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Kelly You Jul 03. 2019

한 지붕 밑 다섯 여자

시트콤 같았던 자취생활


몰랐다.

그 집에 살게 된 나까지 포함해서 다섯 명 전부가 한국인일 줄은.


모두가 여자라는 사실에 행복하게 이사를 결정했고, 또, 다들 다른 나라에서 왔을까? 국적은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막상 이삿날이 되어 새 집으로 짐을 다 옮기고, 내 방에 살던 언니가 집 사람들을 소개해 주겠다고 하셔서 모두에게 인사를 하려고 하는데 공교롭게도 내가 도착했을 땐 다들 집을 비운 상태였다.


내 방에 원래 살던 언니는, 어떻게 이렇게 아무도 없냐며, 그래도 대충이라도 하우스 메이트를 알려주고 가겠다며 위층엔 누구누구가 있고, 옆방 누구가 있고.. 하고 이야기를 하는데.... 다 한국 이름이 아닌가!


-여기 사는 사람들, 다들 한국 사람이에요?

-(너무 당연한 표정으로) 몰랐어요?


그때는 몰랐지만, 내가 찾아보았던 한국 인터넷 사이트에 올라오는 대부분의 쉐어 룸 광고들은, 딱히 다른 국적이 명시되어 있지 않는 이상 집에 사는 사람이 모두 한국인이라는 뜻이었다. 또 나만 몰랐던 것이었다. 사실 모두가 한국인이란 걸 알게 된 후 난 정말 당황했다. 홈스테이를 떠나면서 또 꿈꿨던 자취 생활엔, 외국인 친구들도 분명 있었는데... 모두 한국인이라니. 이렇게 또 내 꿈은 멀어지는지? 그리고, 호주로 오기 전에 한국에서 정말 귀에 딱지가 앉게 들은 말이 있었다.


호주 가서, 한국인들이랑 살면서, 한국 음식만 먹으면서, 한국 친구랑만 다니면 절대 영어는 절대 늘지 않고, 너의 유학생활은 필히 실패할 것이다.


그땐 그걸 듣고 생각했다. 호주까지 가서 그런 바보 같은 짓을 누가 해. 나는 정말 달라! 나는 홈스테이에서 멋진 호주 가족과 그 구성원이 되어서 아침부터 밤까지 영어로 이야기하고 영어 신문을 읽고 영어 TV를 보면서 살 건데? 호주까지 가서 한국인이랑 살고 한국말만 하고 한국 밥만 먹으면 거길 왜 가.


하지만.... 삶이란 건 절대 예측 가능하지 않았고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도 않았다.


절대 그러지 않으리라 다짐까지 한 내가, 한국 사람들만 사는 집에 이사를 오다니. 호주에 도착한 지 5주 만에 나의 교환학생 라이프는 망조를 향해 내리막길로 내리막길로 치닫고 있는 것인가...?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집에 사는 사람들은 친해지지 않으래야 않을 수가 없었다. 내 바로 옆방에 사는 언니는 선희 언니였는데, 같은 학교에서 호텔경영을 전공하고 있었다. 처음에 언니 얼굴이 너무 어려 보이고 또 1학년이라고 하니까, 나는 지레짐작으로 나보다 어리다고 생각해 존댓말도 반말도 아닌 삐딱한 어조로 이야기를 했고 언니를 동생 대하듯 대했다. 며칠 뒤... 언니가 나보다 세 살 많다는 걸 알게 된 후 멘붕에 빠져 언니에게 사과를 했지만 언니는 아주 신나 하며, 어??? 내가 그렇게 동안인가????? 하면서 뛸 듯이 기뻐했다. 해맑고 늘 즐거운 언니였다.


위층 언니들은 1층에 빨래를 하러 내려오지 않는 한 만날 기회가 그다지 자주 있지 않았는데도, 곧 인사도 하고 말도 붙이고 친해지게 되었다. 같은 학교에서 언어학을 공부하는 민지 언니, 그리고 우리 중 제일 나이가 많아 모두가 '왕언니'라고 불렀던, 근처 미용실에서 헤어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던 지혜 언니가 있었다.


나머지 한 명은, 지금까지도 나의 가장 단짝 중 하나인 다미인데, 다미는 내가 이사 온 후 얼마 뒤에 이사를 왔다. 그런데 다미가 집에 이사 오게 된 계기가 재미나다.


다미도 나처럼 교환학생 프로그램으로 그리피스 대학교에 오게 되었고, 나랑은 다른 대학교라서 서로 모르던 사이였다. 그런데 학기가 시작된 어느 날, 오리엔테이션이 진행되던 강의실에서 우연히 내 옆자리에 앉게 되었는데, 뭔가 일본스러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어서 나는 다미가 일본 사람인 줄 알았다. 그러다 곧 다미가 한국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는데 말을 좀 해보니까 우린 같은 부산 사람이었고, 심지어 고향 집 까지도 가까운 거리였다. 그때 내가 전공으로 듣던 언어학 수업은 유학생이 정말 드물었고 거의 다 호주 현지 학생이었는데 그런 수업에서 한국인을, 심지어 나이도 고향도 전공도 같은 친구를 만나게 되었다는 건 혁명적인 일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둘이 단짝이 되지 않았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을 것이다.


정말 짧은 시간 안에 우리는 아주 친해졌고, 성격도, 성향도 너무 비슷해 호주에 있는 내내 최고의 콤비가 되어 브리즈번 방방곡곡을 누비고 다녔다.


그때 다미는 지내고 있던 집주인의 괴롭힘에 심신이 피폐해져 있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스트레스를 정말 많이 받고 있었는데, 때마침 우리 위층에 방이 하나 비어있어서 다미에게 이사를 권했고 다미는 집을 보지도 않고 무조건 OK를 외쳐 우리 집 다섯 명이 완성되었다.




우리 집 다섯 명은 점점 식사도 같이 하기 시작했고, 도시락도 같이 싸기 시작했다. 어느 날은 김밥이 먹고 싶으니 김밥을 싸자며 일을 크게 벌려 김밥만 몇십 줄을 말기도 했고, 저녁 무렵 마트가 문 닫을 시간엔 엄청 큰 장바구니를 들고 가 마트에 할인 가격이 붙은 케이크와 치킨들을 몽땅 쓸어와서 파티를 하기도 했다. 비싼 소주 대신 달달한 스파클링 와인을 마시고 프란체스카 시트콤을 보면서 함께 포복절도하며 매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어쩌다 내가 학교에서 집에 늦게 오는 날이면, 2층에서 언니들과 다미는 담요를 깔아놓고 화투를 치며 와인잔을 홀짝이다 귀신같이 내가 들어오는 문 소리를 듣고는, 왔으면 언니들 안주나 만들어 오라며 당장 냉큼 올라오라고 소리치며 내게 일거리도 주었다.


홈스테이에서 내가 철저히 남이었다면, 여기서는 매일 집에 오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비록 옆방 선희 언니는 엄마처럼 시시콜콜한 잔소리를 좋아했고, 왕언니는 설거지를 기피했고, 다미는 방청소를 자주 하지 않았고, 민지 언니는 요리 망손이었지만, 함께 사는데 그런 건 정말이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앞서 이야기한 대로 그 집에 들어가게 된 후 내 유학 생활은 내리막이었을까?

나는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다미와 언니들과 늘 그리웠던 한국 음식을 매일같이 해 먹는 바람에 요리 솜씨가 늘었고, 참고 나누고 함께 어울려 사는 법을 배웠다. 제일 중요한 건, 무엇보다도 외국에 있는 동안 단 한 번도 집이 그립고 가족이 그리워 몸서리친 적이 없었다는 점이다. 거기 사는 동안 내 가족은 그 집에 있는 우리 다섯 식구였다. 한 지붕 밑에 살고 한 솥밥을 먹으면 식구가 된다는 걸 그때 알았다.


호주로 오기 전, 물론 지금도 그렇지만, 특히 그때의 나는 어렸고 생각도 많이 짧았다. 그때 생각했을 땐 유학 생활에서 정말 배우고 싶었던 게 딱 하나 '영어'였기 때문에 한국인과 사는 것이 정말 지양해야 할 바라고 여겼지만, 훗날, 해외에서 공부하는 시간을 갖는다는 게 나에게 언어뿐 아니라 얼마나 많은 다양한 경험을 제공해 주었는지 알게 되었을 때, '집에 함께 사는 멤버'가 한국인이 아니어야 한다고 굳이 고집해야 할 일은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오히려 집에서는 한국어를 쓰고 한국 음식을 먹으며 가족 같은 사람들과 맘 편히 지냈기 때문에 나는 늘 마음의 여유가 넘치는 편이었다. 그런 여유 덕분에 밖에 나가서 여러 나라에서 온 다양한 친구들을 사귀고, 만나고, 우리 집에 초대하기도 하면서 영어도 배우고 학점 관리도 열심히 하면서 향수병 없이 성공적인 1년을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정 반대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만약 그때 그 집에 들어가지 않고 다른 경험을 했더라면 어떨까. 더 좋았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건 다시 과거로 돌아가 다른 선택을 해 보기 전까지는 정말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더 그때의 그 시간들을 사랑한다. 처음엔 잘못된 선택이라고 생각했지만, 잘못되기는 커녕 너무 소중하게 남은 그 시간들 그리고 그 사람들.


아직도 마음속에서 반짝거리는 그때의 써니뱅크 집이 문득 그립다.





매거진의 이전글 새로운 둥지를 찾아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