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가 잘못했네
대학교 본 학기가 시작되기 전 영어 어학코스에서 인도네시아에서 온 친구 리안드로랑 친해지게 되었다.
그때의 나는 정말 부끄럽지만, 참으로 글로발하지 못해, 인도네시아=인도 인줄 알았다....인도네시아 이름이 기니까 '네시아' 떼고 줄여서 인도라고 하는 줄 알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나한테 그럼 India는 한국어로 뭐게?라고 한 마디만 해 줬어도 좀 더 빨리 깨달았을 일인데...... 정말 철썩같이 그 친구가 나 인도네시아에서 왔어! 하는 순간부터 내 머릿속에 그 친구는 인도 사람이었다. 인종 구분이 잘 안 되는 나에겐 생김새도 비슷하게 느껴졌다.
리안드로는 음대에 입학할 예정으로 와 있었는데, 내가 클래식을 너무너무 좋아하던 터라 우린 곧잘 클래식 이야기를 하면서 금세 많이 친해졌다. 그런데, 클래식 이야기를 할 때마다 예기치 못하던 걸림돌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음악가 이름이었다.
베토벤, 바하, 라흐마니노프, 모짜르트로만 알고 있던 이름들이 영어로는 굉장히 다르게 발음되던 것이었는데, 그땐 전혀 몰랐다.
그나마 베토벤이 제일 비슷했고, 바흐(Bach)는 영어로 바으크... 아니.... 바으크흑!!! 이렇게 들리는 완전 다른 이름이었고, 라흐마니노프(Rachmaninoff)도 뤠~크마뉘높!! 이런 식으로 전혀 새로운 이름이었다... 음악가 이름이 나올 때마다 리안드로가 얼마나 내 발음을 비웃었는지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방금 한 말 다시 말해 봐! 너무 웃긴다!!! 라후마니노푸? 모자루투??? 푸하하하!!
하면서 날 놀리던 리안드로.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리안드로는 굉장히 직설적이고 호불호가 아주 분명한 경향이 있었는데, 내 중국 친구들과도 다 같이 친해져서 같이 맛있는 것도 먹으러 다니고 서로 도시락도 공유하고 했다. 하루는 리안드로가 내가 싸온 김치볶음밥을 먹어보고는 세상에 이런 맛난 음식이 있는걸 처음 알았다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얘는 공치사를 날리는 성격이 아니었다. 정말로 맛있는 것만 맛있다고 하는 애였기 때문에, 뜻밖의 칭찬에 기분이 좋아져 김치로 다양한 걸 할 수 있다고 자랑하고는 며칠 더 김치 요리를 선보여줬다. 리안드로는 김치볶음, 김치볶음밥, 김치로 만든 모든 걸 먹어보더니 왜 이런 음식이 인도네시아에는 없냐며, 왜 자신은 김치를 이제야 만났냐며 분개하기 시작했고 이에 자극받은 중국 친구들이 중식을 선보였지만 리안드로는 중식은 자기 스타일이 아니라며 굳건히 김치만을 사랑했다.
김치를 좋아하는 피아노를 잘 치는 인도네시아 친구라니, 굉장히 신선한 캐릭터였고 극진하게 한국 음식 찬양에 빠진 리안드로랑은 더 친해졌다.
그러던 어느날. 하루는 리안드로랑 다른 친구들이랑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리안드로가 자기 나라 이야기를 하면서 수도가 자카르타라는 것이다. 자카르타. 분명 들어본 적은 있는데 내가 알기로 인도의 수도는 뭄바이나 뉴델리 둘 중 하나였던 것 같은데 언제 그 나라가 수도를 옮겼지?? 하고 궁금한 마음에 물어보았다.
-Hey. Isn't your capital city Mumbai? (너네 나라 수도 뭄바이 아니야?)
-What are you talking about??? (뭔 소리야???)
-You said you are from INDO. (너 인도 출신이잖아??)
-Indonesia. NOT INDO. (인도네시아야. 인도 아니야)
-Are INDO and Indonesia different countries? (인도랑 인도네시아는 다른 나라니?)
-What the hell is INDO? (인도는 도대체 뭐야??)
-That's what I am saying!!! (아니 이게 다 무슨 소리야??)
아니, 인도가 인도네시아가 아니면 도대체 자카르타는 어디고 뭄바이 뉴 델리는 어디지? 두 개 같은 나라 아닌가? 굉장히 황당해서 얼른 옆 반에 있던 한국 친구를 찾아갔다.
-얘, 인도가 영어로 뭐야?
-인도? 그걸 몰라? India잖아!!
그때 머리를 망치로 맞은 기분이 들었다. 인도.... England를 영국, Germany를 독일이라고 우리말로 쓰지만 영국이 영어로 영국이 아니고 독일이 영어로 독일이 아니듯 인도도 영어로 인도가 아니었던 것이었다... 아니, 이는 절대 내가 모르고 있던 사실이 아닌데, 나도 모르게 인도가 머리에 콱 박힌 후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던 그런 상태였어서 헷갈림이 고착화되어버린 상황이었다.
친구한테 이 민망한 상황을 들킬까 봐 자초지종을 설명해 주지도 않고 얼른 교실로 돌아왔는데, 교묘한 리안드로 역시 옆반 한국 학생에게 가서 인도가 뭐냐고 물은 뒤.......
이미 모든 상황을 파악한 후였다.
-KELLY BABO!!!!!!!!!!!!!!!!! You are so BABO!!!!!!!!!
그렇다. 나는 정말 바보였다. 바보란 말을 왜 저 녀석한테 가르쳐 줬던 것인지.... 그때 이후로 인도=인도네시아는 온 반에 소문이 나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인도의 수도를 뭄바이라고 또 잘못 알고 있던 내 무식함에, 이 소문은 빛보다 빠른 속도로 퍼졌다. 그때 너무 부끄럽고 속상해 온갖 나라의 수도를 외웠다.
너네!! 나 지금은 페루의 수도가 리마인 것 까지 안다고!!!!!
그렇게 매일 리안드로에게 바보란 소리를 듣다가, 김치볶음밥을 더 이상 나눠주지 않을 거란 협박을 하고 나서야 겨우 그놈의 바보 소리를 그만 듣던 무렵이었다.
내 바보짓은 거기서도 끝이 아니었다.
그때가 여름이어서 한창 어그부츠 세일을 할 때였는데, 같이 사는 언니들이 어그부츠 이런 건 여름에 세일할 때 장만하는 거라고 해서 시티에서 어그부츠를 미리 장만했다. 그러곤 기분이 좋아서 친구들한테 너네도 지금 저렴할 때 사놓으라고, 귀국 선물로 딱이라고 추천하고 다닐 때였다.
중국 친구들도 일본 친구들도 솔깃해서 다들 어그부츠를 사러 간다는데 리안드로는 관심도 없었다.
-리안드로야, 너는 이거 안 사? 이거 얼마나 따뜻한데!
-켈리야. 내가 이게 필요하겠냐?
-아.. 너네 나라 사람들 어그부츠 몰라?
-모르지 당연히!!
-왜 몰라?? 선물해봐. 너네 어머니 여동생 다 좋아할걸? 이거 한번 신으면 못 빠져나와! 엄청 따뜻해!!
-너 진짜 몰라서 그래?
-뭘 몰라?!
-인도네시아는 여름 나라야.... 1년 내내 덥다고.... 그걸 언제 신어???
-어...어....??? 뭐??? 너네 나라는 겨울이 없어??? 겨울이 없는 나라도 있나?
-WOW.... Kelly is so BABO!!!!!!!!!! 얘들아!!!!!!!!!!! 이리와봐!!!!!
또 나만 몰랐다. 인도네시아는 적도 부근에 길게 걸쳐져 있어 4계절이 없고... 그저 건기와 우기가 반복되는 여름 날씨뿐이라는 걸..... 예를 들어 필리핀 같은 나라에 겨울이 없다는 건 너무 잘 알고 있었지만 내게 생소한 나라 인도네시아에 겨울이 없다는 건 사실 생각도 못 했다. 한국에서 평생 산 나한테 4계절이란 건 너무나도 디폴트였기에..... 그리고 변명같지만 그 때 한국에서 사실 인도네시아라는 나라는 많이 생소한 나라였었다...
여튼 그 후로 오랫동안 리안드로에게 바보라고 놀림을 당해야만 했고 나도 정말 내가 바보처럼 느껴졌다. 그때 정말 뼈저리게 느꼈다.
나는 진정 우물 안 개구리였구나... 세상은 넓고 알 것은 끝도 없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