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선 극혐자입니다만...
호주에 학생비자로 가면, 그때는 주 20시간 동안 합법적으로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었다. 진즉 알고 있었지만, 아직 영어도 익숙하지 못하고 어디서 알바를 해야 할지 알 수도 없어서 어영부영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새 정신 차려 주변을 둘러보니, 옆방 선희 언니도 한국 바베큐 식당에서 알바를 하고, 윗방 언니들도 선글라스 판매점, 한국 식당 등에서 일을 어떻게 구해서 하고 있었다. 호주는 최저임금이 높아서 주 10시간만 일을 한다고 해도 1주일 방 세 정도는 벌 수 있어서 씀씀이가 크지 않은 학생들에겐 짭짤한 수입이 되곤 했다. 언니들은 알바를 시작한 후로는 외식도 잦아지고 비싸 보이는 케이크도 곧잘 사 오곤 해 언니들이 부럽기도 했다.
언니들에게 알바를 어떻게 구했냐고 물어보자 영어로 이력서를 쓰고 주변 가게들에 직접 가서 건네주기도 하고 메일로 지원했다고도 하고 전화로 물어봤다고도 했다. 사실 영어로 이력서를 써 본 적도 없고 직접 가서 이력서를 건네 줄 용기도 나지 않아서 늘 마음만 알바를 하고 싶지 실제로 행동에 옮기지는 않고 있었다.
그러다 결정적으로 알바를 구해야겠다고 다짐한 시기가 왔는데 12월을 맞은 호주의 방학과 휴가 기간이었다. 학교도 방학을 하고 친하게 지내던 중국 친구들도 다 본국으로 돌아가고, 언니들은 각각 알바와 직장 일 때문에 바쁜데 나는 정작 아침에 눈 떠서 저녁까지 별로 할 일이 없었다.
아침에 느지막이 늦잠을 자고 일어나서 토스트와 시리얼로 아침을 간단히 먹고 나면 집에는 아무도 없었고 정말 본격적으로 할 일이 없었다. 그렇게 무료한 날들을 계속 보내다가 정말로 이렇게 해서는 안 되겠다고 다짐하고는 구인 구직 사이트를 뒤져 집 근처의 레스토랑과 카페 등에 이력서를 보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전화가 오지 않았다. 역시 알바는 내 인연이 아닌가 보다, 하고 포기하고 있을 무렵, 전화가 울렸다.
떨리는 마음을 붙잡고 전화를 받았다.
-Hello?
-안녕하세요? 알바 지원하신 분이시죠?
-아, 네, 안녕하세요, 맞습니다.
-지금 학생비자로 있는 거예요? 호주 언제까지 있는데요? 워홀 비자 아니죠?
-네, 저 지금 학생비자로 있고 앞으로 8개월 정도 더 있어요.
-그럼 지금 면접 보러 올 수 있나요?
걸려온 전화는 한국 사람이었다. 30-40대 정도로 들리는 한국 남자의 목소리였는데, 대뜸 지금 면접을 보러 오라고 해서 당황했지만 어떻게 온 기회인데 하는 마음으로 바로 버스를 타고 식당으로 갔다. 버스를 타니까 10분도 걸리지 않아 도착하는, 집과 가까워 위치는 정말 괜찮은 곳이었다.
식당이 구석에 숨어있어 어렵게 찾아 들어갔는데 예상과는 다르게 정말 작은 식당이었다. 두 명이 앉을 수 있는 테이블이 6개 정도 놓여있었고, 1인이 앉을 수 있는 바 자리가 3석이 있는, 손님이 최대 15명밖에 오지 않을 법한 정말 작은 식당이었다. 사실, 이 식당을 보는 순간 너무 마음에 들었다. 옆방 선희언니가 대형 한국 고깃집 식당에서 얼마나 갖은 고생을 하는지 봐 왔기 때문에, 일식이라는 것도 마음에 들었고 몇 개 안 되는 테이블도 아주 좋았다.
사장님은 3-40대로 보이는 남자 셰프였는데 날 보자마자 대뜸 반말을 했다.
-어. 여기 앉아봐. 교환학생으로 왔다고? 그럼 영어 좀 하냐? 점수 있냐?
-네, 아이엘츠 점수 있어요.
-집은 어디야 버스 몇 번 타고 왔어
-130번 타고 왔어요.
-아 그거 자주 있는 노선이네 됐다. 너 잘 됐네. 온 김에 일 해보고 가지? 영어 이름 있냐?
-네. 외국 친구들은 켈리라고 불러요..
-지금 저녁에 원래 홀 보던 애가 나가. 걔 자리 네가 할 거니까 잘 배워라.
뭔가 굉장히 얼떨떨했지만, 딱히 거절할 명분이 없어서 당장 그날부터 일을 시작하기로 했다. 식당은 5:30pm에 저녁 장사를 시작하는데, 다섯 시 이십 분이 되자 2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 한 명과 내 또래로 보이는 여자 한 명이 들어왔다. 역시나 둘 다 한국 사람이었다.
-야. 얘 오늘부터 트라이얼이다. 잘 가르쳐 줘라. 이름 켈리란다. 너네랑 같은 학교다.
-아.. 안녕하세요 잘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벤입니다 주방 보조를 하고 있어요.
-안녕하세요 에이프럴이고 제가 곧 그만두게 돼서 새로 오셨나 봐요...! 잘 가르쳐 드릴게요.
뭔가 첫인상이 좋지 않은 사장과는 달리, 훤칠한 인물의 벤 오빠랑 에이프럴은 정말 선한 웃음이 예쁜 호감형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고작 해봐야 15명이 앉을 수 있는 좁은 가게에, 부엌에 있는 사장과 벤 오빠 그리고 홀에 에이프럴과 내가 서니까 가게는 이미 꽉 차 버렸고 이런 작은 가게에 사람이 4명이 있다는 것이 조금 이상하고 당황스러웠다. 저녁 내내 손님보다 직원이 더 많을 것 같았다.
어쩔 줄 몰라 눈알만 굴려대던 날 붙잡고 에이프럴은 테이블 번호, 주문받는 방법, 계산기, 카드기 사용 등을 빠르게 가르쳐줬고, 미처 그것들을 다 배울 새도 없이 손님이 하나둘씩 오기 시작했다.
들어오는 손님을 보며 '어서 오세요'라고 하고 싶었지만 영어로 '어서 오세요'가 뭐지??? 여긴 일식당이니까 '이랏샤이마세'라고 해야 하나?? 짧은 순간에 온갖 생각을 하고 있자 에이프럴이 얼른 나가서
-Hi How are you today? Table for two? 하며 물어보고 테이블을 안내해주었다. 그런데, 고요했던 그 작은 가게에, 그때부터 순식간에 테이블 6개가 모두 찼고, 포장 주문을 하려는 전화가 끝도 없이 울려대기 시작했다.
사실 식당 일이라는 게 주문을 받고, 주방에 주문을 전달하고, 나온 음식을 테이블로 서빙한 후, 계산을 하면 되는 어떻게 보면 간단한 일이었는데, 그 간단한 일도 그날의 내겐 아니었다.
모든 것을 영어로 하는 게 일단 아주 낯설었고, 더 난관은, 각종 생선이었다.
일식집에는 tuna(참치 회), salmon (연어) 그리고 king fish(방어 종류) 이렇게 세 종류가 초밥으로 나가고 있었고 롤에도 들어있었는데 롤에는 raw tuna (참치 회)가 들어가는 것도 있고 cooked tuna라고 쓰인 참치 캔이 들어가는 것도 있어서 나는 본격적으로 헷갈리기 시작했다.
또, 나는 생선을 아주 싫어해서 일절 먹지 않기 때문에 겉으로 봐선 그땐 무엇이 참치고 연어인지도 모르는 생선 무식자였는데, 무엇이 영어로 튜나인지, 쌔먼인지, 킹 피쉬인지는 도저히 알 길이 없었고, 급기야 cooked tuna와 raw tuna의 주문을 잘못 받아 손님들에게 잘못 서빙되는 실수까지 했다.
에이프럴은 넘치는 전화를 소화하느라 전화기 앞을 떠날 수가 없었고, 나는 처음 온 일식집에서 배우지도 않고 익숙하지도 않은 일을 하느라 눈알이 돌아가다 못해 빠질 지경이었다. 주방에서는 디쉬가 밀렸으니 얼른 서빙하라고 소리를 질러대고, 그 와중에 나는 그 접시가 킹 피쉬인지 쌔먼인지 튜나인지 물어봐야만 했다.
-사장님, 이거 지금 무슨 생선인가요?
-아, 씨X, 야 너 등신이냐? 보면 모르냐??
순간 너무 놀라 손이 떨렸다. 사장은 물어보는 내 면전에 대고 욕을 하며 소리를 질렀고, 벤 오빠가 얼른 킹피쉬 킹피쉬 하고 뒤에서 입 모양으로 알려주었다. 놀란 정신을 수습할 새도 없이 밀려드는 포장 손님의 계산과 테이블 정리를 해야 했고, 5시 30분에 시작한 저녁 전쟁은 8시 정도가 되어서야 고요해졌다.
8시가 되자 사장은 웃는 얼굴로, 내일은 런치 때 나와라, 12시다. 하면서 나보고 퇴근하라고 했고, 본인도 담배를 태우러 가게 밖을 나섰다. 지금 웃고 나간 그 사람이, 방금 나한테 심한 욕을 한 사람이 맞나? 당황해서 그 뒷모습만 쳐다보고 있자 주방에서 벤 오빠가 내 표정을 읽었는지 씨익 웃으면서 '사장님이 바쁠 땐 좀 그래요. 주방일이란게 좀 그렇잖아요. 그래도 뒤끝은 없어요. 오늘 첫날이라 힘들었죠? 내일 봅시다!' 라고 하는 게 아닌가.
꾸벅 인사는 하고 나왔지만 내일 올지 안 올진 오늘 다시 생각해 봐야지, 저 사장은 정말 돌아이인거 같네, 나는 혼자 중얼거리며 터덜 터덜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오니 피로가 쏟아져 그대로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