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에서 온 ‘청’
앞서 큰 사건들이 지나고, 며칠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홈스테이와 호주 생활에 익숙해질 무렵이었다. 어느 날 아침 홈스테이 할머니가 아침을 먹으면서, 좋은 뉴스가 있다고 하시더니, 곧 또 다른 홈스테이 메이트가 온다고 하는 것이다! 너무너무 기뻤다.
사실, 나름 잘해주시는 할머니와 할아버지께 죄송하게도, 내가 꿈꿨던 - 금요일 저녁이면 파티가 있고 모두 모여서 맥주 한잔 마시는 - 그런 홈스테이 생활과는 거리가 정말 먼........ 시골의 집에서 연로하신 할머니와 할아버지와 풰이풰이 멍멍이와 사는 삶은 정말이지 심심해지려고 하던 차였기 때문에, 홈스테이 메이트가 온다고 하니 갑자기 기분이 너무 좋았다.
어느 나라에서 오는 누구일까, 내가 일본 말을 조금 할 수 있으니 일본 친구라도 좋겠고, 여긴 유럽 사람들도 많이 공부하러 오니까 유럽 어느 나라에서 온 친구라도 정말 좋겠다. 같이 맥주도 마시고 자기 나라의 음식도 만들면서 쪼오오금 지루한 이 홈스테이 집에서의 새로운 생활을 만들어 가 보면 정말 즐거울 것 같았다.
며칠 뒤, 학교를 다녀오니 홈스테이 할머니께서 얼른 인사를 하라며 친구가 도착해 있다고 했다. 안녕, 나는 켈리라고 해! 옆방에서 앞으로 함께 지내게 될 친구에게 활짝 웃으며 손을 내밀고 악수를 했다. 웃는 미소가 수줍은, 체구가 조그마한 남학생이었다. 홍콩에서 온 청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며, 앞으로 잘 지내보자며 내 손을 신나게 잡고 흔드는데, 손이 너무 작고 부드러와서 놀랐다.
당장 그날 저녁부터 청이 재잘재잘 떠드는 바람에 저녁 식탁이 훨씬 더 재밌었고 분위기도 좋았다. 나는 좀처럼 홈스테이 할머니 할아버지와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딱히 할 말도 없었고 내가 먼저 수다를 시작하는 성격이 아니라 우리의 저녁 식탁엔 주로 침묵이 내려앉아 있었는데, 청이 오자 분위기가 너무나도 좋아졌다. 홍콩에서는 이렇고, 자기는 어디를 가 봤고, 호주는 이런 점이 신기하다, 청의 대화 주제는 재미있고 끝도 없었다.
또 청은 사교성도 좋아서, 아주 작은 일에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내 조그마한 변화도 금세 알아채곤 머리핀 이쁘다, 양말 이쁘다 같은 자잘한 칭찬을 계속해서 날렸다. 저녁 먹은 후엔 할머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설거지도 본인이 한다고 나서서 늘 저녁 설거지는 청과, 괜히 혼자 들어가긴 뻘쭘해 옆에서 도와주는 시늉을 하는 내가 도맡게 되었다. 청은 함께 있으면 늘 재미있는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이었다.
며칠 뒤 청과는 꽤 친해지게 되었고, 나는 내 방을 궁금해하는 청을 불러서 내 방도 보여주었다. 그러자 청도 자기 방을 구경시켜 주겠다며 방에 초대해 가족사진과 여자 친구 사진도 보여주었다. 사진 속 여자 친구는 키가 크고 미소가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청에게 여자 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여자 친구 너무 이쁘다며 칭찬을 크게 하곤 어떻게 만나게 되었냐, 얼마나 사귀었냐, 무슨 공부를 하는 친구냐 이런저런 수다를 한참 떨었다.
그러던 며칠 뒤, 홈스테이 할머니와 이야기를 하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항상 청을 지칭할 때, 할머니가 자꾸 She라는 대명사를 쓰시는 것이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하루 이틀 그러신 게 아니고, 도착한 첫날부터 할머니는 내게 She is ~라고 그를 소개했던 것 같았다. 순간 너무 걱정이 되었다. 영어권 사람들은 언어의 특성상 She와 He의 구분이 정말 철저한데, 할머니의 연세를 고려해 봤을 때, 그런 대명사가 헷갈린다는 건, 어쩌면 치매의 전조증상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번이나 그걸 들었기 때문에 그날은 할머니께 슬쩍 여쭤보았다. 청은 boy인데 왜 자꾸 She라고 하냐고. 그러자 할머니가 갑자기 크게 놀란 표정을 지으시며 내 손을 이끌고 다른 방으로 들어가서 문을 꼭 닫더니, 청은 Boy처럼 생겼지만 여자라고 하시는 것이 아닌가. 본인이 학교에 신청을 할 때 이미 와 있는 학생이 여학생이니 꼭 여학생으로 보내달라고 요청을 했고, 학교도 여학생을 보내준다고 했는데, 첫날 도착한 청을 보고 너무 놀라 학교에 전화까지 해 보니 학교에서 청은 여자가 확실하다며 컨펌을 해 줬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내 손을 꼭 잡으시더니 청은 100% 여자가 맞으니 절대 너도 호칭에 있어서 실수하지 말고 이 이야기는 비밀로 하자고 하셨다.
정말, 정말 당황스러웠지만, 모든 게 이해가 되었다.
부드러웠던 손이며, 고와 보였던 피부, 뭔가 앳된 느낌이 있던 목소리, 그리고 내 여자 친구야... 하면서 사진을 내밀던 손이 떨렸었던 기억까지.
그렇다.
청은, 레즈비언인 것이었다.
그날 방에 들어가서 앞으로 청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한참 고민했다. 동성애에 대해 이야기만 들어봤지 이렇게 내 옆방에 사는 친구가 동성애자가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해 본 적 없기 때문에 내가 어떻게 해야 잘 대하는 건지 상처를 안 주는 건지 알 길이 없었다.
그러고도 며칠이 지났지만, 늘 청은 웃으면서 자기 여자 친구 이야기를 했고, 홍콩에 놀러 올 일이 있으면 다 같이 놀자며 홈스테이 할머니와 내게 홍콩 이야기를 했다. 그래, 그래야지, 꼭 그렇게 하자, 맞장구를 치며 함께 웃다가, 문득 내가 청을 특별하게 대할 필요가 하나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청이 남자같이 생겼는데 사실은 여자 거나 말거나, 그러고 생물학적으로 여자지만 남자에게 이성적인 감정이 아니라 여자를 좋아하거나 말거나, 사실 그건 다 청의 개인적 관심사고 취향이지 그와 친구가 되는 데는 하나도 중요한 일이 아니었던 것이었다.
1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청과는 페이스북 친구로 남아있고, 올라오는 사진에 Like를 열심히 누른다. 청은 아직도 그때 그 여자 친구와 여전히 행복해 보인다.
그들의 사랑을 오래도록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