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Kelly You Jul 04. 2019

호주에서 만난 중국 친구들

다들 왜 이렇게 부자야....


호주에 오기 전, 솔직히 중국에 대해 안 좋은.. 아니 나쁜 이미지만 가득했다.


중국 하면 떠오르던 것들은, 무질서하고, 더럽고, 사람 많고, 어디서나 시끄럽게 떠들고, 아무 데나 침 뱉는 그런 모습들이었고 짱깨라는 차별적 단어를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하곤 했었다. 

무지가 불러온 행동이었다.




호주에서 본격적으로 교환학생 학기가 시작되기 전, 대학 부설 어학원에서 아카데믹 라이팅 관련 수업을 신청해서 들었다. 그 수업은 학교에 입학하기 전 영어 글쓰기와 리서치 위주로 가르쳐 주는 코스로 대학/대학원 과정 입학 전의 유학생들을 만나볼 수 있었는데, 충격이었던 것은 그 수업의 90%가 중국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첫 수업에 세계 각국의 다양한 학생을 기대하며 갔는데, 우리 반에 14명의 학생이 있었는데 그중 11명이 중국 학생이었다. 세명중 한 명은 나, 베트남 여학생 그리고 페루에서 온 남학생이었다. 11명의 중국 학생들은 서로 이미 모두 친구가 되었는지 반에선 중국어가 여기저기서 들려왔고 그 사이에 혼자 끼어 앉은 나는 여기가 호주인지 중국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솔직히 속으로 짜증이 났다. 호주까지 와서 중국 학생들만 가득한 이 교실에, 중국어가 웬 말인지...


그런데 며칠 뒤, 나는 중국 학생들이랑 아주아주 친해지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대니 (중국 이름: 쓰 다니)와 샤오한 (중국 이름:양 샤오한)과는 굉장히 친해지게 되어서 우리 셋은 거의 매일 붙어 다니게 되었다. 대니와 샤오한은 둘 다 시골 지역에서 온 여학생이었는데, 시골 지역이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성격이 굉장히 수더분했고 아이들이 순박했다.


무슨 말을 해도, 어딜 가게 되어도, 머릿속으로 이리저리 굴려가며 계산하는 나와는 차원이 다르게 화통했다. 내가 작은 것 하나를 나눠주면 다음날 그 열 배 정도를 가지고 와서 베풀어 주고, 한국에 대한 관심도 지대해서 내가 하는 한국말 하나하나에 드라마를 보는 것 같다며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날 쳐다봐 주었다. 대장금 드라마를 재미있게 봤다며 매일 마마님! 마마님! 쥬상저언하!!! 하며 나를 부르기도 했다. 나도 대니와 샤오한에게 중국말도 배우고, 서로 한국음식과 중국음식을 만들어 와 도시락도 나눠먹고 과제도 같이 하면서, 점점 내 영어도 하루가 다르게 늘기 시작했고 대니와 샤오한도 마찬가지였다.


수업시간에 재미난 일도 많았다. 어느 날은 토론 주제가 Democracy (민주주의)였는데, democracy가 무슨 뜻인지 몰랐던 대니와 샤오한은 내게 소곤거리며 'Hey, Kelly, what is democracy????'라고 물어보았고, 도저히 영어로 민주주의를 설명할 능력이 되지 않아 당황해서 '아....민주주의.....뭐라고 해야 하지...'라고 혼잣말을 했는데 대니와 샤오한이 '오! 민, 쭈, 쭈, 이!!!!' 하면서 바로 알아들어 셋이서 수업시간에 포복절도한 적도 있었다. 민주주의는 중국말로도 민주주의였던 것이다. 참으로 민주적인 그 단어...


처음엔 서로 이야기하다 막혀서 손짓 발짓으로 대화하는 적이 많았는데 나중에는 그러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술술 하면서 서로 우리 영어 많이 늘었다며 웃고 떠들곤 했다.


그런데, 그 아이들과 지내는 나날이 늘어갈수록, 나는 점점 빈부격차 비슷한 것을 느끼고 있었다. 같이 매점에 가서 군것질을 할 때에도, 한두 개만 집어도 비싸게 느껴지는 호주 물가 때문에 딱 하나만 집어 드는 나와는 달리 대니와 샤오한은 눈에 보이는 먹고 싶은 거는 다 집어 들고는 가격도 보지 않고 돈을 내고 거스름돈을 세지도 않고 그냥 집어넣곤 했다.


한 번은 대니가 들고 있는 가방이 너무 예뻐서 나도 이거 사고 싶다, 중국에서 산 거냐고 물었더니 호주에서도 살 수 있다며 다음날 같이 사러 가자고 했다. 샤오한도 오랜만에 쇼핑 가고 싶었다며 우리 셋은 시티에서 만나기로 했다. 대니와 샤오한은 익숙한 듯 시티의 어떤 쇼핑몰 안으로 쏙 쏙 잘 찾아 들어가더니, 어떤 명품 브랜드 샵으로 들어가선, 이 가방이라며 가방을 보여주는데 그 가방에는 네 자릿수 호주 달러가 찍혀 있었다. 정확히 어떤 브랜드였는지 얼마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지만 숫자 네 개를 보고 너무 충격을 받아 다시 한국돈으로 계산을 해본 뒤 그게 몇백만 원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어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자 대니는 가방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냐고 하더니 이것저것 다른 걸 보여주기 시작했다. 우선 놀란 가슴을 추스르며 다음에 사자고 얼른 가방 가게를 나왔는데 대니는 내가 가방이 맘에 들지 않았다고 생각했는지 다른 곳을 자꾸 가 보자고 하는 것이다. 다행히 샤오한이 자기 시계 하나 봐 둔 게 있다며 시계 가게로 이끌어서 내 가방은 잊혀졌고 샤오한은 당시 $800 정도 하던 시계를 이쁘다며 그 자리에서 바로 샀다.


그 당시 나는 한국보다 비싼 호주의 물가에 놀라 자판기에서 나오는 원두커피도 마음껏 사 먹지 못하고 있었다. 한국 우리 대학교 캠퍼스에서는 자판기 커피가 300원이었는데, 호주 자판기 커피는 원두를 갈아서 주긴 하지만 지옥같이 쓴 맛 주제에 가격이 2달러였다. 그때 환율이 천 원 정도였으니 한 잔에 2천 원 정도였다. 내가 좋아하던 김밥도 호주에선 한 줄이 6달러였고, 스시처럼 말아 놓은 김말이는 한 줄에 $2.5 정도였다. 캔 콜라도 자판기에서 $2였다. 한국에선 500원이면 마실 수 있었는데. 그때 아마 내가 체감하던 호주 물가는 한국의 3-4배였을 것이다.


늘 계산하며 점심을 싸 오며 아끼며 살았는데, 몇천 불짜리 가방과 몇백 불짜리 시계를 아무렇지도 않게 사는 내 친구들이라니. 매일 같이 배낭 메고 버스 타고 학교 매점에서 감자튀김과 햄버거를 같이 사 먹으며 놀았던 친구들인데, 갑자기 그 친구들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곤 하우스 메이트 언니들이 한 말이 떠올랐다.


여기선 한국 사람이 제일 가난해~ 중국 사람들 진짜 부자야!! 상상초월이라니까!!!


당시 어렸던 나한텐 정말이지 그게 상상초월 문화충격이었다. 그 후로, 우리 반의 중국 친구들을 더 면밀히 관찰해 보니, 매일같이 후줄근하게 입고 머리는 까치집을 해서 오던 남학생의 거적때기 같은 옷은 버버리였고 츄리닝만 입고 낡아빠진 가방에 녹슬어 보이는 체인이 달린 크로스백을 메고 오던 여학생의 가방은 샤넬 빈티지였다. Jack이라고 항상 수업을 못 따라가 영어로 예스, 예스, 아이 노! 아이 노! 만 하고 웃던 키 큰 중국 남학생의 시계는, 자그마치, 3000만 원짜리였다.


그 시계는 중국 학생들에게도 비쌌던지 중국 친구들 두세 명이 달라붙어 중국 위안화를 호주 달러로 계산해 주고, 나는 그 호주 달러를 다시 한국 돈으로 계산한다고 10여 분동 안 머리를 굴려야만 했다. 그때 1달러=1000원, 10달러=10000원은 익숙했지만 30,000달러는 30만 원인지 300만 원인지 3000만 원인지 너무 헷갈렸다. 한참이나 계산기로 서로 옥신각신 후 그 시계가 3천만 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사실 난 잭이 좀 많이 어리숙해 보였기 때문에 네가 가격을 잘못 안 거 아니냐고 물어봤고, 억울했던 잭은 급기야 랩탑을 꺼내 그 시계를 찾아 보여주기까지 했다.


나는 3천만 원짜리 시계를 처음 만져봐!!!! 하면서 내가 막 웃자 대니와 샤오한도 나도 이건 처음 본다며 같이 웃었다.


그러고 곧 12월이 찾아왔는데, 호주의 학교들도 크리스마스를 맞아 긴 방학에 돌입했고 그와 더불어 거의 모든 중국 학생들은 본국으로 돌아가 휴가를 보낸다고 했다. 그때도 사실 좀 충격이긴 했다.


-너네들 나랑 비슷하게 10월에 호주에 왔잖아, 그런데 12월 초인 지금 중국에 간다고?

-왜?? 너는 안가?? 어차피 방학이고 할 일도 없잖아!!

-근데 너네 호주 온 지 두 달도 안 됐잖아!!

-(이해 안 되는 표정으로) 그게 상관이 있어???

-(말문 막힘)


중국 친구들과 나는 사는 세상이 달라서, 많은 부분 우리의 대화는 이런 식이었다. 식당에 가면 다 먹지도 못할 거면서 엄청 많이 주문하고, 서로 낸다고 옥신각신 싸울 때 나는 조용히 눈치만 보며 옆으로 빠져 있어야 했고 친구들이 모두 본국으로 돌아갈 때 왜 안 가냐는 물음에 딱히 할 대답도 없었고 가방도 왜 안 사는지 이야기해 줄 수가 없었다.


난 이 정도 돈은 없어.. 이 말을 그때 차마 못 했었던 것 같다.


아마 중국 친구들도, 나랑은 너무 다른 세상에 살았기에, 돈 때문에 고향에 돌아가지 않는 걸, 가방을 사지 않는 걸 생각도 하지 못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지금 대니는 시드니에서 대학원 과정까지 하고 시드니의 한 회사에 취업해 잘 다니고 있고 샤오한은 중국으로 돌아가고 몇 년 뒤 연락이 끊겼다.


사실 지금 와서 살짝 후회하는 일이지만, 그때 대니와 샤오한이 중국어 가르쳐 줄 때 더 열심히 배워 둘 걸. 그땐 진짜 진짜 몰랐지, 그로부터 6년 뒤, 내가 중국 쑤저우에 가서 살 게 될 거라곤.


니 뻔떤! (바보야)

션징삥 (미친놈)

니 샹 쓰마 (죽고싶나)


이런 쓸데없는 말만 잔뜩 배웠었는데... 덕분에 중국에서 저 단어가 들릴 때마다 대니와 샤오한 생각을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한 지붕 밑 다섯 여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