 잘 못 찾는 사람들이 종종 있어서 자주 출동하고 있다고. 조금 더 살펴보고 갈 테니 문단속 잘하고 다시 그런 일이 발생하면 절대 문 열어주지 말고 연락하라고 당부를 하고 경찰관은 떠났다.


가만히 다시 거실로 돌아와 소파에 앉아있는데 문득 세상 모든 소리가 예민하게 피부에 닿았다. 감각이 새파랗게 날이 선 느낌. 도저히 진정이 되지 않아 옆동에 사는 친구에게 와달라고 했다. 그 와중에도 친구가 위험할까 봐 계속해서 통화를 하면서 얼굴을 보니 그제야 힘이 탁 풀렸다.


친구와 마음을 진정시키며 잠깐 이야기를 나누다 우선 침대에 누웠다. 지금 잠들어도 2시간 후면 일어나야 할 정도로 아주 이른 시간에 출근해야 하는 친구는 금방 잠이 든 듯했다. 어둠 속에서도 무엇이라도 보겠다는 듯 두 눈을 깜빡이며 주변을 둘러보면서 깊은 밤 소음에 귀를 기울이다 억지로 눈을 감았다. 나 역시 출근을 해야 하고, 특히 아침에 중요한 보고가 있었기 때문에 잠깐이라도 눈을 붙여야만 했다.


... 결국 뜬 눈으로 밤을 새우고 출근 시간에 맞춰 집을 나섰다. 조용한 복도에는 아무런 흔적이 없었다. 간밤의 소란은 마치 없었던 일인 양 말끔하고 고요했다. 온몸이 무겁고 두통에 시달렸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집에 있는 것보다 회사에 가는 것이 더 마음이 편할 것 같아 출근을 했다.



그날 오전에 예정되었던 중요한 보고는 무슨 정신으로 했는지 기억나는 것이 없고, 오전 내내 가는 떨림을 느끼며 억지로 일을 하다 점심시간이 되고서야 조금씩 긴장이 풀렸다. 오후엔 관리실에 연락을 해서 cctv 열람을 요청했다. 결과적으로 우리 집 키패드를 누른 낯선 침입시도자는 바로 윗집 사람이었고, 술에 잔뜩 취해 비틀거리는 모습이 cctv에 확연히 찍혔다고 했다.


사실 대충은 짐작하고 있었다. 같은 오피스텔 입주민들 사이에서 이런 일이 왕왕 일어났다는 이야기를 들은 탓이었다. 어쨌든 자초지종을 알고 나니 마음은 놓였다. cctv를 대신 열람한 보안팀에서는 조심스럽게 이번 한 번은 실수로 보고 넘어가는 것이 어떠냐고 말을 건넸다. 무엇보다 내가 아래층에 살기 때문에 만에 하나 나쁜 마음으로 보복이라도 하려고 한다면 불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물론 나도 누가 그랬는지 범인을 잡아 어떻게 하려는 마음은 없었다. 다만 누가, 어떤 이유로 그랬는지 알고 싶었고 그걸 알아야 그나마 마음이 놓일 것 같았던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날 오후 내내 나는 안도와 분노를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집이라는 공간은 보금자리라고 해서 몸도 마음도 아늑하고 편안한 공간이다. 세상에 휩쓸리다 집에 들어섰을 때 비로소 어떤 것으로도 위협당하지 않을 것만 같은 도피처이자 안식처. 그런 내 공간이 고작 술에 취한 사람에게 위협당하고, 안전하지 않은 공간이 된 것이 너무 화가 났다. 게다가 그 취객은 이런 상황을 기억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기도 하고, 설사 기억한다 하더라도 별일 아는 듯 살아갈 테지. 누군가를 잠 못 들게 하고, 일상에 지장을 주고, 두려움에 떨게 했다는 사실은 까맣게 모른 채.


나는 이 일을 그냥 넘어가기로 했지만 내게 묻는다면 이런 실수는 해서는 안될 실수라 답할 것이다. 나이가 많든 적든 사람은 자기 행동에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하고 그게 음주가 허용된 어른이라면 더 길게 말할 것도 없다. 술에 취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고주망태가 되더라도 그게 무슨 상관이랴. 다만 자신의 행동이 누군가에게 피해를 입힌다면 그건 해서는 안될 행동이고, 다시 일어나는 일은 더더욱 없어야겠지.


이번 일을 겪은 후 주변에 물어보니 꽤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일을 겪었다고 했다. 나도 다음에 또 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좀 더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실수라 그냥 넘길 수 없는 일들, 다른 사람을 위협하는 일은 특히 '실수라는 핑계'를 대지 말았으면 싶다.


 

 

 


  


 

 

작가의 이전글 경력 이직 후 첫 업무를 맡고 느낀 양가적 감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