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면 인식이 불가합...(읔)
학기가 시작되고 3주가량 흘렀을까.
세상 둘째가라면 서러운 길치인 내가 겨우 강의실 가는 길을 익히고 캠퍼스 내에서 방향을 어렴풋이 짐작 가능한 정도의, 딱 그만큼의 시간이었다.
그날은 유달리 햇살이 좋은 날이었다. 어느 수업인지 잘 기억도 나지 않는데, (사실 모든 수업과 그 수업의 교수님, 튜터 얼굴이 지금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한 수업에 그날따라 또 말도 안 되게 길을 잃어서 지각을 했었다.
매일 가던 강의실을 가다 길을 잃는 건 정말 짜증 나는 경험이다. 그 길이 그 길 같아서 주욱 따라 들어갔는데 모르는 곳이었고, 헤매기 시작하자 그날따라 얼마나 꼬이고 또 꼬이던지. 지각하느니 차라리 안 가고 말지 하는 이상한 사상을 갖고 있는 나로서는 정말 짜증 나는 일이었다. 수업이 진행되고 있는 강의실에 혼자 늦게 도착해 문을 열고 들어가는 기분은 정말 별로인 일이기에.
여하튼 헤매고 또 헤매다 겨우 강의실에 도착했고, 이미 수업은 시작되고 있었다.
여느 때처럼 교수님은 파워포인트 화면을 띄워놓고 강의에 열중이었고, 지각해 바삐 걸어온 내 등에는 비지땀에 매달려 있었다. 노트북을 펼쳐놓고 황급히 강의 내용을 따라잡으려고 발표를 듣고 있는데, 다행히 내용이 내가 다 아는 것이었다. 통계 프로그램을 돌려서 기초 통계를 공부하는 부분이었는데, 교수님은 통계 프로그램을 사용하기 위한 엑셀 기초 강의를 하고 있었고 IT 강국인 한국에서 온 사람에겐 그 내용이란 너무나도 뻔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엑셀에서 덧셈, 뺄셈을 하는 법, 기본적인 함수 사용 그런 것이었는데... 사실 회계 함수, 재무 함수까지 배우고 온 나에겐 정말이지 쉬운 내용이었다.
지각도 했겠다, 내용도 아는 것이겠다, 더워서 집중도 되지 않겠다.... 노트북을 펼쳐놓고 네이버와 다음, 네이트를 오가며 그냥 한국 뉴스를 보면서 강의를 듣는 척하면서 은근히 딴짓을 하기 시작했다.
내 옆에 앉은 한 학생이 그런 나를, 그리고 내가 보는 웹 페이지들을 유심히 쳐다보고 있었다.
뭐야... 봐도 자긴 한국어라 이해도 못하면서 뭘 저렇게 열심히 본대? 그 학생을 흘깃 쳐다본 후 온갖 연애 기사와 뉴스를 섭렵하고 있는데 갑자기 걔가 내 어깨를 툭 치고 말을 걸었다.
-야, 너 이름이 뭐더라?
-켈리야.
-아 맞다 켈리. 한국에서 온 켈리 맞지?
-응 맞어.
뭐야. 갑자기 왜 말을 거는 거야? 분명 저번에 통성명한 얼굴인데, 어차피 얼굴을 정말 기억하지도 못하기에 괜히 또 이름 물어보기도 귀찮아서 굳이 그 학생의 이름을 물어보지도 않았다. 그때 상당히 쇼킹한 연애 관련 기사를 보고 있어서 그 학생이 말 거는 게 귀찮기도 했다.
나는 계속 딴짓을 하고 있는 반면, 옆자리 그 아이는 굉장히 열심히 필기도 하면서 유심히 교수님의 강의를 듣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굉장히 생뚱맞게,
-켈리야. 너 수업 안 듣고 왜 자꾸 딴 거 해? 이거 중요한 부분 같은데 듣지 그래?
하고 오지랖 넓은 태클을 거는 것이 아닌가.
뭐야? 외국은 다 개인주의라더니 내가 뭘 하든 본인이 뭔 상관이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 나는 다 아는 내용이라서... 너 열심히 해.
라고 대답하자
-그래도 수업시간에 누가 발표하면 듣는 게 예의 아니야?
라고 대꾸하는 것이다.
솔직히 맞는 말이었지만 본인이 뭔데 내게 이래라 저래라인지.. 좀 황당한 마음이 들었다. 너나 잘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러면 너무 4가지 없어 보일까 봐 그 마음을 꾹 누른 채
-나 이거 다 아는 내용이라서 오늘은 좀 릴랙스 하려고~
하고 좋게 좋게 대답을 했다.
그러자 그 학생이 한술 더 떠서,
-내 생각이지만, 너가 알고 모르고를 떠나서 그래도 앞에서 이야기하는데... 그걸 들어주는 게 예의인 것 같아~
라고 충고를 건넸다.
정말 맞는 말이었지만, 그날따라 짜증이 났다. 사실 수업시간에 교수님도 학생들에게 이래라저래라 하지 않는데 얘는 옆에 앉아서 왜 이러는지 정말... 길도 잃고 오늘따라 일진도 좋지 않은데...
까칠하게,
-내가 알아서 할게. 나한테 신경 쓰지 말아 줘.
하고 대답하고는 더 이상 그 아이 쪽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교수님은 계속 엑셀 기초 강의를 하고 있었고, 오지랖 넓은 내 옆의 학생은 굉장히 열심히 공부하는 모양새였다. 그렇게 1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쉬는 시간이 지나고 다시 강의가 재개되는데, 내 옆에 앉은 학생이 갑자기 박수를 치면서 칠판 앞으로 나가서 섰다. 그러고는 아까 그 내용이 자기는 감명 깊었느니, 굉장히 디테일했다느니 하면서 급 칭찬을 하기 시작했다.
'완전 관심종자 아니야?;;;' 하고 생각하던 그 찰나에,
그 학생이, 갑자기 출석을 부르기 시작했다.
순간 멘붕이 왔다.
저 학생은 뭔데 교수님의 수업 내용에 대해 코멘트를 하고, 지가 뭔데 출석을 부르는 거지?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뇌가 정지한 듯했고, 주변 친구들을 둘러보니 친구들은 다 태연하게 출석에 대답을 하고 있었다.
사실 그날은, 특별히 발표 수업이 진행되는 날이었다.
수업시간에 툭하면 집중 않고 혼자 딴생각을 멍하니 하는 날이 많았던 나는 그날 발표 수업이 있다는 걸 까맣게 몰랐고, 심지어 그날 지각을 하는 바람에, 학생이 교수님 대신 발표 수업을 한다는 사실도 몰랐다.
내가 강의실에 도착했을 땐, 이미 발표하기로 한 학생이 발표 수업을 진행하고 있었고, 교수님은 내 옆에 앉아서 그 학생의 발표를 채점하고 있었다.
내 옆에 앉아서 내게 자꾸 오지랖을 부렸던 사람은.... 학생이 아니라 교수님이었고, 사람 얼굴을 절대 기억하지 못하는 나란 사람은 교수님도 못 알아보고, 딴짓하지 말고 발표 들으라고 좋게 이야기하는 교수님에게, 내가 알아서 할게!!! 하고 꼴을 부린 천하의 돌+아이가 되었다.
그 사람이 교수님이라고 이해하고 나니 모든 상황이 말이 되기 시작했다. 점잖게 나한테 '그래도 들어보는 게 어때?' 하고 건네던 충고 하며.. 열심히 필기하던 (그 학생의 발표를 채점하던 것이었다..) 모습까지..
강의가 끝나고 다들 강의실을 떠나는데, 나만 거길 떠나지 못하고 붙박이장처럼 못 박혀 있었다.
지금이라도 따라가서 죄송하다고 해야 하나, 몰랐다고 해야 하나...
그런데 지금 가서 미안해 네가 교수인 줄 몰랐어..라고 이야기하면 그게 도대체 교수님이 보기에 말이 되는 이야기일까? 나를 헛소리로 핑계만 대는 더 심각한 돌+아이로 보지 않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중 시간은 흘렀고, 너무 당황해 몸은 제멋대로 움직여 나도 모르는 새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러 가고 있었다.
죄송하다고, 무례했다고, 못 알아 봤다고 메일이라도 보내야 하나?.. 온갖 생각으로 머리는 어지러운데, 버스에는 여느 때와 다르게 자리가 하나도 없었다. 무거운 가방을 발 밑에 내려놓고 손잡이를 단단히 잡았다. 메일을 보내는 일도 정말 웃긴 거 같았다.
오늘은 정말 되는 일이 하나도 없구나. 짜증이 밀려오는 그 와중에, 누군가 크게 내 이름을 불렀다.
-어~ 켈리!!!
버스 뒤편에 앉아있던 구불머리 회장이 웃으면서 내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