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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elly You Jul 07. 2019

너의 정체를 밝혀라

중국 사람이니 한국 사람이니?


무슨 일이든 어느 곳이든 시간이 지나가면 새로웠던 일들도 점차 시들해지고 신기했던 것들도 당연해진다. 내 호주 생활도, 대학 부설 어학원 생활도 점점 그렇게 밋밋해지고 있던 무렵이었다.


중국 사람만 가득하다고 생각했던 어학 프로그램에는 여러 다른 코스가 있었고 잘 찾아보니 한국 사람이 특히 많은 코스도 있었다. 그중 한 코스에는 방학을 맞아 안동대학교의 영어교육과 학생들이 많이 공부를 하러 건너와 있었다. 캠퍼스엔 한국말이 심심찮게 들려왔고, 곧 그 학생들과도 많이 친해지게 되었다.


어느 날, 학교 카페테리아에서 밥을 먹고 커피를 한 잔 들고 다시 교실로 돌아가던 길이었는데, 친해진 안동대학교 친구 희진이가 다른 모르는 친구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슬쩍 인사를 하고 지나가려는데 희진이가 인사 나누라며 이야기를 하고 있던 친구를 소개시켜줬다. 얼핏 둘이서 한국어로 이야기하는 걸 들었기 때문에 안녕하세요, 하면서 인사를 하자 그 친구도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하고 인사를 했다. 여기 언제 왔냐, 무슨 프로그램으로 왔냐 등등 한참 이야기를 하고 있다가 어디서 왔냐고 물으니 이야기를 나누던 친구는 씩 웃으면서 '저 중국에서 왔어요.'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호주에선 이런 종류의 농담도 통하나? 순간 굉장히 당황스러웠지만 '에이, 저는 부산에서 왔는데.. 아 중국에서 유학하신 거예요?' 하고 다시 물으니 그 친구는 또 씩 웃으면서 '저 중국사람이에요~'라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순간 굉장히 당황했다. 이건 무슨 경우고 처음 보는 사람한테 자기가 자꾸 중국 사람이라고 우기는 한국인이라니... 신박하게 어이가 없었다. 내가 재차 당황해 교포인가, 중국으로 이민을 간 사람인가, 농담인가, 아니면 조선족이라는 그런 사람인가 하고 온갖 머리를 다 굴리고 있는데 옆에 있던 희진이가 깔깔깔 웃으면서 '루루 정말 한국말 잘하지? 진짜 중국 사람이야. 나도 처음엔 안 믿었어!!!!'하며 진지하게 이야기를 했다.


둘의 표정을 보니 정말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았다. 하지만 멩세컨데, 나는 한국에서 중국과 카자흐스탄 학생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쳐 준 적도 있고, 중국 사람이 한국어를 할 때 들리는 특유의 악센트가 굉장히 익숙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저렇게 완벽한 표준어를 구사하고 한 치의 어색함도 없는데 본인이 중국 사람이라고 하는 건... 분명 하나밖에 없다. 


한국 아이들이 미국에서 유년기를 보내면 영어를 곧잘 습득하는 것처럼, 분명히 한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구나!!!! 그 엊그제 배운 촘스키가 이야기했던 <언어 습득의 결정적 시기>를 한국에서 보낸 게 분명해!!!라는 결론을 혼자 내리고는 '한국에 얼마나 사셨길래 이렇게 잘하시나요??'라고 물어보자 루루는 '저 여행만 한번 다녀왔어요. 한국에 가서 살아보는게 꿈이에요..'하며 경악할 만한 대답을 하는 게 아닌가... 


믿을 수가 없어서 그저 당황스럽기만 했다.





나는 루루와의 첫 만남에서 보인 뜨악했던 내 태도가 무례하게 보였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했다. 그게 미안하고 두고두고 기억에 남아서 루루한테 언제 한 번은 우리 처음 만난 날 기억하냐니까 루루가 '나 그때 너무 기분 좋았어, 네가 나 중국 사람이란 거 안 믿었잖아. 내가 한국말 잘한다는 뜻이잖아...!'라고 이야기한 것이 기억이 난다.


루루는 광저우(광주) 옆의 작은 도시 샨터우가 고향인, 꼭 한국 사람처럼 생긴 나보다 한 살 어린 친구였다. 중국은 땅덩이가 워낙 크기 때문에 수백 개의 방언이 존재하고 그 방언끼리는 너무나 상이해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데, 루루의 고향 산터우도 산터우의 방언이 있는데 이 방언은 중국 표준어와 완전히 다른 언어라고 한다. 그러다 보니 루루는 산터우 말도 하고 중국 표준어도 할 수 있었는데, 이것만 해도 이미 2개 언어인데, 심지어 루루가 사는 광저우는 홍콩과 바로 옆이라 홍콩에서 쓰이는 광둥어도 함께 쓰이는 곳이다. 당연히 루루는 광둥어에도 능통했다. 산토우어, 중국 표준어, 광둥어, 이 세 개는 어떤 언어가 편하고 안 편하고도 없이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었고, 그다음으로 한국어를 (내 기준엔 원어민처럼) 하는데 정작 본인은 아직 배울 게 많다며 불만이었다. 그리고 호주에 유학을 올 만큼 영어도 잘했다.


루루의 말을 빌리자면, 산토우어=중국어=광둥어> 한국어> 영어 이 순서대로 자신 있는 언어라고 했는데, 정말로 신기한 것은 루루는 한국에 어학연수를 간 적도 없고 따로 대학에서 한국어를 전공한 것도 아니라고 했다. 


루루는 가수 비(Rain)의 왕 팬이었는데, 비가 너무 좋아서 한국어를 배우게 됐고 그러다 보니 한국 드라마에 빠져서 주야장천 온갖 드라마와 예능 프로그램들을 섭렵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거기서 모든 말을 배우게 됐다고 한다. 많은 중국어 화자들 한국 발음을 어려워하는데 반해, 루루의 고향 산터우어의 발음 체계가 한국어와 정말로 비슷해서, 한국어 발음조차 원어민에 가깝게 할 수 있게 되었고, 쓰이는 표현 등은 드라마와 예능을 통해 습득하다 보니 책으로만 한국어를 배운 사람들에 비해 일상생활의 언어를 체득하고 있어서 그냥 루루의 말을 듣기만 해선 전혀 외국인이라는 것을 알 수가 없던 것이었다.


루루의 한국어 어휘가 어느 정도였냐면, 탕수육 소스 안에 든 시꺼먼 버섯의 정체가 뭔지 한국인 3명이 논의하고 있을 때 슬쩍 '그거 목이버섯이잖아'라고 알려주는 정도였다. 그런 단어는 도대체 어디서 배웠냐고 기절초풍을 하면 씨익 웃으며 '1박 2일에서 봤어...'라고 대답하곤 했다.


한국 문화와 최근 이슈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어서 '루루야, 너 이름 한국에 가면 루루 그거 쓰면 안 돼. 왠지 아니?' 하면 루루는 '비데 이야기할 거면 하지 마..!'라고 대답했다. (당시 '룰루'라는 비데 상표가 룰루 하세요~ 하는 CF로 유명했었다)


어느 날은 루루가 나한테 와서 '근데 있지.. 너 부산 사투리 너무 귀여워.. 나도 배우고 싶어' 하며 이야기 한 적도 있었다. 사실, 고백하자면, 나도 호주에 가기 전에는 부산에만 평생 살았던 부산 촌뜨기였기 때문에 내가 사투리를 쓰고 산다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부산 사람이 부산에서 부산 말을 쓴다는 건 너무 당연하고, 부산에선 내가 쓰는 말이 곧 표준어였기에, 호주에서 사람들이 내가 입만 떼면 부산 사람이냐고 물어서 내 얼굴에 부산 출신이라고 쓰여있나, 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루루까지 와서 내 사투리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니...


사실 루루의 표준어 악센트와 실력은 내가 어설프게 따라 하는 서울 말 보다 100배 나았다. 그로부터 2년 뒤 루루가 한국에 와서 머물 일이 생겨 서울까지 올라가 루루를 만나고, 은행 계좌를 여는 것을 도와주러 갔는데 은행 직원분이 어설픈 서울말을 쓰는 내가 은행 계좌를 열러 온 외국인이고, 루루가 날 도와주러 온 한국 사람인 줄 착각한 적도 있었다. 그 땐.... 참으로 당황스러웠다.



굳이 찾자면 루루의 단 하나 약점은 쓰기였다. 언어를 언어 자체로 접하다 보니 한국어 쓰기를 어려워해 루루가 글을 써오면 루루 글을 교정 봐주곤 했는데 그럴 때 조금 어색한 표현이나 맞춤법을 고쳐주면 루루는 뛸 듯이 좋아했다. 같이 카페에 앉아서 난 루루의 한국어를 교정 봐주고 루루는 내 영어 과제를 봐주는 기이한 스터디가 호주에 있는 동안 계속되었고, 그런 시간들이 모여 루루와 나는 단짝이 되었다.


한국어를 잘하는 신기한 소녀는 졸업 후 고향으로 돌아갔고 그곳에서 멋진 커리어를 쌓고 있다. 지금은 본인을 꼭 닮은 딸 하나 아들 하나를 낳고 남편과 잘 살고 있는데, 가끔 '나야~ 너 요즘 뭐해' 하고 전화가 오면 녹슬지 않는 한국어 실력에 이따금 또 놀라곤 한다.



또 한번 하는 이야기지만, 그때는 내가 6년 뒤 중국 쑤저우에 가게 될 줄 몰랐다. 그런 줄 알았으면 루루한테 중국어를 좀 배워 둘걸... 루루가 가르쳐 준다고 할 때 배웠어야 했는데, 내 살아 생전 중국어를 쓸 일은 없을 줄만 알았다. 두고두고 후회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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