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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elly You Aug 12. 2020

한국에서의 짧은 방학

사진은 내가 실제 살던 브리즈번의 아파트.

호주의 7-8월은, 늘 따스한 기후를 자랑하는 브리즈번이라 하더라도 많이 춥다. 특히나 부족한 난방 시설로 인해 겨울 아침에 하는 샤워는 지옥같은 맛이었다. 학생 때는 난방비가 걱정되어 히터도 맘껏 틀지 못했었기에, 집이 너무 추워 집 안에서 패딩을 입고 어그부츠를 신고 목도리까지 꽁꽁 싸매며 난 브리즈번의 겨울.


최선의 피신처는 한국으로 가서 여름 날씨를 즐기는 거였다.


처음 1년하고도 6개월 과정의 석사 학위를 계획하면서, 호주의 추웠던 겨울이 떠올라 한국을 떠나기도 전에 방학 기간에 맞춰 끊어두었던 비행기 티켓이었다.


오랜만에 보게 될 가족과 친구들 얼굴이 떠올라 마냥 신나게 짐을 싸고, 한국에 가서 먹고 싶은 음식들을 줄줄 읊어도 보며, 다시 귀국하는 길에 사올 한국 음식 재료등을 떠올리며 신나는 시간을 보냈다.


부푼 마음을 안고 다시 도착한 고향.


비행기에서 내리자 소금기와 습기를 잔뜩 머금은 향기가 코 끝으로 훅 들어오니, 오랜만에 다시 고향에 왔다는 게 실감이 났다.


사실 석사학위를 하면서 시작한 첫 학기가 너무 힘들고 어려웠어서 그저 푹 쉴 생각으로 갔었는데 고향에선 많은 일들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유학을 떠나며 사표를 냈던 학원 원장님도 전화가 와서 제발 방학 특강을 도와달라며 간절히 부탁을 하셨고, 여름이 최고 성수기라 매일같이 바쁘고 힘들어 지쳐보이는 엄마의 일도 외면할 수가 없었다. 


결국 나는 브리즈번의 추위를 피해 쉬려고 온 한국에서, 학원일과 집안일로 최고 바쁜 몇 주간을 보내게 되었다.


첫 며칠은 눈코뜰새 없이 바빠 호주의 일과 친구들은 생각이 나지도 않았다. 페이스북 단체방에서 계속 울리는 메세지들은 나중에 답해야지 하고 자꾸 미루게 되었고 더위와 각종 일에 지쳐 집에 오면 자리에 쓰러지듯 눕는 날의 반복이었다.


그렇게 아마 방학의 1/3 정도가 지난 지점이었을 것 같다.


문득 구불머리 회장의 안부가 궁금해졌다. 그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호주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연락이 왔었는데 한국에 오니까 갑자기 뚝 끊겨버린 연락. 역시 그는 그냥 심심해서 주변에 이런 저런 사람에게 항상 메세지를 보내는 '브리즈번 한정 핵인싸'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만에 밀린 페이스북 메세지에 답변이나 해야지 하고 책상에 마음먹고 앉아서 컴퓨터를 켰다.


같이 수업을 듣던 동기들의 엄청난 메세지가 몇백개나 쌓여 있었다. 이 녀석들은 도대체 매일같이 만나는데도 이렇게나 할말이 많은지. . 나 없는 사이에 어딜 갔고, 어떻게 만났고, 누구는 이런 헛소리를 했고, 뭐 두부를 먹어봤는데 맛이 없었다는 둥 시시껄렁한 내용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Sorry guys, I've been really busy these days... 


로 시작하는 변명을 구구절절 보내놓고 다른 채팅방을 슥 훑어보는데 구불머리 회장의 메세지도 잔뜩 들어와 있는 게 보였다.


이상했다.


친구들의 채팅방은 매일같이 알람이 울려대서 실시간으로 중계가 되었는데, 구불머리 회장의 메세지들은 알람이 울리지도 않아 메세지가 들어온 줄도 몰랐었는데.. 왜 알람이 울리지 않았을까 하고 보니까 알람 버튼이 그 채팅방만 꺼져 있었다. 나도 모르게 뭘 잘못 눌렀던 모양이다.


채팅방을 열자 그간 엄청나게 쌓인 메세지들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잘 도착했나? 여기는 추운데 한국은 뜨뜻하겠데이.

-오늘 안박사 만나서 니 이야길 했는데 ...

-뉴스 봤나? 정치인 누구가 저런 이야길 하던데 켈리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네.


대답 없는 내게, 한국에 온 날짜만큼 하나씩 차곡차곡 쌓여있던 구불머리 회장의 메세지들. 나도 내심 연락 없던 그가 서운했던걸까? 메세지를 보니 너무 반가웠다. 브리즈번의 일들이 밀물처럼 밀려들면서 떠난지 며칠 되지도 않는 그 곳이 그리워졌다.


전혀 그렇지 않을 것 같았는데...


그리고 가장 최근에 와 있던, 조금 길어 보이는 마지막 메세지 하나를 보는데 심상치 않은 내용에 심장이 콩닥콩닥거리기 시작했다.


이건.. 거의.. 고백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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