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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elly You Jul 09. 2019

일식집 알바의 나날들

결국 다시 갔네... 쪼글 (ㅠ)


다음날 아침.


어제의 고된 노동으로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보통 9시나, 정말 늦어도 9시 반에는 눈을 떴는데, 찌뿌둥-한 몸을 겨우 일으켜 시계를 보니 11시였다. 깜짝 놀라 스프링처럼 튕겨 일어나 앉아서 생각을 했다.


아.. 정말 가기 싫다.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안 간다면 지금 전화를 해야 할 텐데 뭐라고 전화를 해야 하지.

그냥 솔직히 못 한다고 할까...

지금 와서 못 간다고 하는 건 무책임한 행동일까?


별의별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고, 어제 버럭 욕을 하던 사장의 모습과 그러다 웃으면서 잘 가라고 해주던 사장의 모습과, 다정하게 대해 주던 에이프럴과 벤 오빠의 얼굴이 하나씩 스쳐 지나갔다.


솔직히 전화도 없이 그냥 안 가버리면 그만이었지만, 그러기엔 너무나도 기분이 찝찝했고, 욕 한번 들었다고 다음날 안 나가는 게 슬쩍 자존심도 상했다. 그리고.. 막상 여길 가지 않으면 오늘도 할 일이 없었다. 보나 마나 뻔한 심심할 것만 같은 하루. 아주 길 나의 하루.


그래. 일단 오늘 한번 더 나가보자. 그리고 만약에 그만두게 되더라도 얼굴 보고 왜 그만두는지 정확히 이야기를 해야지 이렇게 그냥 안 가는 것보단 나은 선택 같아.


이렇게 생각이 미치자, 얼른 세수를 하고 옷을 챙겨 입고 아침을 먹을 새도 없이 출근 버스에 올랐다.



10여분 정도 일찍 도착하니 사장 혼자 출근을 해 주방에서 이리저리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원래는 아침 열한 시 반에 런치 장사를 시작해 12시까지는 조금 한가한 편이라 혼자서 있다가 12시에 알바가 와서 홀을 보고 계산을 하는 식인데, 그날따라, 매장은 굉장히 바쁜 상태였고 사장 혼자서 이리저리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헉. 아무도 없나? 나 오늘 혼자 해야 하나? 망할 참치인지 튜나인지 쌔먼인지 이름부터 생긴 것까지 헷갈려 죽을 것만 같은데 내가 전화도 받고 혼자 해야 하는 건가? 왜 아무도 없는 거야 망할!!!!


-켈리 일찍 왔네? 야 오늘 갑자기 이거 왜 이러냐, 이거 빨리 4번 테이블에 나가라 주문 밀렸어 빨리 움직여 미소 된장 두 개 빨리 만들고.

-네!


대답은 했지만 멘붕이었다. 미소 된장 만드는 건 어제 배운 적이 없는데... 물어보면 또 욕하려나? 아침부터 욕 듣고 싶지 않은데... 얼른 서빙을 하고 조심스럽게


-저, 미소된장은 어떻게 나가면 되나요?


하고 묻자


-야 뭘 일일이 물어봐!! 저 위에 옆에 선반 보면 라면스프 같이 생긴 거 있어 그거 풀어서 물 부어서 나가!!


하는 해괴한 호통이 되돌아왔다. 모르는 건 물어보라고 배웠는데.... 짜증이 치고 올라왔지만 아 뭐 딱히 정해진 절차도 없고 그냥 나 알아서 대충 하면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미소 된장 봉지를 뜯고 대충 미소 된장 그릇같이 생긴 걸 찾아서 물을 부었다. 물도 얼마나 부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지만 물어보면 분명히 또 성질을 낼 거니 적당히 대충 알아서 부어서 서빙을 했다. 된장을 받은 손님들이 스푼은 왜 안주냐고 물어서 아차 싶어 스푼도 얼른 찾아서 함께 냈다.


점심 장사는 그럭저럭 할 만했다. 저녁과는 달리 벤또라는 일본식 도시락 종류가 주로 팔렸고, 데리야끼 치킨 덮밥, 장어 덮밥, 닭튀김 덮밥 같은 내게도 친숙한 덮밥류가 주 메뉴라 생선 이름이 헷갈리는 일도 없이 척척 서빙을 마쳤고 손님들이 요청하는 것들도 대충 내가 알아서 맘대로 해결했다.


난관은 전화였다.

그런 일을 하는 도중 틈틈이 포장 주문 전화가 왔는데, 유달리 전화로는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전화를 받자마자 호주 사람이면 긴장부터 되었다. 정말 용건만 단어 단어로 말해 알아듣기 아주 편한 중국 사람들과는 달리 호주 사람들은 무슨 그런 쓸데없는 이야기를 길게 길게 하는지...


한국어로 써 보자면 중국 사람은 벤또 1번. 2번. 포장이요. 얼마죠? 이렇게만 하는 반면, 호주 사람들은, 안녕하세요 저 주문전화 좀 하려는데요 주문 많이 밀렸나요? 벤또 1번에 치킨 대신 뭐 넣어주시고 락교 많이 넣어주시고 포장할 때 따로따로 넣어주시고 젓가락 말고 포크 주시고 어쩌고 저쩌고... 같은 요구사항이 아주 많고도 디테일했다.


그래도 대충 결국 내용인즉슨 무엇 무엇을 포장해 달라, 언제 찾으러 가겠다, 라는 것이니, 주문자의 이름과 메뉴 전화번호를 기록해 두고 가격을 적어두면 되었다.


그런데..


전화로 어떤 호주 여성분이 '일 라이스' 두 개를 주문하는 것이었다. '일 라이스'가 도대체 뭐람? 이름도 희한하네. ill, rice, 아픈 밥이라니?? 메뉴를 다시 한번 찬찬히 살펴보니 일 라이스라는 건 메뉴에 없었다. 미안하다고 우리 그런 메뉴 없다니까 그 호주 여성분은 며칠 전에도 먹었는데 왜 없냐며 마구 따지는 것이었다. 잠시 기다리라고 하곤 사장한테


-사장님 이 분이 일라이스를 찾으시는데요... 그런 거 있나요?


하고 물어보자 또


-메뉴 보고 없는 거 없다고 하면 되지 뭘 물어봐 또!!!!!!!!!!!!!


하는 호통만이 되돌아올 뿐이었다. 성격 파탄이 이런 분을 두고 나온 단어인가.


전화에 대고 다시 한번 그 메뉴가 없음을 확인시켜 주자 그 호주 여성분은 엊그제도 먹었는데 없는 게 말이 되냐며 화가 나서 전화를 끊으셨다. 다른 곳이랑 착각한 게 분명했다.


한창 점심 장사를 마무리하고 있는데, 누군가 씩씩대면서 들어왔다. 하이 하고 인사를 하자 대뜸 메뉴부터 집어 들더니 메뉴의 'Unagi Dong (우나기 동 - 장어 덮밥)'을 가르치면서


-THIS IS THE EEL RICE!!!!!! (이게 장어 덮밥이잖아!!!!!!!!!!!!!) WHY DID YOU SAY YOU DON'T HAVE THIS!!! (있는데 왜 없다고 해!!!!!!!!!!!!!!!!)


하곤 소리를 치시는 게 아닌가............


고놈의 망할 장어는, 영어로 EEL이었고, EEL은 일본어로 우나기였다. 메뉴에는 그것이 영어로 Unagi Dong (우나기 동)이라고 표시되어 있었고, 우나기=EEL 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 나는, 그분이 그 메뉴를 지칭하는 줄 모르고 단순히 이름만 보고 없다고 우긴 꼴이 되어버린 것이다.


몰랐다고 내 실수를 인정하고 사과를 드리며 지금이라도 주문하시겠냐 물으니, 그 호주 여성분은 호통만 치러 발걸음을 하셨는지, 그냥 가게를 나가버렸고, 고요해진 가게에 서 있는 나의 뒤통수가 따가워지기 시작했다. 무거운 정적을 깬 건 사장의 호통이었다.


-야 너 바보냐?? 교환학생이니 뭐니 영어 잘하는 줄 알고 뽑아놨더니 일이 우나기인 것도 모르냐??

-죄송합니다. 제가 생선을 안 먹어서요...

-모르면 물어보던가! 왜 니 맘대로 없다고 해!!!!

-제가 아까 물어봤는........

-아 됐어 됐어 너 퇴근해 저녁에 5시 반에 다시 와


사장은, 치사하게 내가 물어본 게 기억이 나 대화를 급 마무리 지은 게 분명하다.


그냥 나 잘라주셔도 되는데 굳이 저녁에 또 출근하라고 하는 건 뭐람?? 이상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왠지 모르게 나는 저녁에 또 출근을 했고, 저녁에도 괴상한 실수를 연발했다.


저녁 장사 중, 전화로 주문이 오는데, 그 호주 남성분의 말은 웅얼웅얼 정말 도저히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내가 자꾸 다시 이야기해달라고 하자 그 남자분은 화를 내면서 안시켜!! 안시킨다고!!!! 하며 전화를 끊었다.


사장은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 사실대로 이야기하면 또 호통이 날아올까봐, 그냥 맘대로 '아 이상한 스팸전화에요' 하고 둘러댔다. 그러자 요즘 스팸 전화가 자주 온다며 사장은 투덜거렸고 나는 속으로 혼자 킬킬대며 웃었다. 뭔가 굉장히 통쾌했다.


가게엔 술은 팔지 않아 술을 마시고 싶은 사람들은 직접 구매해 들고 올 수 있었는데, 그럼 사람들에게 콜키지 가격을 받았다. 와인을 들고 와 와인 잔을 부탁하는 사람들에게 와인잔을 서빙하니 사장이 와인 가져오면 콜키지 3불 받아야 돼 빌에 적어놔, 라고 이야기해서 말 그대로 3불만 적고, 계산할 때도 3불만 받았는데, 그게 테이블 당이 아니고 나가는 와인 잔의 개수 당 3불이었던 것이다. 와인 잔이 3개 나가면 9불, 4개 나가면 12불 이런 식이었다.


또 된통 한소리를 들었는데, 뭔가 내 실수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이걸 몰랐던 내가 상식이 없던 건지 아니면 대체로 사람들이 모르는 건지 그땐 알 길이 없었다. 솔직히 지금 생각해도 상식은 아닌 것 같다. 자세히 말씀해주시지 그러셨어요..어떻게 되었든, 워낙 사장이 성질이 더러워 보여서 시급에서 뺄 거야!라고 할 줄 알았는데 딱히 그런 말은 안 해서 조금 안심하고 있었다.


뭐 이렇게 이 일식집은 딱히 체계적인 가게도 아니고 왠지 모르게 주먹구구식으로 돌아가는 가게였다. 나는 한국에 있을 때 배스킨라빈스나 뉴발란스 등 프랜차이즈 가게에서만 알바를 해서 일도 메뉴얼대로 다 체계적으로 배웠는데, 여긴 내 맘대로 하면 되는구나, 싶었다. 그날 저녁은 조금 덜 바빠서 사장은 자주 담배를 태우러 나갔고, 벤 오빠와 그 틈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


-나는 사실 오늘 안 나올 줄 알았어요. 원래 첫날 나오고 사장님 저래서 잠수 타는 사람들 많은데.. 근데 나온 것도 놀랄 일인데.. 일도 잘해서 놀랐어요. 한국에서 알바 좀 해 봤나 봐요.


-네? 제가요? 저 콜키지도 덜 받고... 생선 이름도 모르고 장어도 몰라서 점심 때 한바탕 난리 났었잖아요...


-사장님이 일을 제대로 안 가르쳐 줘서 처음 오는 사람들 켈리 씨보다 실수 10배는 더 해요.. 허둥지둥하고. 근데 알아서 잘하고 오늘 저녁에 보니깐 몇 달 일한 사람 같던데요 뭘. 에이프릴 나가서 너무 서운했는데.. 이제 일할 사람 없다고.. 이제 못 구한다고 사장님이 제 여자 친구 집에 있음 뭐하냐고 알바 좀 하라고 데리고 오라고 난리였거든요. 근데 제 여자 친구는 사장님 정말 싫어하거든요.. 여튼 진짜 켈리 씨 나와줘서 너무 감사해요.... 사장님이 성질은 저래도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아. 근데. 영어를 진짜 잘 못하셔서 영어 콤플렉스 있거든요? 그래서 학생은 다 영어 잘하는 줄 알고 학생 비자만 알바로 뽑아요. 그러니까 손님이 뭐라고 하면 꼭 통역해주고, 전화 같은 거 오면 절대 안 받으시니까 아무리 바쁘더라도 전화 켈리 씨가 받아야 해요. 편지 같은 거 와도 뜯어서 내용만 이야기해주면 좋아해요.



벤 오빠의 말을 들으니 왜 사장이 자꾸 나보고 계속 나오라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나는 굉장히 실수를 많이 했다고 생각했는데 딱히 그렇지도 않았던 모양이다. 영어도 사장도 못하니까 내가 영어 몰라서 한 실수는 본인도 뭐라고 하기 힘든 일이었나 보다.


아니.. 근데, 한 가게의 사장인데 영어도 못한다고? 우리한테 호통만 치는 은근 단순 무식 캐릭터잖아? 그렇게 생각하니 사장이 조금 만만해보이기도 했다. 게다가 벤 오빠도 칭찬을 해주니, 사실 내가 어디 가서 일 못한다는 소리는 안 들어봤지, 하고 조금 우쭐한 기분도 들었다. 벤 오빠는 내가 일을 잘 하든 못 하든 내가 나오지 않는다면 여자친구를 알바로 쓰고 싶은 사장님의 성화를 하루종일 들어야 할 테니 뭐.. 내가 고맙기도 하겠지.


그날은 일요일이었고, 나는 일한 지 이틀밖에 되지 않았지만 모두의 주급 날이라 나도 이틀 일한 페이를 정산해 들고 집으로 걸어왔다.


버스를 기다리다 집으로 걸어오는 길이었는데, 노을이 너무 예쁘게 지고 있었다. 호주 하늘은 너무 넓고도 가까이 내려앉아 있어서 늘 하늘 바로 밑에 닿아 있는 기분이었는데, 바알간 노을이 하늘 저 끝에서부터 조금씩 퍼져오고 있었다. mp3로 노래를 듣던 시절이었는데, 브라운아이즈의 '...오후'라는 곡을 들으며 집까지 40여분을 걸어왔다. 아직도 그 노래를 들으면, 알바 마치고, 노을 지던 하늘을 감탄하며 집에 걸어오던 기억이 생생하다.


도착 무렵, 집 근처에 있던 슈퍼로 문득 들어가서, 평소에 먹고 싶었지만 비싸서 사 먹지 않았던 작은 병에 든 자몽 주스를 사 들고 쭉 마셨다. 매일 사 먹던 싸구려 오렌지 주스보다 훨씬 맛있었다.


노동의 맛. 돈의 맛. 자본주의의 맛! 달콤,쌉싸름,했다. 이 맛에 알바를 하는구나.


집으로 터벅터벅 돌아오는 내 뒤로, 시뻘게진 노을이 하늘 전체를 물들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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