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을 필요 없는 그 단어
호주에 간 후로 느낀 문화충격은 크고도 다양했다.
그중 하나가, 이제 막 한국에서 이슈가 되고 있는 노 브라에 관한 것이었는데, 지금으로부터도 10여 년 전이니까, 그때 내가 노 브라로 거리를 활보하는 호주 언니들을 보았을 때의 충격은 아마 상상 가능할 것이라 믿는다.
노브라인가? 아닌가? 하는 정도가 아니라, 심지어 속이 다 비치는 흰 나시에 브라를 하지 않고 다니는 모습은 그야말로 충격 그 자체였는데, 그것 못지않게 충격이었던 것 또한 레깅스 패션이었다. 하루는 버스를 타러 계단을 올라가고 있는데, 내 앞에 한 호주 여성분이 올라가고 있었다. 해가 쨍-하니 비치는 전형적인 브리즈번 날씨였고, 내 앞의 언니는 바지나 치마 대신 얇은 레깅스를 입고 열심히 계단을 올라가고 있었는데 레깅스 속이 다 비쳐 그분의 T팬티까지 보였다.
와! 못 볼걸 본 기분!!!
노브라뿐 아니라 속이 다 비치는 얇은 레깅스를 입고 거리를 당당히 다니는 여성들이라니.. 왜 남의 눈은 생각해 주지 않는단 말인가?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들인가?
정말 한국에서 단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장면이기에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참으로 당황스러웠다. 더 당황스러웠던 것은, 대학 강의 시간에도 그런 언니들을 볼 수 있었던 점이었다. 그냥 길에 있는 껄렁껄렁한 사람들이 아니라 대학교에 공부하러 오는 사람들까지도 심심찮게 노브라 패션을 선보이자 나는 약간 멘붕에 빠졌다.
그때 나는 호주 문화에 대해 궁금한 게 너무 많았다. 그때마다 같이 수업을 들으며 친해진 호주 친구들에게 물어보았는데, 하루는 수업 시간에도 브라를 하고 오지 않은 학생을 보자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옆자리에 앉아 있던 친한 호주 친구에게 물어보았다.
-얘, 조쉬야, 브라를 안 입고 다니는 거 어떻게 생각해?
-뭐? 갑자기 웬 브라 이야기야?
-아니 저 앞에 봐봐, 브라를 안 입고 학교에 오는 사람도 있잖아
-So what? (그게 뭐 어때서???)
-아니 .. 이상하잖아. 넌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 없어?
-뭐가 이상한지 잘 모르겠어. 아니, 뭐 그거에 대해 별로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근데 딱 보면 보이잖아, 브라를 했는지 안 했는지
-굳이 보자면 보이지.. 근데 그거 다 그 사람 패션 아니야? 그거에 대해 이상하단 생각은 한 적 없어
친구와 대화를 나눈 후 더 충격에 빠졌다. 뭐야... 내가 곧 죽어도 이상하게 생각했던 것이, 내가 한 번도 안 본 풍경이라서 나만 이상했던 건가? 그 후로도 몇몇 호주 친구들에게 더 물어봤지만 굉장히 공식적인 자리고 갖춰 입어야 하는 자리가 아닌 이상 브라를 하고 안 하고에 대해서 왜 타인이 이슈를 삼는지 모르겠다는 반응이 돌아왔다.
그러고 보니, 브리즈번 더위엔, 웃통을 까고 돌아다니는 호주 오빠들도 많았고, 언니들은 반 나체로도 거리를 활보하곤 했다. 그런 패션은 아무렇지도 않게 보면서 왜 나는 브라를 하지 않고, 레깅스가 속이 비치는걸 더 터부시하고 이상하게 보게 되었을까?
그건 내가 스스로 만든 선호일까, 아니면 내가 한국에 살면서 그렇게 배우고 들었고 봤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게 되어 버린 것일까?
2019년 지금 나는 중국 쑤저우에 살고 있다.
얼마 전 친하게 지내는 중국 여자 친구들과 핫팟(훠궈)를 먹으러 갔다. 신나게 훠궈를 먹고 이야기하며 놀고 있는데, 호주의 친구에게 페이스북 메시지가 왔다. 마구 알람은 울려대는데, 메시지를 확인할 수가 없었다. 중국은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구글, 네이버, 다음 등 해외 사이트를 대부분 차단했기 때문에 페이스북 메시지를 확인하려면 VPN이라는 우회 접속 프로그램으로 내 IP를 바꾼 후에야 그런 사이트들에 접속을 할 수 있다.
메시지를 확인하고 싶어 VPN을 켰으나 늘 그렇듯 잘 연결이 되지 않고 자꾸 시간이 걸렸다. 잠시만, 하고 휴대폰을 쳐다보고 있는 날 보며 중국 친구들이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아니... VPN이 또 안되네. 요즘 왜 이렇게 안 되지? 한국 사이트도 다 막혀서 너무 불편해! 너네도 불편하지?
-아니 별로... VPN 켜면 다 되는 건데 그것 때문에 불편하진 않은데?
-헐? 그게 불편하지 않다고?
-응. 아예 안 되는 것도 아니고 VPN 하면 되잖아. 굳이 잘 모르겠어.
-야.. 너네 진짜.. 이거 정말 불편한 거야!!! 인터넷의 자유가 없는 거잖아 ㅠㅠ
-켈리 무슨 소리야. 중국 정부가 그렇게 막아놓는 건 다 이유가 있어서야. 네가 외국인이라 모르는 거 같은데 잘 들어봐. 페이스북이 왜 막혔는지 알아? 예전 신장 위구르 독립 테러 모의 사건 때로 거슬러 올라가면..... (갑자기 역사 강의가 시작되었다)
왓, 이야기를 잘못 꺼냈구나. 중국 친구들 앞에서는 절대 중국에 대한 불만을 말 해선 안 되는 거였는데... 갑자기 흥분하면서 가르침을 주려는 중국 친구를 보며, 왜 중국 친구들은 VPN이 불편하지 않은지, 자신들도 즐겨 쓰는 인스타그램과 구글과 페이스북이 우회 접속을 해야만 사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 불편함을 느끼지 않은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문제는 익숙함과 당연함이었다. 나는 한국, 호주에 살면서 인터넷에 접속할 때 우회 접속을 켜고 내 IP를 변환해서 접속하는 것을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중국에 살면서 그렇게 해야 되었을 때, 그것은 너무 불편하게 다가왔지만,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이는 시간이 지나도 적응되지 않는 너무나도 큰 불편함이었고, 결코 익숙해지지 않는 짜증이었다.
반대로, 중국 친구들은, 한 번도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등을 VPN 없이 자연스럽게 써 본 적이 없다. 그 친구들은 나보다 나이도 어려서,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 등이 유행하기 시작할 때 중국이 그 사이트들을 차단한 후에, 아예 처음부터 그 사이트들은 VPN을 켜고 접속해야 하는 걸로 시작을 했고, 그러다 보니 그 일련의 과정이 하나로 묶여 너무 당연시되어버렸다. 그러니까 내가 불편하다고 하는 것들을 이해해지 못하고, 아니, 그거 하나 켜면 되는 건데 뭐가 불편해?라고 되묻게 된 것이다.
그거 하나 켜는게 참 불편한거야.. 왜 몰라주니..
한국에 있으면 너무나도 당연한 소리를 한다고 모두가 동의해 줬을 텐데, 여기 중국에 있으면 별 일도 아닌 걸 불편하다고 외치며 트집을 잡는 사람이 되는 일은 희한한 경험이었다.
다시 노브라 이슈로 돌아와서.
내가 생각할 땐 브라라는 것은 중국의 VPN 같은 것 같다. 우리가 생각하는 여성의 유두의 흔적은, 중국 정부가 필사적으로 막고 싶어 하는, 세계 사회의 민낯인 google, facebook, instagram 같은 것이 아닐까. 왜 굳이 그런 걸 막아야 하냐고 물었을 때 중국 친구들은 '어떤 교육 안된 사람들은 정보를 스스로 받아들일 능력이 없어. 그래서 중국 정부가 나서서 차단하고, 검증이 된 중국 인터넷만 허락하는 거야'라고 했다.
마찬가지로, 브라를 해야만 하는 것은, '어떤 교육 안 된 사람들이 여성의 몸을 보고 이상한 생각을 할까 봐'일까?
우리는 매일매일 브라 VPN을 입어왔기 때문에 그게 없는 여성의 상반신이 민망하고 눈 둘 데가 없다. 아마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이 열려 중국 10억 인민이 갑자기 물밀듯 새로운 정보를 접한다면 거부감이 들 것이다.
브라 VPN도 마찬가지다. 처음부터 그게 없어왔으면, 아마 그 사실 자체에 적응이 되어서 한 사람과 안 한 사람의 구분조차 필요 없는 세상이었을 것 같다. 그냥 마주했으면 너무나 처음부터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텐데, 브라 VPN을 장착한 채로 그 속에서 세상을 봐 왔기 때문에 그게 없는 게 사실 큰 일 아니라는 걸 받아들이지 못한다.
나는 호주 이전에 노브라를 한 사람이 심심찮게 거리를 나다니는 그런 사회에 살아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브라를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어쩌다 보이는 브라 없는 여성을 보았을 때 낯설고 싫다는 감정을 갖게 되었다. 그럼 이것은 나 스스로 확립한 선호일까 아니면 사회의 암묵적 합의와 룰에 동의해서 그렇게 생각하게 되어 버린 것일까. 내가 호주에서 태어나서 그런 걸 보고 자랐다면 지금처럼 노 브라를 한 언니들이 낯설고 생경하지 않았으리라 확신한다.
여성의 가슴이 민망한 사람들에게, 단순히 민망하니까 TPO를 갖춰 브라를 입으라고 종용하기보다는, 왜 여성의 가슴은 민망한 존재가 되었나, 나는 왜 내가 보기 싫다는 이유로 이 사람의 브라를 입혀주려 하는지, 여기 이 질문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은 생각의 주제가 될 것 같다.
무작정 그건 아니지! 하고 외치다가는, VPN을 당연시 여기게 된 내 중국 친구들처럼 될 것만 같다. 정말 사랑하는 내 중국 친구들에게도 진정한 인터넷의 자유를 맛보여주고 싶다.
겨우 브라 하나.. 겨우 vpn 접속 한 번.
이 두개가 자꾸 겹쳐서 자유라는 단어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한다.
한국 사회에서 VPN 없이 구글과 인스타그램을 마음껏 쓰는 게 너무 당연하기 때문에 그 누구도 NO VPN!! VPN OUT!!!! 을 외치고 있지 않듯이, 브라가 처음부터 논의의 대상조차 되지 않을 때 노브라라는 단어도 사라질 것 같다.
노 브라, 그 단어가 더이상 들리지 않는 세상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P.S. 지금도 중국이기에, VPN을 켜고 브런치에서 글을 작성했다. 하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