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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elly You Aug 18. 2019

글로벌 얼굴치

안면 인식이 불가합...(읔)


학기가 시작되고 3주가량 흘렀을까.


세상 둘째가라면 서러운 길치인 내가 겨우 강의실 가는 길을 익히고 캠퍼스 내에서 방향을 어렴풋이 짐작 가능한 정도의, 딱 그만큼의 시간이었다.


그날은 유달리 햇살이 좋은 날이었다. 어느 수업인지 잘 기억도 나지 않는데, (사실 모든 수업과 그 수업의 교수님, 튜터 얼굴이 지금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한 수업에 그날따라 또 말도 안 되게 길을 잃어서 지각을 했었다.


매일 가던 강의실을 가다 길을 잃는 건 정말 짜증 나는 경험이다. 그 길이 그 길 같아서 주욱 따라 들어갔는데 모르는 곳이었고, 헤매기 시작하자 그날따라 얼마나 꼬이고 또 꼬이던지. 지각하느니 차라리 안 가고 말지 하는 이상한 사상을 갖고 있는 나로서는 정말 짜증 나는 일이었다. 수업이 진행되고 있는 강의실에 혼자 늦게 도착해 문을 열고 들어가는 기분은 정말 별로인 일이기에.


여하튼 헤매고 또 헤매다 겨우 강의실에 도착했고, 이미 수업은 시작되고 있었다.


여느 때처럼 교수님은 파워포인트 화면을 띄워놓고 강의에 열중이었고, 지각해 바삐 걸어온 내 등에는 비지땀에 매달려 있었다. 노트북을 펼쳐놓고 황급히 강의 내용을 따라잡으려고 발표를 듣고 있는데, 다행히 내용이 내가 다 아는 것이었다. 통계 프로그램을 돌려서 기초 통계를 공부하는 부분이었는데, 교수님은 통계 프로그램을 사용하기 위한 엑셀 기초 강의를 하고 있었고 IT 강국인 한국에서 온 사람에겐 그 내용이란 너무나도 뻔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엑셀에서 덧셈, 뺄셈을 하는 법, 기본적인 함수 사용 그런 것이었는데... 사실 회계 함수, 재무 함수까지 배우고 온 나에겐 정말이지 쉬운 내용이었다.


지각도 했겠다, 내용도 아는 것이겠다, 더워서 집중도 되지 않겠다.... 노트북을 펼쳐놓고 네이버와 다음, 네이트를 오가며 그냥 한국 뉴스를 보면서 강의를 듣는 척하면서 은근히 딴짓을 하기 시작했다. 


내 옆에 앉은 한 학생이 그런 나를, 그리고 내가 보는 웹 페이지들을 유심히 쳐다보고 있었다.


뭐야... 봐도 자긴 한국어라 이해도 못하면서 뭘 저렇게 열심히 본대? 그 학생을 흘깃 쳐다본 후 온갖 연애 기사와 뉴스를 섭렵하고 있는데 갑자기 걔가 내 어깨를 툭 치고 말을 걸었다.


-야, 너 이름이 뭐더라?

-켈리야.

-아 맞다 켈리. 한국에서 온 켈리 맞지?

-응 맞어.


뭐야. 갑자기 왜 말을 거는 거야? 분명 저번에 통성명한 얼굴인데, 어차피 얼굴을 정말 기억하지도 못하기에 괜히 또 이름 물어보기도 귀찮아서 굳이 그 학생의 이름을 물어보지도 않았다. 그때 상당히 쇼킹한 연애 관련 기사를 보고 있어서 그 학생이 말 거는 게 귀찮기도 했다.


나는 계속 딴짓을 하고 있는 반면, 옆자리 그 아이는 굉장히 열심히 필기도 하면서 유심히 교수님의 강의를 듣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굉장히 생뚱맞게,


-켈리야. 너 수업 안 듣고 왜 자꾸 딴 거 해? 이거 중요한 부분 같은데 듣지 그래?


하고 오지랖 넓은 태클을 거는 것이 아닌가.


뭐야? 외국은 다 개인주의라더니 내가 뭘 하든 본인이 뭔 상관이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 나는 다 아는 내용이라서... 너 열심히 해.


라고 대답하자 


-그래도 수업시간에 누가 발표하면 듣는 게 예의 아니야?


라고 대꾸하는 것이다.


솔직히 맞는 말이었지만 본인이 뭔데 내게 이래라 저래라인지.. 좀 황당한 마음이 들었다. 너나 잘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러면 너무 4가지 없어 보일까 봐 그 마음을 꾹 누른 채


-나 이거 다 아는 내용이라서 오늘은 좀 릴랙스 하려고~


하고 좋게 좋게 대답을 했다.


그러자 그 학생이 한술 더 떠서,


-내 생각이지만, 너가 알고 모르고를 떠나서 그래도 앞에서 이야기하는데... 그걸 들어주는 게 예의인 것 같아~


라고 충고를 건넸다.


정말 맞는 말이었지만, 그날따라 짜증이 났다. 사실 수업시간에 교수님도 학생들에게 이래라저래라 하지 않는데 얘는 옆에 앉아서 왜 이러는지 정말... 길도 잃고 오늘따라 일진도 좋지 않은데...


까칠하게,


 -내가 알아서 할게. 나한테 신경 쓰지 말아 줘.


하고 대답하고는 더 이상 그 아이 쪽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교수님은 계속 엑셀 기초 강의를 하고 있었고, 오지랖 넓은 내 옆의 학생은 굉장히 열심히 공부하는 모양새였다. 그렇게 1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쉬는 시간이 지나고 다시 강의가 재개되는데, 내 옆에 앉은 학생이 갑자기 박수를 치면서 칠판 앞으로 나가서 섰다. 그러고는 아까 그 내용이 자기는 감명 깊었느니, 굉장히 디테일했다느니 하면서 급 칭찬을 하기 시작했다.


'완전 관심종자 아니야?;;;' 하고 생각하던 그 찰나에, 


그 학생이, 갑자기 출석을 부르기 시작했다.


순간 멘붕이 왔다.


저 학생은 뭔데 교수님의 수업 내용에 대해 코멘트를 하고, 지가 뭔데 출석을 부르는 거지?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뇌가 정지한 듯했고, 주변 친구들을 둘러보니 친구들은 다 태연하게 출석에 대답을 하고 있었다. 






사실 그날은, 특별히 발표 수업이 진행되는 날이었다.


수업시간에 툭하면 집중 않고 혼자 딴생각을 멍하니 하는 날이 많았던 나는 그날 발표 수업이 있다는 걸 까맣게 몰랐고, 심지어 그날 지각을 하는 바람에, 학생이 교수님 대신 발표 수업을 한다는 사실도 몰랐다. 


내가 강의실에 도착했을 땐, 이미 발표하기로 한 학생이 발표 수업을 진행하고 있었고, 교수님은 내 옆에 앉아서 그 학생의 발표를 채점하고 있었다.


내 옆에 앉아서 내게 자꾸 오지랖을 부렸던 사람은.... 학생이 아니라 교수님이었고, 사람 얼굴을 절대 기억하지 못하는 나란 사람은 교수님도 못 알아보고, 딴짓하지 말고 발표 들으라고 좋게 이야기하는 교수님에게, 내가 알아서 할게!!! 하고 꼴을 부린 천하의 돌+아이가 되었다.


그 사람이 교수님이라고 이해하고 나니 모든 상황이 말이 되기 시작했다. 점잖게 나한테 '그래도 들어보는 게 어때?' 하고 건네던 충고 하며.. 열심히 필기하던 (그 학생의 발표를 채점하던 것이었다..) 모습까지..



강의가 끝나고 다들 강의실을 떠나는데, 나만 거길 떠나지 못하고 붙박이장처럼 못 박혀 있었다.


지금이라도 따라가서 죄송하다고 해야 하나, 몰랐다고 해야 하나...


그런데 지금 가서 미안해 네가 교수인 줄 몰랐어..라고 이야기하면 그게 도대체 교수님이 보기에 말이 되는 이야기일까? 나를 헛소리로 핑계만 대는 더 심각한 돌+아이로 보지 않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중 시간은 흘렀고, 너무 당황해 몸은 제멋대로 움직여 나도 모르는 새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러 가고 있었다.


죄송하다고, 무례했다고, 못 알아 봤다고 메일이라도 보내야 하나?.. 온갖 생각으로 머리는 어지러운데, 버스에는 여느 때와 다르게 자리가 하나도 없었다. 무거운 가방을 발 밑에 내려놓고 손잡이를 단단히 잡았다. 메일을 보내는 일도 정말 웃긴 거 같았다. 


오늘은 정말 되는 일이 하나도 없구나. 짜증이 밀려오는 그 와중에, 누군가 크게 내 이름을 불렀다.


-어~ 켈리!!!


버스 뒤편에 앉아있던 구불머리 회장이 웃으면서 내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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