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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elly You Aug 09. 2019

얼굴치의 비애

안면 인식이 불가능합니다 <1>


나는 예전부터 사람 얼굴을 잘 못 알아봤다.


한두 번 만난 사람의 얼굴을 잘 기억 못 하는 수준을 훌쩍 넘어서, 십 년이 다 되도록 매일 얼굴을 본 집 앞의 슈퍼 아주머니도 슈퍼가 아닌 다른 곳에서 만나면 '어디서 많이 본 사람인데.. 누구더라?' 하고 알아보지 못했다.


드라마를 봐도 누가 누군지 구분하기가 힘들어 내용 따라가는데 어려움이 있고, 배우가 만약 유명한 사람이라면 배우 얼굴을 볼 때마다 '어디서 본 사람인데!' 하는 생각이 들어 드라마에 집중하기가 힘이 든다. 어디서 본 사람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생각나지가 않는다.


만약 크게 유명한 배우가 아닌 경우에는, 저번에 본 드라마에 나온 그 사람이 지금 드라마에 나오는 이 사람이라는 걸 옆에서 누가 말해줘도 믿지 못하는 정도다.


최근의 일들을 살펴보면, 영화 알라딘의 자스민 공주가 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자스민의 미모와 의상에 감탄하며 '저런 예쁜 배우는 도대체 어디 숨어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다. 그리고 영화를 보고 난 후 그녀가 신인인지, 아니면 너무 노래를 잘해 가수인지 궁금해 구글을 해 보다가 너무나도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알라딘의 자스민 공주는 스티븐 스필버그가 야심 차게 제작했지만 인기가 없어 시즌1로 종영해버린 미국 드라마 테라 노바(Terra Nova, 2011년 작)에 나온 한 주요 등장인물이었던 것이다!!!!


중요한 건, 내가 그 드라마를 예전에 좋아하고 봤다는 정도의 사실이 아니다. 나는 SF 관련 드라마나 영화를 유달리 좋아하고 특히 공룡이나 타임머신 같은데 관심이 많은데, 이 드라마는 무려! 미래 배경에서 사람들이 포털을 통해 백악기 공룡 시대로 돌아가 사는 생활을 그린, 내가 좋아하는걸 모두 모아 놓은 일종의 뷔페 같은 드라마였다.


그때는 미드가 새로 방영되면 드라마를 다운로드하고 사람들이 자체적으로 자막을 제작해 배포했는데, 테라노바가 크게 인기를 끌지 못하자 한두회 자막이 번역되어 인터넷에 떠돌더니 급기야는 자막을 아무도 번역하지 않는 사태가 왔다. 너무 답답한 나머지 누가 초벌로 대충 번역해 둔 자막을 이용해, 내가 자막까지 만들어 배포해 가면서 애착을 가지고 본 드라마인데, 자막 작업을 처음 해 본 터라 그게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다. 0.00x초 단위까지 싱크를 맞추어야 하고, 그 프로그램을 다루는 것도 복잡했다. 그러면서 그 드라마를 본의 아니게 얼마나 많이 보게 되었는지 모른다.


<테라노바에서의 나오미 스콧>




<알라딘에서의 나오미 스콧>


그렇게 많이 본 드라마인데. 그렇게 애착을 가졌던 드라마인데...그때도 참 이쁘다 생각했던 배우다. 그런 자스민이 테라 노바에 나왔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충격이었는지 모른다.




사실 이 정도야 그저 혼자만 답답하고 말 일인데, 얼굴 구분이 안 되는 나 자신 때문에 자다가 이불킥을 날린 적도 있다.


대학생 때, 교환학생을 다녀와 다시 학교에 복학했을 때의 일이다.


우리 과 사람들만 다니는 층에는 커다란 거울이 하나 있었는데, 그 거울을 보면서 복도에서 친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저 밑 계단에서 분명히 아는 얼굴이 하나 올라왔다. 세련된 아디다스 트레이닝복 세트를 입고, 짧은 머리에는 왁스를 발라서 빳빳하게 세운 채 책가방을 등에 메고 터덜터덜 걸어오는 남학생이었다.


눈이 마주쳐 일단 싱긋 웃었는데, 도저히 누군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누구지, 누구더라, 분명히 아는 얼굴인데. 인사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어떻게 해야 하지 하고 그를 쳐다보며 마구 망설이고 있는데 그가 먼저


-오~ 너~ 호주 갔다더니 이번 학기 복학 했나보네~~


하며 꽤 친한 사이에서 쓸 법한 말투로 인사를 건넸다.


그 순간, 누군지 번뜩 기억이 났다. 호주 가기 바로 직전 학기 교양 강의실에서 늘 구석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 나랑 인사도 곧잘 하고 웃으면서 막 떠든 기억도 났다. 그때는 긴 머리에, 옷도 늘 깔끔한 폴로 티를 즐겨 입었던거 같은데 완전 헤어부터 패션까지 바뀌어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다.


여튼 얼른 대답을 해야지 싶었다.


-어... 나 이번에 왔잖아! 잘 지냈니?

-어.. 나 이제 곧 졸업! 너 호주 다녀오더니 진짜 얼굴 많이 좋아졌네~

-아 고마워! 넌 머리 잘랐나 보네 잘 어울린다! 패션도 음... 이제 졸업이라고 대충 입고 학교 오나 봐~ ㅋㅋ

-아..하..하하..;;;


그러곤 친구를 만나 룰루랄라 강의실로 들어가는데 뭔가 계속 이상했다. 자꾸 곱씹어 생각해보니, 내 기억 속에 그 교양 수업 같이 듣던 남학생은 분명 나랑 동갑인데 어떻게 벌써 졸업을 한다는 거지? 내 동기들은 군대에 가서 아직까지 복학조차 안 했는데...?


또 이상한 게, 그 교양 수업 학생은 공대인가 자연대 학생인데 왜 그 학생이 영문과 전공 강의실 복도에 나타난 걸까? 어떻게 생각해도 도저히 계산이 맞지 않아 뭔가 찝찝했지만 아무래도 생각이 나지 않아 곧 그 생각을 접었다.


그러고 수업이 시작되어 수업에 들어갔는데, 아까 본 그 학생이 전공 수업에 앉아 있었다.


친구에게 소곤대며 '야 저 사람 누구냐? 우리 과 아닌 거 같은데 왜 수업 듣지?' 하고 물어보자 친구가 무슨 소리 하냐는 듯한 눈빛으로 '저기 아디다스 추리닝??? 04학번 김XX 선배잖아!' 라고 하는게 아닌가... ?


너무 당황해서 '04학번이라고??? 그럼 저 사람이 날 어떻게 알아??? 나한테 인사하던데???? 그래서 나도 반말로 인사했는데 어떡하지??' 하니까 친구가 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저 사람 너가 1년 전에 헤어진 니 전 남친 OOO선배의 친구잖아...



요약하자면, 그 사람은 애시당초 머리를 자르고 패션 스타일이 바뀐게 아니었다. 내 기억속의 그 사람이랑 그냥 다.른. 사람이었다.


그러면, 결국, 나는 전 남친의 친구를 굳이 아는 척하고 빤히 쳐다봐서 그가 먼저 내게 인사를 하게 만든 후, 반말로 답하고, 당황한 나머지 호주 다녀와서 얼굴 좋아졌다는 의례적인 인사를 건넨 그 선배에게, 싸갈스없게 너는 왜 트레이닝 복을 입고 학교에 오냐고 놀린 꼴이 되었다.


선배 입장에서는 자기 친한 친구와 잠깐 만나다 헤어진 후배가 괜히 시비를 걸고 싶어 반말로 깐죽댄다고 느끼지 않았을까...


나는 정말 왜 그랬을까.. 모르면 누구세요 하고 물어나 볼 일이지.......





하지만 진정한 얼굴치는 국내와 국외를 가리지 않는 법이었다.

국내에서 새는 바가지 호주에서도 새지 않을 리가 없었다.

호주에서도, 나는, 얼굴 인식 불가로 인해 참담한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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